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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규 May 08. 2019

그해 봄날, 아버지에게 준 선물

[아버지의 레시피 4화 - 원추리나물]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귀가했을 때 가장 만만한 화풀이 대상은 엄마였다. 주머니에 이어 내면의 허세마저 탈탈 털린 그날 밤, 술에 취한 내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엄마네 집이었다.


안방에 들어섰을 때 엄마는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 옆 방바닥에 주저앉아 양말을 벗으며 엄마에게 술주정을 했다.


“엄마... 자? 난 학교도 짤리고... 사는 게 참 힘들다.”


나보다 사는 게 고단했던 엄마는 잠이 들었는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나의 주정은 짜증으로 업그레이드 됐고, 목소리 데시벨은 한 단계 높아졌다.


“엄마는... 형 누나한테는 팍팍 돈도 잘 쓰면서... 나한텐 왜 그래? 등록금도 안 주고.”


이쯤 했는데도 움직임이 없다는 건 수면 상태가 아니라는 증거다. 나는 어둠속에서 주정과 짜증을 길게 이어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엄마는 누운 자세를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그만 해. 너까지 그러면 엄마 많이 힘들어. 취했으면 건너가 잠이나 자.”


의외의 한방에 나의 주정은 길을 잃었다. 나는 안방에서 나가지도 못한 채 어둠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침묵을 엄마가 깼다.


“엄마가 키우지 않았지만... 넌 지금까지 잘 살아왔잖아. 그래서 좀 얄미워. 못난 자식들에게 더 신경을 쓰는 게 부모 마음이야. 엄마는 네 형이랑 누나 챙기는 것도 벅차. 너한테 쓸 마음도, 줄 돈도 없어. 미안한데... 넌 네 힘으로 알아서 살아.”


엄마는 여전히 뒤척이지도 않았다. 난 훌쩍이면서 안방 문을 닫고 조용히 나왔다. 목소리는 커도 내면은 허약한, 살 만한데도 금방 죽을 듯이 엄살을 피우던, 스물 두 살 때의 일이다.


지리산 피아골 계곡.

그해, 나와 평생을 산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등록금을 내지 못한 나는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피해 의식에 젖어 허공에 주먹질 해대며 방황하던 그 시절 어느 하루, 나는 엄마에게 괜한 짜증을 냈던 거다.


성인이 된 이후, 엄마와 함께 했던 일을 생각하면 나의 완패로 끝나버린 저 ‘한밤의 대결’이 먼저 떠오른다. 당신이 키우지 않은 막내 아들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다는 엄마의 고백은, 우리의 엇갈린 인연을 잘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엄마에 대한 나의 첫 기억에 웃음은 없다. 산골 집 앞 언덕에 종일 앉아 울며 엄마를 기다리는 일, 그것이 엄마에 관한 가장 오랜 기억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으니, 6~7세 때의 일이다. 옆집 과수원 총각과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이혼해 산골을 떠난 엄마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형과 두 누나는 초등학생이어서 학교에 가고 나면 산골 집에 남는 건 아버지와 나뿐이었다. 그때의 지루함, 답답함, 종일 울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턱 막히곤 한다.


삶의 중요한 국면에서 늘 사랑을 선택한 엄마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이 엠 러브(I am love)’. 엄마는 옆집 총각과 사랑이 저물자 또다른 사랑으로 이전 사랑의 아픔을 잊었다.  


사랑의 불덩어리였던 엄마는 생활력도 강했다. 불처럼 뜨거운 사랑이 빙하처럼 식어도 엄마는 손에서 때수건을 벗지 않는 강한 여자였다. 때밀이로 일하면서 안양 남부시장 끄트머리 창신여인숙 2층 끝방의 살림을 불리고 또 불려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가족을 불리기 시작했다. 형을 당신 곁으로 데려가더니, 큰누나와 작은누나를 차례차례 불러 창신여인숙에서 키웠다.


