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날, 리야드로 떠난 취업방랑기이자, "썸"타는 이야기
리야드 국립중앙병원 외래검사센터
아침부터 로라 아줌마가 들떠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온다며 쉿! 비밀이란다. 나는 누굴까 싶었다. 서민을 위한 이 병원에 서열이 높은 왕족이 행차할 것도 아니고, 예약게시판을 살펴봤다.
‘사우디국영석유기업 아람코, 리야드 지사 직원 건강검진 예약’
오늘 피 좀 뽑겠군, 하다가 바로 위에 1988년도 날짜가 표시된 시계를 봤다. 한국 시계와 다른 건, 이슬람력 날짜 표시도 함께 있다. 이슬람력은 태음력이다. 그래서 한 달이 29일이나 30일이다. 더 특이한 점은 이슬람력은 4년에 한 번씩 있는 윤달이 없다. 매년 10일 이상씩 빨라진다.
올 해도 날짜가 보름 정도 남았다. 한국에도 연말이면 뒤늦게 건강검진을 받으려는 기업 직원들이 많은데 이쪽도 그런가 싶었다.
이곳에서는 연말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일절 없다. 그렇다고 추운 겨울 날씨를 기대했다면 어불성설. 날씨가 영하권으로 내려가는 일도 없다. 한국 대학병원에 있을 때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 위해 병원 입구와 로비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화려한 장식을 했다. 직원들은 선물 상자를 하나씩 들고 와서 트리 앞에 놓아두었다. 장식용이기도 하고, 연말 불우이웃에게 줄 선물이었다.
사회복지기관에서 와서 선물상자를 실어갈 때, 병원홍보용 사진에 나도 한 컷 찍히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사회복지기관 단체장과 병원장, 과장들이 나란히 서 있고, 나는 사진 저 끝에서 현수막을 반듯하게 펴기 위해 손으로 잡고 있었다. 아마 현수막이 잘 나와야 해서 나까지는 사진에 들어간 것 같다. 바로 내 옆에 선 직원은 잘렸다.
얼마쯤은 그런 겨울 연말 분위기가 그립기도 했다. 나와 같이 왔던 한국 직원 중에는 몇 달 됐다고 향수병에 걸린 애들도 있다.
아람코 직원들은 대부분 사우디인이었다. 그것도 젊고 매력적인 청년들. 신입처럼 보였다. 나는 이쪽도 외국 직원이 많겠지, 했는데 의외였다. 외래검사센터에 그들이 들어서자 일순간 광채를 발했다. 젊은 크리스티나와 아직 20대 끝자락에 있는 나는 홍당무가 될 뻔했다. 20대 생기발랄한 청년들의 피를 뽑으면 내 몸에서도 활기가 넘친다. 아람코 청년들은 유독 더 그랬다. 팔뚝을 잡고 피를 뽑는데, 박동치는 심장에서 돌아 나오는 핏줄기가, 검붉은 혈액이 주사기 안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 찌릿함이란…. 그들의 피에선 젊은 자신감이 느껴졌다. 팔딱팔딱 거리는 힘이 남달랐다.
리야드에 이런 청년들이 있었나 싶었다. 사우디 청년들 피를 여럿 뽑았지만, 이런 느낌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좀 느슨하고 나태해보이기까지 했다. 아람코 청년들은 술, 돼지고기를 멀리하는지 피도 맑았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거쳐 나온 내 피가 손가락 끝에서 사르륵 떨렸다. 주사기를 쥔 내 손가락 끝이….
한 청년이 버터발린 영어로 농담을 걸어왔다. 나는 알 듯 모를 듯 가벼운 눈웃음으로 맞장구쳤다. 지금 이 눈웃음은 ‘신비주의 모드’ 이다. 영어를 못 알아듣기도 했고, 여전히 어려운 점은 동사가 앞에 나와서 결론은 금방 알겠는데, 그 뒤부터 이유를 말하는 부분은 스피드하게 지나가 버린다. 머릿속에서 한국말로 바꿔 이해하려면 꼭 반만 알아듣는 기분이다. 문장이 뒤죽박죽 돼버린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지만, 영어는 끝은 알겠는데 이유자체가 헷갈렸다.
아람코 청년이 농담을 던져놓고 자기만 희희낙락했다.
‘난 네가 왜 나한테 농담을 거는 지 이유를 모르겠어.’
어휴, 이슬람 여인처럼 니캅으로 얼굴을 덮어버리고 싶다.
