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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규 Apr 17. 2021

새엄마의 빨간맛

고추장에 식초, 매실청, 다진 마늘을 넣어 쫄면 소스를 만들다 집에 오이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고개 들어 멍하니 부엌 창밖을 바라봤다.


초여름 지리산은 빈틈없이 푸르고, 하늘빛은 그날따라 눈이 부셨다. 온 세상이 오이빛인데, 나에게만 오이가 없었다.


오이 고명 없는 쫄면이라니. 이것도 용서하기 어려운데, 내가 요리하는 곳이 문 열고 나가면 마트가 있는 서울이 아니라 지리산 피아골 옥탑방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오이는 90% 이상이 수분으로 이뤄진, 한 마디로 물에 가까운 채소다. 대단한 영양소나 열량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근데, 이 산골에서 오이 하나 사려고 화석연료 태우면서 차를 끌고 약 20분을 달려 읍내까지 가야 하나?


돈 낭비,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 여기에 환경 파괴까지. 그럼에도 나는 차를 몰아 읍내로 향했다. 오이 없는 쫄면을 인정할 수 없다는 집착, 그게 나를 움직였다.  


피아골계곡을 오른쪽에 낀 도로를 타고 내려와, 다시 섬진강을 왼쪽으로 끼고 이어진 19번 국도 위를 달려 가장 가까운 가게에 도착했다.


“오이 있습니까?”


내일 당장 폐업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작고 오래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엄니는 한심한 눈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봤다.


“구례에서 누가 오이를 돈 주고 사 먹는댜?”


평생 돈 주고 오이 사먹은 나는 할 말을 잃고 엄니를 바라봤다.


“오이 농사 짓는 사람들 많아서 다들 이웃끼리 노나 묵고 그러는디... 누가 구례에서 오이를 사묵어?”


엄니 말대로 구례는 유명한 오이 주산지다. 농산물 판매용이 아닌 텃밭에서 오이 키우는 사람도 많다. 이런 동네에서 오이 사겠다고 차 끌고 산골에서 내려왔으니, 엄니에겐 내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까.

“몇 개나 필요혀?”


엄니는 가게 진열대가 아닌 부엌 냉장고로 향하면서 물었다.


“하나면 됩니다.”


엄니는 오이 두 개를 꺼내왔다.


“얼마 드리면 될까요?”

“구례에서 누가 오이를 돈 주고 사묵어! 그냥 가져 가!”


나는 고개를 꾸벅하고 엄니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엄니는 뒤돌아 떠나는 내 뒤통수에 대고 다시 한 번 목소리 데시벨을 높였다.  


“구례에서 돈 주고 오이 사 묵는 인간은 평소 어떻게 살는지 돌아봐야 혀! 오죽하면 오이를 돈 주고 사묵겠어!”


섬진강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연히 눈에 들어온 꽃 하나, 저녁 산책에서 느낀이 미풍이 마음을 흔드는 것처럼, 엄니가 무심히 던진 말이 자꾸 생각났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내 삶을 돌아보면서 반성한 건 아니다. 돈 주고 오이 사먹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곱씹다가… 집 도착 무렵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도마 위에 오이를 올려 얇게 채를 썰어 쫄면에 올릴 시간. 거의 물에 가까운 오이는 무, 당근에 비해 썰기가 수월하다. 적당한 힘으로 쥔 칼로 타격 하듯이 오이를 썰면 칼이 도마를 때리는 경쾌한 소리를 느낄 수 있다. 부엌에 퍼지는 오이향은 덤이다.


나는 오이 썰 때의 도마 소리와 그 향을 좋아한다. 한 여인이 남긴 유산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 우리집 부엌에서 오이를 썰던 그 사람은 칼이 도마를 때리는 리드미컬한 소리를 즐길 줄 아는 게 분명했다. 초등학교 2학년 늦봄,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부엌에서 퍼진 그 소리는 아버지의 칼질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천천히 부엌으로 움직였다. 한 여자가 부엌 한쪽 벽과 마주한 채 오이를 썰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그 여자 뒷모습을 바라봤다. 우리집에… 세상에나 우리집에… 그것도 부엌에서 여자가 음식을 만들다니.

칼을 쥔 여자의 뒷모습과 도마 소리와 부엌에 퍼진 오이향은, 내가 속한 익숙한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그보다 훨씬 어린 시절에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해 떠났기에, 나는 그때까지 우리집에서 여자가 음식 만드는 모습을 못 봤다. 부엌은 아버지의 공간이었고, 음식은 아버지가 만들어야 했다. 그게 내가 알던 세계였다.


잠시 뒤 부엌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지금까지 당신이 내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어색하고도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새엄마야. 앞으로 엄마라고 불러. 알았지?”


내가 속한 세계가 연속으로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이로써 내겐 엄마가 두 명 생겼다. 안양시 창신여인숙 끝방에 사는 나의 생모. 지금 내 눈 앞에서 오이를 써는 새엄마.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는 오이를 리드미컬하고 부드럽게 써는 그 여인을 엄마라고 불렀다.


술과 도박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 우리 아버지, 참 부지런도 하시지. 그 바쁜(?) 와중에 어떻게 시간을 쪼개 작업을 걸고, 연애를 하고, 기어코 한 여자를 집안으로 들이는 데 성공했을까. 이건 사랑의 힘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마성의 매력이 아버지에게 있던 걸까.