자 이제, 막내인 내 차례다. 형, 누나들처럼 엄마에게 갈까, 아니면 아버지 곁에 남을까. 결과는 뻔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 뻔한 결과가 빗나갔다. 나는 아버지 곁에 남았다.


어린 내 눈에 아버지가 불쌍해 보였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나도 엄마에게 가고 싶었던 건 확실하다. 하지만 나마저 떠나면 아버지 혼자 남으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막내라는 이유로 순서에서 밀리고 밀려 어쩔 수 없이 산골에 나만 남았다.


그렇게 우리 형제 2남2녀는 둘로 쪼개졌다. 도시에서 엄마와 사는 1남2녀, 산골에서 아버지와 사는 1남으로 말이다.


산골에 남겨진 꼬맹이가 가장 잘 하는 건 징징대며 울기, 두 번째로 잘하는 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뛰어놀기다. 엄마, 아버지가 물려준 어떤 유전자의 힘은 다행히 나를 후자 쪽으로 몰고 갔다. 세월의 힘 역시 강력해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와 둘이 사는 환경에 적응했다.


1980년대 초반 청계산 농경사회는 아직 붕괴하기 전이어서 나와 놀아줄 친구도 마을에 많았다.


형과 누나들이 모두 떠난 그 해의 봄날이 생각난다. 내 엄마를 사랑했던 총각네 과수원에서 친구들과 뛰어 놀았다. 나보다 키도 크고 달리기도 잘했던 몇몇 형들이 쭈그려 앉아 냉이를 캐고, 원추리를 뜯었다. 나도 쭈그려 앉아 형들이 알려준 원추리를 뜯었다.


생애 처음으로 자연에서 식재료를 채취한 순간이었다. 나는 푸른 원추리를 봉지에 담아 집으로 가져가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총각네 과수원에서 뜯어온 걸 알면서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아버지는 그 원추리로 된장국을 끓였다.


단둘이 마주 앉은 저녁상에서도 아버지는 “네 덕분에 맛있는 걸 먹는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어린 입맛에 원추리 된장국이 맛있지는 않았을 터. 그럼에도 내 기억에 원추리 나물과 그 저녁상이 선명히 남은 건, 아버지의 따뜻한 칭찬 때문이지 싶다.


그 후로 나는 수시로 냉이, 원추리, 쑥을 뜯어 아버지에게 갖다 줬다. 아버지가 기뻐해서 좋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꽃피는 그 쓸쓸한 봄날을 무사히 넘겼다. 형과 두 누나도 도시에 적응해 엄마와 함께 살아갔다.


형과 두 누나는 막내를 걱정하는 게 자신들의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혼자 산골에 남은 나를 자주 연민했다. 반면, 나는 막내 특유의 싸가지 없는 태도로 형과 누나들을 연민하지 않았다. 함께 모여 사는 그들이 자주 부러웠고, 때로는 질투했다.


우리 형제들은 가끔 왕래했고, 그만큼 멀어졌다. 다른 환경에서 자란 형제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우주 생성 법칙을 알아가는 것만큼 어렵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며 우리 2남2녀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른이 됐다.  


1980년대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된 지금, 어린시절 내가 부러워했으나 절대로 연민하지 않았던 형과 두 누나의 유년을 돌아보곤 한다.


나물로 먹을 수 있는 원추리 순. 여름에는 노란 꽃이 핀다.

엄마가 목욕탕에서 하루 15시간 때밀이 노동을 감내하는 동안, 그 어린 것들은 세상의 끄트머리 같았던 창신여인숙 좁은 방에서 어떻게 무료함을 달랬을까. 산과 들이 없는 그 시장골목에서 무엇을 하며 놀았을까.


사춘기 시절 형과 두 누나의 방황과 상처, 그 이후의 굴곡진 삶을 생각하면, 산골에 남겨진 내 처지가 훨씬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한발짝 떨어져 있던 내 감정이 이러한데, 형과 누나들을 키운 엄마의 마음을 어땠을까.


