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레시피 - 3편]
물기 많은 축축한 소리와 겨울밤의 연결고리를 떠올린 건, 동거인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 때문이다. 청국장을 끓이기 위해 부엌칼로 신나게 무를 썰던 아침이었다.
“선배는 무를 진짜 좋아하나봐. 청국장은 되직하게 끓여야 맛있는데, 왜 굳이 물기 많은 무를 넣어? 된장찌개에도 감자 대신 무를 넣고. 무가 그렇게 좋아?”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나는 음식 재료로 무를 즐겨 쓴다. 된장찌개에는 감자 대신 무를 넣고, 굳이 시원할 필요가 없는 청국장을 끓일 때도 무를 넣는다. 무를 넣은 생선탕과 생선조림은 물론이고, 칼칼한 무채무침도 좋아한다.
질문에는 답을 못하고 멍하니 동거인을 바라봤다. 썰던 무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동거인이 다시 물었다.
“생무를 왜 그렇게 먹어? 그게 맛있어?”
먹을 게 넘치는 세상인데, 싱거운 무가 뭐 맛있겠나. 나는 또 답을 못하고 천천히 무만 씹었다. 축축한 소리가 부엌에 퍼졌다. 창밖으로 어둠이 물러나고 아침이 몰려오고 있었다. 지루했던 무수한 겨울밤의 기억이 예상못한 손님의 방문처럼 내 머리로 밀려왔다.
산골의 겨울밤은 일찍 찾아와 늦게 떠났다. 따뜻한 낭만이 전혀 없지 않았으나, 길고 추운 겨울밤은 가슴이 허하고 시린 아버지와 나에겐 견기디 힘든 검은 장막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머리가 빠져 이마마저 넓었다.
TV 채널은 KBS, MBC뿐이었던 시절. 그 소수의 채널에서도 아버지를 닮은 전두환은 쉴 새 없이 나왔다. 깊은 밤, 아랫목에 누워 TV를 켜면 심심했고 끄면 지루했다. 무료함이 깊어지면 아버지는 전등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상규야, 무나 깎아 먹자.”
아버지는 초겨울 땅에 묻은 흰 무를 캐와 방바닥에 신문을 깔고 작은 칼로 무 껍질을 벗겼다. 칼날이 속살을 파고들 때마다 물기 많은 겨울무에서는 축축한 소리가 났다.
아버지와 나는 껍질 벗긴 무를 천천히 씹어 먹었다. 턱 관절의 힘으로 잘게 부서지는 무에서는 촉촉한 소리가 났다. 무는 시원하고 알싸했다.
무를 씹다 오줌이 마려워 마당에 나가면 불 켜진 복숭아 과수원 집이 보였다. 엄마가 정 주고 마음을 줬던 그 총각이 살던 집의 불빛은 괜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고 황현산 선생의 말처럼 밤이 선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는 밤의 지루함과 답답함을 잘 견디지 못했다. 겨울밤이면 더 선명하고 따뜻해 보이는 과수원 총각네 불빛이 꼴도 보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흰 무 깎아 먹는 것도 지겨울 때쯤 아버지는 읍내로 화투를 치러 나갔다.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무렵에야 당신의 머리처럼 허전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낮잠을 잤다. 밤이면 다시 무를 깎아 먹었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겨울, 아버지가 가진 건 눈처럼 하얀 무뿐이었다.
아버지가 밤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면, 아버지의 엄마인 내 할머니는 홀아비가 된 당신 아들의 처지를 견디지 못했다. 수원시 고색동 큰집에서 살던 할머니는 의왕시 청계산 끄트머리에 있던 우리집을 자주 찾아왔다.
지금처럼 교통이 좋지 않던 시절, 할머니의 여정은 고난의 행군에 가까웠다. 대략적인 루트는 이렇다. 고색동 집에서 수원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나온다 -> 시외버스를 타고 인덕원(현재 서울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까지 온다 -> 다시 버스를 갈아 타고 청계산 입구까지 온다 -> 여기서부터 도보로 약 2시간 걸으면 드디어 도착.
꼬부랑 할머니에게 이 여정은 꼬박 하루가 걸렸다. 아내와 이혼해 혼자가 된 아들을 향한 늙은 엄마의 안타까움, 중년의 아들이 밥은 먹고 다니는지 염려하는 엄마의 원초적인 걱정. 그런 연민이 아니면 할머니의 여정을 이해할 길이 없다.
힘들게 집에 도착한 할머니는 아버지와 나를 보면서 눈으로 안부를 물었다.
‘너희들, 밥은 먹고 다니냐?’
세상의 많은 자식은 자기를 향한 부모의 연민을 참견과 잔소리로 여긴다. 아버지도 그랬다. 할머니가 밥상 앞에서 이런저런 걱정을 늘어놓으면, 아버지는 우락부락 거친말로 받아쳤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마음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할머니가 조근조근 말을 할수록, 밥상 위에는 차곡차곡 냉기가 쌓였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밥상을 엎어버리기라도 할까봐,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밥상을 꼭 움켜쥔 채 모자 사이에 평화가 찾아오길 기다렸다.
할머니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종종 동네 마실을 갔는데, 하필이면 찾아가는 곳이 과수원 총각네 집이었다. 거기엔 총각의 늙은 엄마가 살았다.
내 엄마가 그 집 총각을 사랑해 아버지와 이혼한 사실을 알 리 없는 할머니는, 총각의 늙은 엄마를 붙잡고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우리 막내 아들(내 아버지)은 나이 먹어 혼자가 돼서 아주 불쌍해 죽갔어요. 어린 놈(나)이랑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는지 모르겠어요.”