그날 새엄마는 고춧가루와 식초, 간장으로 버무린 오이무침을 만들어 상에 올렸다. 새엄마가 내게 처음 만들어준 음식. 어린이 입맛에 그게 딱히 맛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새엄마의 칼질이 아버지의 그것보다 경쾌하고 가벼웠듯이, 새엄마가 뚝딱 만들어낸 오이무침은 평소 아버지가 해준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사실 아버지가 만든 음식은 맵고, 짜고, 무겁고, 거칠었다. 1980년대 그때, 40대 중반의 아버지에게, 그것도 보신탕집을 운영한 남자에게 섬세하고 담백하고 슴슴한, 식재료의 맛을 잘 살린 디테일한 음식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도박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음식에서도 ‘한 방’이 있는 걸 선호했는데, 그런 것들은 대체로 빨간색의 자극적인 탕이나 찌개였다.


그에 반해 새엄마의 음식은 대체로 간단하고 슴슴했다. 한 방이 있는 음식보다는 집에 있거나 산과 들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식재로로 가벼운 반찬을 주로 만들었다. 우리집에 처음 온 날 뚝딱 만들어낸 오이무침처럼 말이다.


그런 밑반찬이 뭐 그리 대수겠냐마는, 그 시절의 내겐 극적 변화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대학 입학이나 직장 때문에 첫 자취할 때를 떠올려보자. 그 시절, 가장 많이 먹는 음식은 기름진 육류인데 주로 술집에서 안주로 섭취한다. 신선한 과일이나 나물, 야채 등 밑반찬은 그 시절 가장 먹기 힘든 희귀한 음식 아니었나?


새엄마가 오기 이전, 아버지와 나의 밥상 역시 그랬다. 아버지는 보신탕 같은 스펙터클한 음식은 만들 줄 알면서, 김치나 오이무침, 나물 같은 반찬은 거의 만들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밥과 찌개 혹은 밥과 국으로만 거의 모든 끼니를 해결했다.


그런 밥상에 슴슴하고 새콤한 반찬이 올랐으니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하지만 이 담백하고 상큼한 변화는 우리의 일상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이벤트, 확실한 한 방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디테일에 약하다. 아버지는 그런 스타일이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남자는 결혼이나 애정 관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깜짝 이벤트는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는 법이고, 확실한 한 방에 대한 꿈은 거의 대부분 한 방에 훅 가는 걸로 종결된다. 인간의 일상은 그런 화려함이나 부푼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대체로 지루하고, 많은 순간 외롭고 고독하며 심심한 게 인간의 일상이다.


이런 일상을 그나마 유지하고 지탱해주는 건, 디테일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어떤 꾸준함이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새엄마는 어떻게 우리집에 오게 됐을까. 어떤 설렘과 기대가 있었기에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 나의 두 번째 엄마가 되는 걸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그 시작은 알 길이 없으나, 모든 관계가 끝나는 순간을 나는 목격하고야 말았다. 화려한 여름이 끝나고 찬바람이 불 무렵이었다. 아버지와 새엄마는 심하게 다퉜고, 그날로 새엄마는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1년도 함께 하지 못한 짧은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그날 밤 아버지는 어린 날 앉혀놓고 “사는 게 참 외롭다”고 말했다. 그때의 내가 “일상을 지키는 힘은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알았다면 무슨 위로라도 했을 텐데,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아버지 앞에서 엉엉 울기만 했다.


생모도 떠나고, 두 번째 엄마도 떠나고… 아버지와 나는 다시 맵고, 짜고, 무겁고, 거친 자극적인 밥상으로 돌아갔다.

내가 자라면서 아버지의 부엌은 조금씩 나의 공간이 됐다. 아버지 덕분에 음식 만드는 게 어렵지 않으나, 놀랍게도 나의 입맛과 요리 방식은 새엄마를 닮았다.


종종 갈비찜을 하고, 소고기로 육개장을 만들고, 민어매운탕과 파스타도 만들지만, 나는 이런 거대한(?) 음식보다 소소한 반찬 만드는 걸 선호하고 중요시 여긴다. 일상을 버티게 힘은 갈비찜이나 육개장보다는 배고플 때 언제든 냉장고에서 꺼내 먹을 수 있는 반찬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얼마 전, 집에 오이가 있어 간단하게 무침을 만들었다. 매실청, 식초, 액젓 약간, 다진마늘, 양파, 참기름을 넣고 고춧가루는 약간만 뿌렸다. 나는 자극적인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부추를 넣고 싶었으나 집에 없었다. 대신 냉장고에 있던 고수를 넣었다. 어떤 식재료가 없다고 해서 이젠 멀리 사러가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핵심 재료가 아닌 이상, 없으면 없는 대로 만들어 먹으려 노력한다. 자신이 가진 걸로 최고의 맛을 내는 것, 요리의 핵심은 그것이지 싶다.


오이무침을 다 만들고 보니, 오래전 새엄마가 만들어준 것과 비슷했다. 새엄마의 빨간맛은 딱 이 정도 비주얼, 새콤 매콤 딱 이런 맛이었다. 채 1년도 함께 살지 않았지만, 새엄마는 내게 건강한 맛, 최고의 요리 비법을 물려줬다.


아홉 살의 내가 도마 소리에 이끌려 부엌에 갔던 그때, 새엄마의 뒷모습이 아닌 서로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미소로 인사를 나눴다면 우리의 인연은 달랐을까?


나란 놈은 무심하게도 새엄마의 얼굴을 잊어 버렸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엄마로 불렀던 이 세상 두 번째 여인, 한 시절 날 보살펴 줬던 사람. 난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은 채 살아왔다.


내 뒤통수에 대고 외친 구례 마트 엄니의 일침은 틀린 말이 아니다. 정말이지 나란 인간은 평소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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