끝내 당신 곁으로 오지 않은, 혹은 데려 오지 못한 막내 아들이 때로는 미안하고 짠했는데, 알고보니 그 녀석은 산나물 뜯어 먹으며 무탈하게 자라고, 당신이 거둔 자녀들에겐 오히려 상처가 많다는 걸 알았을 때, 엄마의 심정은 무척이나 복잡했을 터다.


내가 얄밉다는 말은, 참으로 솔직한 엄마다운 표현이다. 새끼를 낳아보지 않았지만, 부모의 마음은 안타까운 자식에게 더 쏠리기 마련이라는 말에도 이젠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사람의 성향과 기질은 타고 나는 걸까, 아니면 살면서 만들어지는 걸까. 잠시 미신(?) 이야기를 하자면, 가끔 내 사주팔자를 보는데 그 결과는 대체로 비슷하다. 요약하면 이렇다.


‘산에 갖다 놓으면 나물 뜯어 먹으며 살고, 바다에 갖다 놓으면 물고기 잡아 먹으며 삽니다. 어디에 가든 거기 적응해 밥벌이 하면서 살아갑니다.’


엄마도 내게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넌 어떻게든 살아갈 거 같다, 난 네 걱정 별로 안 한다.”


어쩌면 나 역시 엄마와 비슷한 생각, 같은 판단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내 눈에도 엄마는 강한 생명력으로 어떻게든 살아갈 듯했고, 아버지는 무얼 해도 온전히 살 수 없어 보였다. 약해 보이는 자식에게 엄마 마음이 쏠렸듯이, 나는 불쌍한 아버지에게 몸과 마음이 저절로 갔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결국 엄마와 나는 같은 길을 걸었고, 그래서 운명처럼 인연이 엇갈린 셈이니까. 약하고 못난 것에 마음이 끌린다는 그럴듯한 명분도 얻은 것 같고 말이다. 살다보면 새로운 의미 부여도 중요하다.


칠순을 넘긴 엄마는 경기도 모 도시에서 형 가족과 함께 산다. 바로 옆에는 큰누나가 살고, 작은누나도 자주 엄마를 찾는다. ‘엄마네 가족’은 수시로 자주 모인다.

고추장으로 무친 원추리나물.

아버지는 1996년에 돌아가셨다. 2015년, 나는 나이 마흔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지리산 피아골로 내려왔다. 산나물이 많이 나는 곳이다. 해마다 봄이면 엄마에게 두릅, 엄나무순, 고사리, 취나물 등 산나물을 보낸다. 엄마는 무척 좋아한다. 형과 두 누나와 나눠 먹는다고 한다.


올해는 작정하고 지리산 자락에서 원추리를 나물을 채취했다. 내 생애 첫 나물이자 아버지에게 전한 첫 식재료. 아버지처럼 된장국을 끓여볼까 하다가 무침으로 마음을 바꿨다.


뜨거운 물에 원추리 순을 데친 후 고추장, 들기름, 식초, 매실청, 다진마늘을 넣고 무쳤다. 처음엔 젓가락으로 버무렸는데 답답해서 그냥 맨손으로 버무렸다. 마지막엔 참깨를 뿌렸다. 맛을 봤더니 새콤하게 씹히는 맛이 좋아 입안에 금방 침이 고였다.


지리산 피아골, 내가 살던 첫 번째 집.

나의 중요한 기질, 내 삶의 결정적 터닝 포인트는 이 나물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며 꼭꼭 씹어 먹었다.


지리산 피아골에서 구한 첫 번째 집은 산과 인접했고 마당이 넓다. 집 아래로는 맑은 냇물이 흐른다. 내가 유년을 보낸 청계산 그 집과 무척 흡사하다. 돌고 돌아 나이 마흔에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온 셈이다. 이걸 알면 엄마가 또 한마디 하겠지.


“아이구, 얄미운 놈!”


(박상규는 진실탐사그룹 <셜록> 대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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