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인 Jun 29. 2015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추억

이제야 털어놓는 소심한 범죄 ...노태우 선거포스터 훼손

오늘은 노태우의 6.29선언일이다. 어언 28년이 되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민중이 쟁취한 날이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참여했던 시위가 1987년 6월항쟁이었다.


그 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나는 아주 소심한 범죄를 하나 저지른 기억이 있다. 기억은 잊히지만, 기록은 역사로 남는다. 그래서 더 잊히기 전에 소싯적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빨갱이 김대중'이 대통령 될까 두려웠던 시절


1971년,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희한하게도 나는 그때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박정희와 김대중이 유력한 후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 담벽에 붙은 선거 포스터를 보던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그러는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빨갱이 나라가 된다카데?"

"그라모 큰 일이네? 우린 은자(인제) 죽었다."


그 후 선거일까지 계속 악몽을 꾸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 '괴뢰군'을 이끌고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다. 꿈속에서 나는 마루 밑에 기어 들어가 숨었다.


마침내 선거일이 됐다. 정말 불안했다. 투표를 하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붙들고 물었다.


"아부지. 김대중이가 대통령이 되면 우짭니까? 그 사람 공산당이라 카던데."

"걱정마라. 투표장에서 보니까 대중이 찍는 사람은 전부 찾아내서 다시 찍으라고 하더라. 그 사람은 안될끼다."

1971년 당시 김대중 후보 선거벽보.

과연 그는 떨어졌다. 나는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후 중학생일 때였던가? 겨울밤 가족끼리 안방에 모여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얘기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다. 아마 그에 대한 나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때 가족 중 누군가가 갑자기 음성을 낮추며 이렇게 말했다.


"쉿! 조용히 해. 누가 들을라." 그러자 옆에서 모시를 삼고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도 있지."


그때도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벌써 누군가가 들은 것은 아니었을까? 또 악몽에 시달렸다. 경찰이 우릴 잡으러 오는 꿈이었고, 그때마다 마루 밑에 숨어 공포를 달랬다.


1979년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부산 서대신동에 있었는데, 남포동과 광복동에서 대학생 형님 누나들이 엄청나게 모여 데모를 벌인다고 했다. 특히 여대생 누나들이 치마폭에 돌멩이를 담아 나르는데, 거기 가면 대학생 누나들의 '빤스'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래서 친구 몇몇이 어울려 남포동에 구경을 나가기도 했다. '빤스'는 보지 못했지만, 보수동 파출소가 불탄 광경을 봤다. 뭔지는 모르지만 통쾌한 느낌을 받았다.


그 무렵,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경운기 사고로 발에 부상을 입고 진주 한일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 문병을 위해 시외버스를 타고 가던 중 진주 입구 개양검문소에서 군인들이 총을 메고 버스에 올랐다. 내 뒷자리쯤에 앉아 있던 한 대학생 형님이 군인에게 멱살을 잡힌 채 개처럼 끌려 내려가는 모습을 봤다. 당시 한일병원에서 진주경찰서로 이르는 길에 플라타너스 낙엽이 수북했던 기억이 그림처럼 남아 있다.


곧이어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학교에는 조기가 게양됐다. 북한에서 밀고 내려 올지 모른다는 불안 섞인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 한 놈은 어디서 들었는지 "전두환이가 '형님 원수는 제가 갚겠습니다'라고 했다더라"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아니나다를까 그 전두환이가 12.12 쿠데타로 집권했다.


전두환 시절 군대에서 보안대에 끌려가다


이후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한 해 재수를 한 뒤 대학에 진학했고, 2학년을 마치고 1985년 군에 입대했다. 사단본부 통신대에서 비문운용병이었던 나는 음어 한 장을 분실한 혐의로 보안사(현 기무사)에 끌려갔다. 야밤에 갑자기 들이닥친 보안사 요원에게 연행됐는데, 눈이 가려진 채 지프차에 실려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3군 사령부 1003보안대라는 곳이었다.


거기서 꼬박 30일 동안 '취조'를 받았다. 말이 취조였지 실제론 고문과 구타였다. 음어가 분실된 그날 나의 행적을 5분 단위로 적어서 제출하기를 반복했다. 독재정권 치하의 군대가 얼마나 폭력적이며 단순 무식한 지를 육체적으로 정말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성과가 있다면, 내가 유체이탈을 하여 나를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얻어맞으면 나는 내  몸속에서 떨어져 나와 '저놈(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얼마나 견디는지'를 관찰했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 나가게 된다면 쉽게 겪어보지 못할 이 무시무시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한 편 써야 겠다고 다짐했다.(그러나 결국 쓰지는 못했다. 그게 유시민과 나의 차이인가 보다. 유시민은 군대 시절 경험을 88년도인가? 창작과 비평에 단편소설로 발표했다.)


