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야드 연가(戀歌)ep.10

젊은날, 리야드로 떠난 취업방랑기이자, "썸"타는 이야기

by 김재석

ep.10 친구가 있다는 건 …

리야드 국립중앙병원 외래검사센터

압둘라 닥터 칩은 화장실에 한참을 머물다 온 나에게 앉을 자리를 지정했다. 자기소개 인사는 그만 됐고, 하는 눈치다.

책상 위에는 아이보리색 버튼식 전화기와 채혈도구가 놓여 있다. 사각 컨테이너에 담긴 진공튜브, 니들(바늘), 알콜 솜, 채혈용 노란고무, 라텍스 장갑, 거스 등 채혈도구를 보자 오히려 애들이 반가웠다. 애들하고만 마음속으로 대화하고 싶었다.

“미스 수진, 오늘부터 할 일은 채혈(blood-gathering)을 하는 거예요. 한국에서 채혈 경험이 많다고 들었어요. 너무 긴장하지 말고 한국에서 하던 대로 하면 돼요. OK.”

압둘라 닥터칩의 말 속에 채혈 같은 아는 단어가 나와서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마지막에 그를 따라 손가락으로 OK! 했다. 닥터 칩은 잠시 고개를 끼우뚱하더니 블라인더가 쳐진 자기 방으로 갔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OK!”

나는 당연히 방실방실 눈인사를 하며 OK 손 사인을 보냈다.

그가 방문을 닫자, 문엔 금박으로 새겨진 ‘Dr. Medical Laboratory Technologist’(임상병리 전문의)’란 글자가 검사실 안을 두루 비추며 묘한 광채를 발했다.

“휴!”

나는 참았던 한 숨을 푹 쉬었다. 어깨가 자연스레 꺼졌다.

내 등 뒤로 누가 다가와 어깨를 주물렀다.

“하이, 미스 최, 난 로라야.”

로라는 몸무게가 족히 80키로는 나가 보였다. 중년 여성인데 키보다는 옆으로 찐 형이라 몸무게가 더 있어 보였다. 그 손힘으로 어깨를 잡고 주무르는데 일단 영어가 튀어나오지 않아서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나는 개처럼 혓바닥을 내밀며 헤헤, 했다.

“첫 날이라 많이 긴장돼나 봐. 이 자리는 미스 김이 앉아서. 일도 잘했는데…. 여기 생활이 잘 적응이 안 되서 1년도 못 채우고 갔어. 미스 최는 똑똑하다고(액셀런트) 들었는데 잘 할 거야.”

그녀의 말 중에 ‘굿 잡’, ‘엑셀런트’ 같은 말들이 귀에 들어왔다. 대략 감은 왔다. 미스 김, 뭐라고 했는데 굳이 다 알아야 하나. 이럴 때 쓰는 영어가 있지 않은가!

“Thank you. 미세스…, 로라!”

나는 입 꼬리를 올리며 초승달 미소를 보냈다. ‘더 이상 말하지 마, 로라.’

그녀는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Cu-te girl~”

숨 막힐 정도로 그녀의 품에 나를 묻어버렸다. 난 그녀의 몸무게에 반도 안 나가는데…, 풍만한 양 젖가슴이 얼굴을 눌러왔다.

‘난 당신 남편이 아니야. 이런 거 안 좋아한다고.’

크리스티나는 꼭 필리핀 처녀처럼 생겼다. 눈은 큰 편이지만 눈가의 잔주름 때문에 약간 겉늙은 느낌. 키도 작고,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동남아 여성 특유의 느낌이 난다. 다가와서 악수를 청하는데 표정이 말을 한다고, 밝은 기운이 넘쳐났다. 그녀도 나처럼 수줍음(?)을 타는 지 “하이” 한 마디만 하고 제자리로 갔다. 이번에는 정말 내가 안아주고 싶었다. ‘고마워, 뭔 말이 필요하겠니.’

쓸데없는 말을 안 걸어 줘서? 아니,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녀가 채혈을 도맡아서 했을 것 같은데, 내가오니 얼마나 고맙겠어!

파키스탄 파미르 아저씨는 인사를 하는데 꼭 영어발음이 시골 사투리 같다. 발음이 투박한데다 중간 중간에 음, 음 하면서 허밍은 왜 그렇게 많이 넣는지.

‘미안해요. 아저씨! 열심히 말하는데 못 알아들어서. 다 제 잘못이에요.’

이상한 일은 파미르 아저씨의 영어를 듣고 나서 용기가 났다. 왠지 저 정도 영어는 나도 따라 잡을 것 같은…. 일단 일 단계는 크리스티나다. 크리스티나는 별 말 없는데 별 탈 없이 일을 잘하게 생겼다. 나도 처음에는 별 수 있겠어. 하이, 땡큐 하면서 눈인사로 얼렁뚱땅 넘어가야지. 다음 단계는 파미르 아저씨, 굳이 말에 버터를 바를 필요가 있나. 허밍을 중간 중간 넣으면서 머릿속에선 단어를 짜깁기 하는 수밖에…. 그리고 삼 단계는 로라 아줌마.

‘나는 당장 삼 단계에서 수다를 떨고 싶다. 오 마이 갓!’

나는 천정을 올려다봤다. 프로펠러 선풍기가 답답한 내 속을 아는 지 윙윙거리며 돌아갔다.

첫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영문판 환자대응메뉴얼을 뒤척이면서 벨소리를 못 들은 척 했다. 로라 아줌마가 와서 내 등을 두드리며 전화를 받아야 된다, 고 말해줬다.

“오, 아이 엠 소리.”

