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야드 연가(戀歌)ep.27

젊은날, 리야드로 떠난 취업방랑기이자, "썸"타는 이야기

by 김재석




ep.27 걸프전쟁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있었다. 걸프만을 둘러싼 전쟁이 시작되었다. 병원 분위기는 일순간에 뒤숭숭해졌다. 병원 대형 TV모니터에는 CNN뉴스가 전쟁소식을 매일 실어 날랐지만 정작 사우디 국영방송은 대수롭지 않은 듯 다루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바로 옆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니 말이다. 침공은 몇 시간 만에 끝나버렸지만 사우디 정부로부터 시작해서 미국, 유럽 국가들까지 연일 강도 높은 비난 성명을 CNN 뉴스를 통해 쏟아냈다.

미군 공수부대가 사우디로 날아와 전진기지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다. 곧 사우디와 이라크 간에 전쟁이 난다고….


마호멧의 집에 초대된 이후로 나는 몇 번 더 만났다. 그의 주말 아지트에 찾아갔다. 그는 축구광이었고, 주말이면 시내 한 상가 지하에 친구들과 즐기기 위한 장소를 갖고 있었다. 눈으로 스포츠를 즐기는 곳이었다. TV와 연결된 파나소닉 프로젝트가 축구경기를 대형스크린에 쏘았다. 그는 리야드에 연고를 둔 알힐랄 축구팀을 열렬히 응원했다.

그는 전쟁을 미리 예감하고 있었다. 곧 국방부로 파견 나갈 거라며 귀띔해 주었다. 걸프만 석유자원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그가 진지남이라 다소 무거운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대수롭게 않게 들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이란과 오랜 전쟁을 하면서 쿠웨이트로부터 막대한 전쟁자금을 빌렸는데, 빚을 못 갚겠다며 전액 탕감해 달라고 했단다. 더 뻔뻔한 이야기는 거기다 돈을 더 빌려달라면서 말이다. 당연히 쿠웨이트는 거절을 했는데 분위기가 심심치 않단다. 이라크는 백만 대군을 가진 군사 강국이다.

“바보도 아니고 돈 떼일 걸 알면서 왜 빌려줬어요?”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생명보험같은 거죠. 돈으로 평화를 구걸한 거죠.”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나는 그 말이 양아치들에게 자릿세를 냈다는 말로 바꿔들렸다. 오히려 이라크 군대를 먹여 살려 화를 자초한 느낌이었다.

“그런 막무가내인 사람을 다른 나라에서는 그냥 나둬요? 사담 후세인도 코란을 들고 다니고, 하루에 다섯 번 절하고 그래요?”

그는 나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의 파란 눈은 바라볼수록 매력적이지만 또한 슬픔이 배어있어 차가운 눈망울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수니파를 대신해서 지금까지 이란의 시아파와 싸웠단다. 사우디를 포함해서 이슬람 대부분의 국가가 수니파라서 은근히 지지한 면도 있단다. 그가 수니파, 시아파 하면서 이슬람 계파갈등까지 꺼냈다. 어떻게 보면 그와 중동의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나 자신이 놀라웠다. 이런 걸 ‘플라토닉 러브’라고 말해야 할지 헷갈려 하면서 말이다.

“중동은 지금 화약고에요. 그것도 시한폭탄이 설치된…. 뇌관을 쥐고 있는 사람은 사담 후세인이죠. 언제 터질지는 그의 손에 달렸어요.”

그는 국방부로 파견되면 당분간 만날 수 없다고 했다. 그 곳은 사생활 보호가 안 된다며 아마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거라고 했다. 자연스레 그가 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내가 왜 미스 수진을 좋아하는 지 이유를 말했나요?”

나는 당황스러웠다. 정작 그의 고백은 들었으면서 그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다, 꼭 영어를 배우던 때의 느낌이 들었다.

‘너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겠어.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니?’ 하는 꼴이라니….

“당신에게는 사우디인의 삶에 대한 배경이 없어요. 아마 같이 살아왔다면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겠죠. 나를 슬프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당신의 눈망울은 선하고, 삶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농담도 잘하고…, 무엇보다 청소를 잘한다고 들었어요. 하하하.”