그 땐 전두환 시대였고, 1987년 6월항쟁의 와중에 제대를 했다. 예비군복(속칭 개구리복)을 입은 채 서울로 나왔다. 마침 동대문야구장에서 벌어지고 있던 고교야구 모교 경기를 고교시절 친구들과 함께 봤다. 그 자리에서 가수 '수와 진'을 만났다. 친구가 그들을 우리 동문이라고 소개했다. 난 동기인 줄 알고 수와 진에게 말을 놓았다. 그랬더니 친구가 당황하며 '선배'라고 알려줬다. 야구 경기 중 바깥에서 최루탄 가스냄새가 야구장 안으로 들어와 괴로웠던 기억이 있다.


서울에서 친구들과 하룻밤을 잔 뒤 경남 진주로 갔다. 시내에 도착하니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6월 15일이었다. 당시 진주 시내에는 지하상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시위대 중 군 입대 전 알던 친구들을 발견했고, 예비군복을 입은 채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1987년 진주시청 앞 농성. 나도 이곳 어디가에 있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이다.

내가 망설임 없이 시위대에 합류했던 것은 군에서 읽은 책(진중문고였나?)의 영향이 컸다. 철학과 역사, 문학 책을 주로 읽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영향을 받은 책은 국방부가 군인들 정훈교육을 위해 만든 교본이었다. 전두환 시대의 군대는 정훈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신좌경 세력'과 '종속이론' '유로코뮤니즘', '해방신학' 따위에 대한 비판교육을 수시로 시켰는데, 담당 장교와 하사관이 나에게 교안 제작을 대리토록 했고, 심지어 부대원에 대한 교육도 나에게 시켰다. 그런 과정이 오히려 나에게 그런 사상을 공부할 기회를 줬다. 그 사상과 이론이 오히려 나를 의식화시켰던 것이다.


이제서야 털어놓는 '노태우 선거벽보 훼손' 범죄

노태우의 6.29선언을 보도한 경향신문 1면.

어쨌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6월항쟁이 마무리되고, 7·8·9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고향에서 아버지의 농사를 거들며 이듬해의 복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던 들녘이었다. 아버지와 나도 연신 이마와 목에서 흐르는 땀을 훔치며 논에서 벼베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읍내에서 이어진 3차선 도로에 전경대원들을 가득 태운 트럭과 버스 3~4대가 몰려왔다. 도로변에 차가 열을 지어 멈추더니 운동복 차림의 전경대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적어도 100여 명은 넘어 보이는 그 전경대원들은 간부의 일사불란한 지시에 따라 추수가 한창이던 들녘에 흩어져 농부들의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이나 1시간 쯤이 지났을까? 언제 준비했는지 출력이 상당히 높은 스피커를 통해 온 들녘에 다 들릴만큼 큰 소리로 농부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 농민 여러분, 바쁜 농사철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XXX 국회의원께서 직접 들판에 나오셨습니다. 새참도 부족하지 않게 준비했고, 각종 경품도 넉넉하게 있으니 잠시 일을 멈추시고 여기 ○○○ 씨네 논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웃기는 짓이었다. 대통령 선거철에 전투경찰을 들판에 풀어 일손 돕기를 하는 것도 그랬지만, 그걸 이용해 민정당 국회의원이 생색을 내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가 하면 경품까지 나눠주는 행위는 막 군대를 제대한 내 눈으로 봐도 선거법 위반 소지가 농후했다.


그러나 당시의 내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궁리 끝에 순진하게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없게도 당시 노태우 대통령 후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 아래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 이런 짓은 오히려 당신을 욕먹이는 일이니 못하게 해달라.'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왜 그런 바보짓을 했는지 참 황당한 기억이다.


그 후 며칠 뒤 우리 동네의 민정당 유사(마을조직책)를 맡고 있던 집안 형뻘 되는 분 집에서 그냥 아무 명목도 없는 마을 잔치가 열렸다. 돼지를 잡고 각종 안주와 술, 밥을 동네 사람 모두에게 대접했다.


