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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규 Mar 09. 2024

살인범에게 돈 빌린 이야기

모 제보자를 만나기 위해 광화문 A빌딩으로 가는 길이었다. 빌딩 바로 옆 인도에서 '추리닝' 바지 차림의 건장한 남성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호흡에 박자가 맞지 않아 그가 뱉은 연기가 내 입으로 훅 들어왔다. 담배 연기를 싫어해 짜증이 확 일었으나, 그의 몸이 워낙 좋아 상쾌한 공기 마신 양 앞만 보고 직진했다.  


스타벅스 카페에 제보자는 없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잠시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추리닝 걸친 남자가 내게 손짓을 했다. 상당히 반가운 척 나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남자는 나를 차에 태웠다. 차에서는 찌든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신선한 산 공기 들이마시듯 요란하게 호흡을 했다. 차에는 그와 나 둘 뿐이었으니, 역시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었다.


광화문 일대를 한 바퀴 돈 추리닝 남성은 방 딸린 카페로 날 데려갔다. 깔끔한 수트를 입어 더욱 반듯하게 보이는 남성 두 명이 방에 있었다. 둘은 말도 반듯했다. 추리닝 바지 한 명에 수트 차림 두 명. 조합만으로도 내면에서 질문이 터졌다.


‘누구냐, 너희들.’


추리닝보다는 수트 남성들의 정체가 더 궁금해 처음부터 대놓고 물었다. 


"근데, 뭐 하시는 분들입니까?"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는데,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내가 잘 모르는 직업군의 사람들이었다. 한 남자가 말했다. 


"<셜록> 홈페이지에 있는 기사도 살펴보고, 유튜브 영상도 잘 봤습니다. 과거에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길을 가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에 꽂혀서 연락드렸습니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요. 뭐냐하면..."

뱉어 놓은 말은 돌고 돌아 이렇게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아주 오래전에 세바시에 출연해 한 말이다.  <셜록> 만들고 몇 개월 뒤, 나는 보기 좋게 망했다. 직원 월급날이 낀 주에는 취재나 기사 쓰기가 아니라, 돈 빌리러 다니는 게 나의 주 업무였다. 


어느 날에는 오래전에 내가 추적했던 살인범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전화한 나보다 더 깜짝 놀랐다. 왜 아니겠는가. 자기를 추적했던 기자가 갑자기 돈 빌려달라는 전화를 했으니, 채권추심자나 경찰보다 무서웠으리라. 


그의 공포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셜록>을 살려야 한다는 본능에만 충실했다. 돈이 하나도 없다는 그는 내게 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서 150만 원을 빌려줬다. 그는 몇 번을 당부했다. 


"꼭 갚으셔야 합니다. 알았죠? 꼭 갚으셔야 합니다!"


누구한테 빌린 건데, 이 돈을 안 갚겠는가. 회사가 어느 정도 정상화 됐을 때, 그의 돈부터 갚았다. 난 생존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니까.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수트의 남자는 내 과거 향수부터 자극하고 본론에 들어갔다. 말 좀 할 줄 아는, 스토리텔링마저 너무 깔끔해 살짝 마음이 한 발을 뺐다.  


'이거... 조심하자.'


세 남자의 말은 복잡하고, 어렵고, 쉽게 이해가 안 갔다. 이해력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싫어 태연한 척 했다. 그래도 어려웠다. 


세 남자를 삼일 연속 만났다. 그제서야 그들의 말을 겨우 살짝 이해했다. 비로소 편안해진 내 얼굴을 보고 그들은 속으로 생각했으리라. 


'이해력 부족한 박 기자, 이제야 뭘 좀 아는 얼굴이군.'


어제는 수트의 두 남성을 먼저 보내고 추리닝 남성과 잠시 여의도에 갔다. 할일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나오자 해질녘이었다. 바람이 무척이나 찼나. 


추리닝은 "담배 한 대 피우고 가겠다"며 내게 먼저 가라고 했다. 여의도 찬 바람에 홀로 선 그가 왠지 쓸쓸해 보여 곁에 있어 줬다. 마음이 힘든지 그의 큰 얼굴과 눈에 눈물이 고였다. 


"도와주십시오."


그의 말을 타고 나온 담배연기가 여의도 바람에 실려 나의 폐로 들어왔다.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본능보다는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어떻게든 길을 찾아 봅시다."


이 말을 하고 추리닝과 헤어졌다. 버스정류장이 추워 몸이 저절로 움츠러 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는 한참을 떤 뒤에야 도착했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버스에 실린 몸은 몸은 금방 노근해졌다. 광화문 모퉁이의 담배연기, 추리닝, 수트의 두 남자, 이해력 부족한 나의 두뇌,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 내게 넘길 듯 말 듯한 그들의 usb… 나는 묘한 조합의 세 남자와 함께 보낸 3일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리고 한 남자, 내가 가장 어려울 때 내게 돈을 빌려준 그 살인범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다 그냥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추리링의 남자가 음성파일을 한가득 보냈다. 주말 내내, 그가 보낸 자료를 살필 처지가 됐다. 


"두렵고, 떨리고, 무서운 길을 가야 합니다.”


오래전 내가 뱉은 말은 정확히 내게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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