나도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또 머릿속 녀석들이 장난했다.


착한악마 : 지금 진지 모드로 가야되는 시츄에이션 아닌가요.

나쁜천사 : 뭐야, 청소는 서번트, 하인들이 하는 거야, 하며 놀리는 거니?


“나도 미스 수진을 닮아가나 봐요. 그게 좋아요. 삶을 좀 단순하게 바라보게 해요.”


이 남자 플라토닉 러브가 맞다. 나의 섹시한 면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푼수기 있고 단순한 동양녀로 보였단 말인가.

그가 몸을 숙이며 다가왔다. 그의 입술을 나의 입술에 대였다. 입술이 살짝 엇나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얼음공주가 되었고, 그의 입술이 또 어떤 곳을 더듬어 올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섹시미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CNN뉴스에는 걸프만에 미국의 항공모함이 포진하고, 다국적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속속 들어오는 모습,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에게 쿠웨이트 철수기한을 통보하는 백악관 성명발표를 찍어 보여주었다. 리야드 시내에도 미군의 탱크가 지나다녔다. 병원에 근무하는 사우디 의사 중에는 소곤소곤 불만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중동문제를 미국 제국주의자에게 맡겼다고….


1990년 12월 말에는 정말 전쟁 위험이 고조되었다. 이라크에서 다국적군 주둔지를 제공한 사우디아라비아에 생화학테러를 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병원 내 직원들 간에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병원에 근무하는 외국인 닥터들은 계약을 해지하고 짐을 꾸렸다. 외래검진센터도 그런 분위기가 전염되었다.

로라 아줌마는 이집트 가족들에게 돌아갈 생각뿐이고, 파미르 아저씨는 같이 데리고 있는 아들 걱정만 했다. 아들만이라도 먼저 파키스탄으로 돌려보내야 하나, 하면서 외래검사센터 안을 빙빙 돌았다. 크리스티나는 생화학테러가 나면 피를 토하고 죽을 지도 몰라, 하면서 그런 끔찍한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은 지 머리를 감쌌다.

그런데 압둘라 닥터 칩은 더 가관이었다. 부인이 쿠웨이트 인이었다. 처가댁 재산이 걱정이라며 발을 동동 굴렸다. 뭐야 보통 장인장모를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부인과 함께 쿠웨이트에 재산을 지키려 들어갈 궁리만 했다.


결국 다국적군이 통보한 이라크군 철수 시한이 다가오자, 로라 아줌마와 파미르 아저씨는 사우디를 떠났다. 병원 직원들 빈자리가 빠르게 늘어났다. 그 빈자리만큼 남아있는 직원들이 채워야 했다. 한국인 직원들도 동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 간호부장은 똑 부러지게 말했다. 계약 해지는 절대 안 된다고, 이럴 때 일수록 자리를 지켜야 한국인들이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며 개인행동을 삼가라고 했다.


루루가 외래검사센터로 나를 보러 왔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찾아갈 참이었다. 국방부에 파견 나간 뒤 소식이 없는 마호멧이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했다.

“지금 걸프만에 떠있는 미군항공모함에 있는 것 같아요. 아마 쿠웨이트 유전시설 복구계획을 짜는 것 같아요. 아빠가 국방부 관계자와 전화 통화하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보안이 철저해서 가족들하고도 통화가 안돼요.”

“사실 궁금했어요. 걱정되기도 했고.”

“오히려 이쪽이 더 난리 난 것 같은데…. 다들 살 길 바빠서 떠나잖아요. 사우디 닥터들도 슬글슬금 빠져나갔어요. 그런 친구들은 다시는 병원에 못 돌아오게 해야 해요.”

그녀는 외래검사센터의 빈자리를 둘러보며 한 숨을 쉬었다. 히잡을 둘러쓴 루루의 얼굴이 더 완벽한 브이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조금 여위어 보였다. 그녀도 지금 꽃다운 나이이다. 아무리 애국심 있는 말을 해도, 위선자들이 벌이는, 또 그들을 따르는 군인들 전쟁 놀음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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