꼬맹이 엄마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꼬마 아들이 대머리 어른이 되어도 서로의 속을 아는 건 이토록 어렵다.
당신 아들과 우리 엄마-아버지 사이의 ‘사랑과 전쟁’을 잘 아는 과수원집 할머니는 현명했다. 진실은 숨겨둔 채 착한 거짓말로 내 할머니를 위로했다. 같은 동네 이웃이니 종종 챙겨보겠다는 공감의 말도 했다.
그 덕에 청계산 젊은 것들의 사랑과 전쟁은 그 윗 세대 엄마들까지 싸우는 막장으로 흐르지 않았다. 내 할머니는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 발길 끊긴 겨울의 산골 보신탕집만큼 삭막한 공간이 또 있을까. 더위와 함께 사람들이 물러나면 아버지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 살림살이는 쪼그라들었고, 그만큼 우리들의 겨울밥상은 홀쭉해졌다. 반찬 없이 사흘은 찌개와 밥, 나흘은 국과 밥, 이렇게 말이다.
아들 속을 알 수 없는 할머니는 배라도 채워주려 노력했다. 할머니의 등장은 내게 밥상의 변화를 의미했다. 시장이나 마트가 없는 산골이니, 할머니도 특별한 음식을 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할머니는 귀신같은 솜씨로 반찬 몇 가지를 상에 올렸다. 배추로 나물을 만든다거나, 큰 멸치와 함께 시레기를 볶는 식으로 말이다.
특히 할머니가 공략한 주요 식재료는, 아버지가 긴 겨울밤을 견디기 위해 땅에 묻어둔 겨울무였다. 아버지가 무를 깎아 먹으며 무료함을 달랬다면, 할머니는 무를 썰어 끓이고 볶아 반찬으로 만들어 허전한 상을 채웠다.
할머니가 상에 올린 하얗고 투명한 무나물은 여러 면에서 혁신이자 혁명이었다.
여백 많은 그 겨울밥상에 눈처럼 하얀 음식이 상에 오르다니. 그 자체로 시각적 충격이었다. 보신탕집 사장답게(?) 아버지의 음식은 대체로 블록버스터 급으로 선이 굵고 무거웠다. 색은 강렬했으며 맛은 맵고, 짜고, 자극적이었다. 그에 반해 할머니의 음식은 멀겋고, 하얗고, 슴슴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그때, 내가 할머니의 음식을 좋아했다면 거짓말이다. 아버지의 밥상보다 군침이 돈 건 사실이나, 고기나 소시지가 아닌 할머니의 슴슴한 음식을 좋아할 정도로 나는 심심한 아이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그 슴슴한 무나물은 내가 최초로 먹어본 여자가 만든 음식이지 싶다. 훨씬 어린 시절에 엄마가 만든 음식을 분명 먹었겠지만 내 기억에는 없다. 어떤 맛의 기억이 몸과 마음에 새겨지기 이전에 엄마는 아버지를 떠났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끼니를 해결한다는 식구(食口)에서 엄마는 없었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와 밥을 먹었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남자, 아버지였다. 홀아비와 산 아들의 당연한 기억이다.
무를 깎아 먹으며 겨울밤을 보낸 아버지와 무나물을 만든 할머니. 두 사람 옆에서 그걸 받아 먹으며 자랐으니, 그 희멀건 무의 기억이 가문의 영광처럼 내 몸에 새겨진 건 당연한 결과다.
추운 날이 다 가기 전에 마트에서 무를 하나 샀다. 향 좋은 굴도 샀다. 오래전 아버지처럼 흰 무를 천천히 깎았다. 그때처럼 축축한 소리가 부엌에 퍼졌다.
껍질 벗긴 무를 도마 위에 올려 채로 썰었다. 균일한 두께로 써는 게 중요하다. 어느 건 두껍고, 어떤 건 얇으면 익는 속도가 달라져 맛있는 무나물을 만들 수 없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채 썬 무를 올렸다. 다진 마늘을 얹고 소금을 약간 뿌렸다. 뚜껑을 덮고 프라이팬을 뜨겁게 달궜다. 금방 달달한 냄새가 퍼졌다.
무가 어느 정도 읽었을 때 생굴을 올리고 다시 한 번 달궜다. 굴이 탱탱하게 익을 즈음 불을 껐다. 무가 너무 익으면 쉽게 부서지고 식감도 사라진다. 굴은 쪼그라든다.
뜨거운 밥과 함께 무나물을 먹었다. 아, 이 슴슴하고 달달한 맛. 밍숭맹숭 심심한 맛이 불러오는 그 시절 지루했던 겨울밤의 기억.
흰 무가 아버지 턱관절 힘으로 잘게 부서질 때 나던 그 촉촉한 소리, 조각난 무가 목구멍으로 뒤어 넘어갈 때 들리던 그 축축한 소리, 아버지의 삶과 끼니를 걱정하던 할머니의 잔소리…
어떤 음식은 맛이 아닌 소리로 기억된다. 나는 혀가 아닌 귀가 기억하는 겨울밤의 맛을 잊지 못해 음식 만들 때 무를 즐겨 쓰는 건지도 모른다. 무를 씹어 먹으며 넘은 밤, 무라도 먹어야 견딜 수 있던 무료함, 출구가 잘 보이지 않던 그 검은 시간. 지금 내가 가진 어떤 면은 그 밤에서 비롯됐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황현산 선생의 말이 맞다. 밤이 선생이었다. 지루했던 겨울밤이 끝나고 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