아람코 신입직원들이 떠나고, 압둘리 닥터 칩이 방밖으로 나왔다. 방 안에 손님이 있었다.
“미스 수진, 손님 커피 잔에 두 잔 부탁할까? 싫으면 청소부 라만에게 시켜도 돼.”
닥터 칩은 얼마 전, 내가 커피 잔을 바꾼 일대 사건(?) 이후로 가끔씩 커피 심부름을 시킨다. 그 때, 내가 타 준 커피가 맛있단다.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커피 쯤이야. 터키식 커피 or 드립식 커피?”
나는 탕비실에서 터키식 커피를 만들었다. 긴 손잡이가 달린 구리용기에 물과 원두가루를 넣고 끓였다. 거품이 일자 내려놓았다가 다시 올렸다. 3번 반복했다. 설탕도 한 스푼 넣었다. 손님 접대용 잔에 따랐다. 원두가루가 잔에 둥둥 떠 있다.
이곳에서 처음 터키식 커피를 마셔봤다. 살짝 볶은 원두를 사용해서 그런지 쓰지 않고 구수했다. 걸쭉한 맛이랄까. 아무튼 한국남자들이 마담 엉덩이 만지작거리며 마시는 다방커피처럼 달달한 커피는 아니다.
터키식 커피는 맛을 음미하며 마셔야 한다. 원두가루가 가라앉을 때까지….
커피 잔을 바꾼 일대 사건을 말하면 이렇다. 나는 직원들이 개인 컵을 사용하지 않는 게 너무 화가 났다. 같이 컵을 사용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씻지를 않았다. 그 컵에 마시고 또, 마시고…. 하루는 라만 아저씨에게 시장에서 컵을 사오라고 내 돈을 주었다. 각 컵마다 직원 이름을 썼다. 그리고 커피 잔이 놓인 벽면에 이렇게 쓰인 문구를 프린트해서 붙였다. 기숙사에서 한 참 고민해서 작문했다.
「지금까지 아무 잔에 커피를 마시고, 씻지도 않았다. 분명 악법이다. 오늘부터 각 잔에 이름을 부여한다. 수진이라고 쓰인 컵에는 독이 묻었다. 여러분은 부디 소크라테스가 되지 마시길, 악법도 법이라며 아무 잔이나 마시다가는 독배를 들지니… 부디, 자기 컵 쓰라!」
엄청 고민해서 썼는데, 문법이 틀리면 창피할 것 같아 간단히 섰다.
“수진이라 쓴 컵에는 독이 묻었다. 자기 컵 쓰도록!”
그리고, 닥터 칩이라고 쓴 컵에 손수 커피를 타서 가져다주었다.
“소개할게. 이쪽은 마호멧, 아람코에 젊은 간부 직원이지. 사우디에 젖줄 같은 기업이랄까, 이 병원에 후원금도 가장 많이 내고.”
나는 커피 잔을 탁자에 놓았다. 마호멧을 보며 씽긋 웃었다.
“Enjoy~ your coffee aroma.”(커피 향을 즐기시길…)
마호멧은 갑자기 웃음보가 터졌는지 박장대소를 했다.
‘어머, 이 남자 봐, 내가 무슨 애인의 몸 향기를 맡아 보라고, 농 짙은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자빠지고 난리지.’
“표현이 시적이네요. 웃는 모습도…. 웃는 모습이 커피향… 같네요.”
그는 커피 잔을 코에 가져가서 향을 맡았다.
‘웃는 모습이 커피향 같다니.’
이런 로맨틱한 말을 할 줄 아는 사우디 젊은 남자가 있었나. 마호멧은 슬림한 줄무늬 양복차림이다. 닥터 칩 방에 들어서면서 처음 봤을 땐, 아람코의 미국직원인 줄 알았다. 아랍 풍인데 약간 미국 이미지가 섞였다. 커피에 설탕을 한 스푼 넣었다고 해야 하나. 그는 파란 눈을 가졌다. 눈동자가 블루 사파이어 원석 같다. 좀 과장했다고 쳐도, 다듬어서 가지고픈 보석이다.
첫인상이 고리타분해 보이지 않았다. 잰틀맨인 양 굴지도 않고. 호탕하게 웃을 줄도 알았다.
“마호멧 씨도 건강검진 하실 건가요. 제가 피를 뽑아도 되는데….”
압둘라 닥터 칩이 마호멧 표정을 살피며 한마디 했다.