나는 일단 전화를 받았다. 건너편에서 뭐라고 말하는데 말이 빨랐다.

“미세스, 로라. 아이 엠 소리, 내가 배가 아파요. 토일렛!”

재빨리 로라에게 전화를 넘겼다. 이러다 화장실을 몇 번 들락거려야 할지.

또 한 번 전화벨이 울렸을 땐 마침 외래환자가 들어왔다. 나는 채혈도구를 들고 재빨리 환자를 맞았다.

11시 50분, 오전 근무가 마칠 시간쯤에 압둘라 닥터 칩이 자기 방으로 불렀다. 나는 방에 들어서서도 조마조마 했다.

“미스 수진, 로라가 그러는데 몸이 안 좋은 것 같다고. 화장실도 자주 가고. 괜찮아요.”

압둘라 닥터 칩이 은근히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벌써 내 근무 태도를 눈치 챈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끝에 Are You OK? 라고 물어왔다. 대답은 생각할 것도 없이 I am fine, OK!, 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닥터 칩 방을 나오면서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계속 대답하다간 큰 코 다치겠다 싶었다.

점심시간은 오전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무려 3시간이나 주어졌다. 아침 간호부장실에서 업무를 배정받을 때, 이곳은 ‘시에스타(낮잠풍습)’ 가 있어서 점심때는 기숙사로 돌아갔다가 3시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올 거라고 했다.

병원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데, 마치 도로가 정적에 쌓인 듯 조용했다. 뜨거운 공기와 모래먼지만이 도로 위로 배회할 뿐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버스 안이 더 시끄러웠다.

각자 자기 파트 직원들, 병원 근무 환경,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하며 들떠 있었다.

“영어를 천천히 말해 달라고 하니까 정말 발음을 또박또박 말해주는데, 사우디인 닥터칩이 너무 친절해.” 하며 하트를 뿅뿅 날렸다.

뒷좌석에 나누는 대화가 나를 급 우울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난 왜 저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하며 아쉬워했다.

“오늘 이 간호부장님이 오셔서 직접 병실마다 돌면서 체크도 해 주시고, 격려도 해 주셨어에. 이번에 온 1차 선발팀들은 다 잘할 것 같다고.”

수경 간호사는 아침부터 이 간호부장 바라기가 되었다.

“어떻게 그 쪽 외래검사센터는 괜찮았어에?”

“솔직히 1차 선발팀, 선발팀 하니까 부담되네에.”

나는 수경 간호사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엘셀런트한 1차 선발팀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나 영어 못해요.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어요.”

나는 수경 간호사에게 차마 시선을 주지 못했다.

순간 울컥했다.

차장 밖을 내다봤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일하러 왔지 영어하러 온 거 아니잖아에. 영어는 지나가는 세월에다 던져줘버리소. 옛다 니나 먹어라 하고, 그럼 세월이 다 알아서 합니더.”

나는 수경 간호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런 재치있는 말도 할 줄 알고.

이스탄불 세헤라자데 호텔

나는 발코니가 있는 삼층 원룸을 얻었다. 사실 검둥이 방랑 개를 내쫓지 못했다.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먹다 남은 음식을 던져 준 것도 괜히 마음에 걸렸다. 그것보다는 옆구리가 허전했다. 여 주인장에게 저녁을 부탁했는데 흔쾌히 숙박비에서 비용을 조금 더 받고 한 상 차려주기로 했다. 마침 저녁식사 준비 중이라면서…. 꼭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기분이다.

발코니에 앉아서 나는 감자튀김에 양고기, 야채샐러드, 양고기 수프를 먹었다. 양고기는 검둥이에게 다 줘버렸지만 아깝지 않았다. 검둥이 개 때문에 3층 원룸을 택했는데 야경이 장난이 아니었다.

먼발치에 보러포러스 해협이 보였다. 바다에 떠 있는 보트들이 불을 밝혀놓았다. 블루모스크의 둥근 돔과 6개의 뾰쪽한 첨탑도 보였다. 첨탑에서 등대처럼 불빛을 발했다. 그 옆엔 블루모스크에 버금갈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운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두 건물의 돔 지붕이 꼭 키재기를 했다. 이 이슬람 국가에서 블루모스크 버금가는 하기야 소피아 가톨릭 성당이라니….

나는 일어나서 짝짝짝, 하고 박수를 보냈다. 눈호강을 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했다.

술도 안 마셨는데 풍경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 세헤레자데여.

그대의 이야기 잘 들었노라.

이제 곧 아침 해가 어둠의 장막을 걷을 테지만

나의 밤은 오직 그대의 것

나의 낮은 그저 공허하고

그대와 지샐 밤을 위해 예비하는 반쪽

그대와 지새는 밤이 돌아오면 온전한 내 삶을 이루리

그러니 이야기의 금실과 은실로 카펫을 짜자

융단을 띄워 술탄의 왕궁 위로, 더 높은 하늘을 날자

페르시안의 드넓은 영토를 날아가자

나는 정말 풍경에 취해 기분이 업(Up)되었다. 약간 비틀비틀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꾼 세헤레자데를 위해 찬가를 불렀다.

“검둥아, 언니 이제 자야하거든. 고맙다. 식사 같이 해줘서.

사실 이번 여행에 꼭 데려오고 싶은 친구가 있었는데,

같이 왔으며 이런 아름다운 풍경도 보고, 영어로 수다도 떨고….

그런데 몸이 많이 아파서 한국으로 돌아갔어.

나 그 친구한테 참 위로 많이 받았거든.”

나는 검둥개를 쓰다듬으며 콧등에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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