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둥이 뿌루퉁 내밀고 낯설게, 아니 낯붉히며 한마디 걸어오면…. 오후 3시, 서편으로 약간 고개를 젖힌 해가 빗살무늬처럼 뿌리는 광선을 등짝에 쪼이며, 나는 서늘한 그늘을 구멍에 드리웠다. 그는 어둠에 젖어 살기에….
그가 쉽사리 민낯을 드러낼 리 없다. 내가 밭고랑을 만들며 물길을 내듯 그는 두둑을 따라 낮은 포복으로 굴을 파며 기었다. 내 손등을 타고 바람이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바람을 들이키며 더 깊이 숨죽이는 걸까. 비수처럼 날선 호미를 보며 몸 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가 지렁이를 좋아해 땅을 판다는 건 익히 아는 일이다. 물론 매끈한 몸매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둘 다 구멍을 파다보니, 우연을 가장해 만났을 것이고, 좋게 헤어졌을 리 없다.
개미가 두둑 3부 능선을 따라 줄지어 간다. 앞 선 개미가 하루살이 벌레를 이고 가는데 어쩌면 하루를 못산 턱이다. 개미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구멍이 턱을 벌려 바람의 이빨로 아작아작 씹어 삼켰다. 제물을 뒤따르는 개미 무리는 제향에 취해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시린 무릎, 뼈와 뼈 사이로 난 쉰 해의 바람길. 한 때는 잠재울 수 없는 회오리바람이 불어댔다. 나는 세상과 불화했었다. 그 세기가 잦아든 건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세상을 탓하며 내가 늙었다. 귀농해서 살다보니 즐거운 일은 내가 만들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다.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시중(時中)’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배워서 더해가는 것과 깨달음으로 덜어가는 것의 역동적 균형. 지금 내 삶을 반추해 주는 이 말을 거실 창 위에 편액해서 걸어놓았다.
내 삶에 들락거렸을 두더지와 개미들, 나선으로 감겨 잦아지는 바람이 잠재우고 낮아지며 가라앉는다. 그 길의 끝은 막힘이 아니라 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