“마호멧은 가는 병원이 따로 있어. 아마 서민들이 이용하는 병원은 아니겠지.”
마호멧과 알둘라 닥터 칩이 서로를 보며 픽, 웃었다.
‘뭐야, 이 사람들. 병원도 가려서 가나, 이 병원이 어때서?’
마호멧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다음에 한 번 검사하러 올게요. 내 피는 이 동네에서는 꽤 비싼 편이라서.”
그는 어떤 의미심장한 농담을 하고 환한 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니 알아듣지 못하게, 비싼 피를 어느 동네에서 판다고’, 하며 나는 어설피 웃었다.
오늘 로라 아줌마가 들떠서 기다리던 사람이, 혹시…?
터키 이스탄불 시내
아키코와 나는 요지경 같았던 밤업소를 나왔다. 밤 12시가 훌쩍 넘었다. 아키코는 취해 있었고, 나는 그나마 말뚱말뚱 했다. 바로 앞에 택시가 섰다. 그런데 손님인지 누군지 아랍인 아저씨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블루모스크 게스트하우스 쪽으로 간다고 태워주겠단다. 아키코는 술기운도 있고, 기분이 좋은지 ‘땡큐, 레츠코.’ 했다.
물론 땡큐, 할 일이지만 혹시 유괴범? 현대판 여자노예 상인일지 모른다. 여행 온 외국여성을 납치해서 유흥가에 팔아넘긴다는…. 순간 나는 오줌 쌀 것 같았다. 나는 뒷좌석 문을 열려는 아키코를 말리며 극구 손사래를 쳤다.
다른 택시를 잡아탔다.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하고 나서야 막혔던 숨이 터졌다. 그런데 건너편 골목 모퉁이에 택시 한 대가 잠시 멈췄다. 나는 서둘러 아키코를 데리고 숙소 안으로 몸을 숨겼다. 택시에서 손님이 내릴 기미가 없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택시는 돌아갔다. 나는 오금이 저려서 화장실부터 찾았다.
납치 미수 사건(?)을 겪고 나자, 아키코가 나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자기 일정은 다 취소하고, 나한테 붙어다나겠단다. 내가 아니었으면 자기는 터키 뒷골목 유흥업소를 방랑하고 있었을 거라며 생명의 은인이라는 둥, 은행 계좌번호를 불러달라는 둥, 정신 나간 소리를 뱉어냈다.
나는 대한민국 역사나 돌려줘, 하려다가 ‘마 됐고, 밥이나 한 끼 사라. 어제 택시비 내가 냈다 아이가.’ 했다.
나는 고민이 되었다. 아키코와 함께 다니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일단 아키코의 장점부터 보면 외국 여행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 지중해 연안을 돌아보는 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고,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가봤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여행 1순위란다.
“오일 머니만 대단한 줄 알았더니 재팬 머니도 만만치 않네, 너 같은 직장여성(OL)도 세계여행을 다 다니고.”
나는 약간 부러워해줬다.
나는 영어로 Office Lady, 라고 했는데 아키코는 Business Girl, 이라며 고쳐주었다. 일본에서는 OL이 야동 제목에 많이 등장한다나.
나는 이번 여행에 대략의 장소는 정해두었다.
나머지 계획은 그때그때 따라서, 또는 발길 닿는 대로였다.
그의 고백에 대해 내 마음에서 어떤 변화들이 일어날지…, 맡겨둘 요량이었다.
착한 악마 : 사랑은 집착이야. 어떻게 그 고백을 잊겠니?
나쁜 천사 : 훌훌 털어버리자. 이번 기회에….
아키코와 마음만 잘 맞는다면 낯선 장소를 배회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보다시피 아키코는 좀 덜렁이고 기분파다. 내가 휩쓸릴 수도 있다. 벌써부터 그럴 기미가 보였다. 그녀는 다 아는 것처럼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어떻고 하면서 마치 자기 여행 계획을 말한다.
‘그럼 니가 돈 다 내, 이 재팬 머니야!’ 하려다, 최종 결론은, 너는 안내견이야. 동의하면 손도장 찍어. 아니면 헤어지고, 였다.
아키코는 손도장을 찍으며 “나일강 크루즈 투어는 어때?” 했다.
나는 맞잡은 손은 빼버렸다.
“손도장 안 찍어.”
“일본 크루즈 여행사에서 반값 티켓 끊었다 말이야.”
흑흑흑, 아키코는 우는 시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