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야드 연가(戀歌)ep.16

젊은날, 리야드로 떠난 취업방랑기이자, "썸"타는 이야기

by 김재석

ep.16 아키코를 만나다

이스탄불 세헤라자데 호텔

나는 이스탄불에서 사흘을 보냈다. 여행객들이 흔히 가는 곳을 가보고, 먹는 것을 먹어봤다. 때로는 무료한 느낌도 들고, 혼자하는 여행이 심심하기도 했다.

저녁 식사 후에 나는 세헤라자데 호텔로 돌아왔다.

문 앞에 새끼고양이를 한 마리 안고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곰방와(こんばんは)” 하며 인사했다. 고양이 앞발을 흔들어 주었다. 첫 눈에 봐도 길냥이다. 여행에 반려묘를 데려왔을 리는 없고, 길거리에서 주운 새끼고양이를 카와이이(かわいい. 귀여워), 하며 ‘쓰담쓰담’ 했다. 그녀는 두말없이 일본인이다. 나와 키도 비슷했다. 내가 동양적인 둥근 얼굴형이라면 그녀는 서구적인 브이형 라인을 가진 예쁜 얼굴이다. 딱 봐도 남자들이 좋아할 타입이다.

나와 그녀는 방금 호텔 문 앞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아키코’이고, 약간 무료해진 나의 여행에 동행이 될 것이며, 한 시간 후면 나 혼자서는 갈 엄두도 못 낼 이스탄불 밤문화를 소개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그녀를 자질구레하게 소개할 것 없이, 곧바로 그녀가 소개한 밤업소로 가겠다.

밸리댄스가 등장하는 터키의 술집이다. 돔 천정 아래 중앙 스테이지가 있다. 바닥은 태양이 작열하는 모자이크 타일이다. 천전에 매달린 조명이 화려한 불빛을 내며 돌아갔다. 한국으로 보면 꼭 카바레 분위기다. 피부색이 같은 남녀가 침침한 불빛 아래서 서로 껴안고 블루스를 즐기는 그런 곳은 아니다. 다문화가 모여 한 지붕 아래서 흔들어 댄다. 터키인도 보이지만 유럽피언 일색이다. 나 같은 동양인도 군데군데 섞여 있다.

아키코는 맥주부터 터키 술까지 골고루 시켰다. 필스너 우르겔, YENI RAKI(예니 라키), 자몽 칵테일 등등등, 그녀는 밸리댄스가 배꼽을 흔들어대며 춤을 추자, 일어나서 따라 흔들었다. 그녀의 춤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 놀아본 여자야, 뭐 이런 타입. 나의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려 예니 라키를 브라보, 하며 마시다 토할 뻔 했다. 입 안이 화끈거렸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술에 얼른 물을 탔다.

색깔이 탄산수처럼 하얗게 변했다.

나는 아키코가 마시는 무색의 예니 라키와 내가 방금 물을 부은 하얀 예니 라키를 번갈아 봤다.

‘언제 이렇게 변했지’ 했다. 내가 언제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나 싶었다.

부산 서면로타리에 ‘백악관’이란 나이트클럽이 있다. 병원 회식 날, 1차가 끝나면 2차로 가는 코스였다. 동료들에게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해서 갔었다. 분위기는 대체로 이렇다.

년은 디스코 타임에 날뛰고 싶어 했고,

놈은 블루스 타임에 끌어안고 싶어 했다.

나는 어땠냐면, 양주에 얼음을 또 타고, 또 타서 술맛인지 맹물인지 모르게 마셨다. 동료들이 나를 끄집고 스테이지로 나가려고 하면, 술잔을 흔들며 취한 척 했다.

“아키코, 방금 술이 변했어.”

“WHAT? 안 들려, 너 취했니?”

나는 술잔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 술잔을 쨍, 하고 부딪치며 단숨에 원 샷 했다.

“호호. 난 말이야. 답답한 일본이 미치겠어. 직장에 가면 내 의견이 없어. 맹목적으로 충성하래. 지금 잘 나가는데 니 같은 여자의 의견이 뭔 필요가 있네. 이게 말이 되니? 차라리 버블이 터져서 가라앉아 버렸으면 좋겠어.”

그녀의 영어가 술 취했다. 막 나간다.

빠른 음악에 맞춰 밸리댄스의 허리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주위의 박수소리와 함성이 커졌다. 밸리 댄스가 “하디, 하디” 하며, 사람들을 불러냈다. 당연히 아키코가 먼저 튀어나갔다. 육감적인 젖가슴을 철렁철렁 대는 밸리댄스를 가운데 두고, 그녀는 유럽피언들과 어울려 엉덩이를 요란스럽게 흔들었다.

문득, 사우디 공주 루루가 떠올랐다. 히잡으로 얼굴을 숨기던….

그녀는 공주라서 이런 춤은 추지도 않겠지.

루루와 아키코는 닮은 듯…, 닮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변했으면….’

나는 취기도 있었고, 상상 속 무대 위에 있었다. 그것도 여기가 아닌 톱카프 궁전 술탄이 앉은 왕좌 앞에서…. 나는 톱카프 궁전 하렘지구에 사는 잡혀온 여자노예였고, 수많은 후궁들 속에서 눈에 띄고 싶어 했다.

늘씬한 유러피언 후궁들 속에서, 키 작고 여위어 보이는 내가 아키코처럼 흔들어 댔다.

‘내가 술탄의 눈에 띄어 왕자를 낳으면, 기필코 왕세자를 만들어서 너희 자식들은 지하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

나는 쿡쿡쿡, 거리며 웃음을 쏟아냈다. 난 정말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처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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