그 비용이 어디에서 나왔을지는 뻔했지만 동네에서 누구도 그걸 문제삼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이장이 마을회관의 스피커로 참석을 독려하기도 했다. 나도 거기 가서 막걸리를 얻어먹던 도중 마을 이장에게서 핀잔을 받았다.


"너. 김대중 선거운동한다카데?"


당황했던 나는 "왜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느냐"며 이장에게 따졌다. 결국 이장이 얼렁뚱땅 그 말을 취소하는 것쯤으로 작은 소동은 마무리됐다.(사실 나는 그 이전에 평민당 면조직책이라는 분을 만나 지지 입장을 말해준 적은 있었다.)


어쨌든 이장에게 강하게 항의함으로써 어느 정도 알리바이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 나는 작은 '범죄' 하나를 저질렀다.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선거 포스터는 아주 귀엽고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데, 그 아이가 노태우의 귀에 대고 뭔가 속삭이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실었다. 누가 그런 포스터 콘셉트를 잡았는지 정말 탁월했다. 하지만 나는 그 탁월한 선거 포스터가 정말 거슬렸다.

바로 이 사진은 맞는데, 공식 선거벽보는 아닌 것 같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사용허락을 받았다. 선거벽보 사진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한밤 중에 기어이 거사를 감행했다. 동네의 한 담벽에 붙어있던 그 포스터에 사인펜을 갖고 가 여자아이의 머리 위에 만화처럼 말풍선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일부러 필체 감정을 우려해 왼손으로 평소 내 필체와는 전혀 다르게 썼다. 그 말풍선에 써넣었던 글은 다음과 같았다.

"아저씨는 광주에서 왜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어요?"


다음날 동네 분위기가 흉흉했다. 경찰에 신고가 됐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정말 그 때 나는 엄청난 불안에 떨었던 것 같다. 하루에도 수십 번 후회를 했다. 여러 번 경찰이 내 손에 수갑을 채우는 악몽을 꾸었던 것도 같다.


일부러 나는 무관심한 척 했다. 그래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그 사건은 흐지부지됐고, 며칠 뒤 노태우가 당선됐다.


물론 나는 김대중을 찍었는데,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신문기자가 되어 선관위가 발행한 당시의 대통령 선거 투표구별 개표 결과 표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 때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내가 투표했던 투표구에서 김대중 표는 10여 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10여 명이라면 내 손가락으로 꼽아봐도 대충 누구 누구인지를 짐작할만한 숫자였던 것이다. 그 때 우리 집만 해도 최소 10명 중 2표였다. 나와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이다.(나중에 물어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도 김대중을 찍었다고 했다.) 여동생은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선거일 평민당 투개표 참관인으로 고향에 왔었다.


물론 김영삼 표는 그 숫자보다 훨씬 더 나왔고, 노태우 표는 또 김영삼보다 많이 나왔다.


"내 목에 노태우가 한그슥 차 있어요"


1988년 3월 대학에 복학했는데, 4월 2일 백기완 선생 초청 강연회에 갔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전투경찰에 황망히 쫓겨 달아났다. 여러 동료학생이 연행되고 상당수는 부상을 당했다. 이 일로 학교에선 연일 규탄집회가 열렸다. 최루탄 가스를 가장 많이 마셨던 때가 그 시절이다.


한 번은 교문 진출 투쟁 과정에서 최루가스를 정통으로 뒤집어쓰고 눈도 뜨지 못한 채 학교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와 겨우 화단에 앉았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한참을 괴로워하다 겨우 반쯤 눈을 떴는데, 한 교수가 옆에서 처량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교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쯧쯧. 군대까지 갔다 왔다는 놈이..."


그러던 중 단과대 체육대회가 열렸다. 중어중문학과와 우리 과가 축구시합을 했는데, 나는 수비수로 투입됐다. 경기 중 상대팀 선수 중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놈이 단독 드리블로 우리 문전에 돌진해오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려가서 공만 보고 있는 힘을 다해 발을 날렸다. 순간 '딱'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쓰러졌다.

일어서려고 하는데 오른쪽 다리가 이상했다. 무릎이 아닌 정강이 중간 부분이 기역자로 꺾이는 것이다. 아! 순간 다리가 부러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달려왔다. 오른쪽 다리를 엉거주춤 부여안은 채 다리가 부러졌음을 알렸다.


부목을 댈 생각도 못한 채 친구들 여럿이 나를 들어 옮겨 앰뷸런스인지 택시인지에 태웠다.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러나 내가 상상하고 있던 응급실과는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부랴부랴 나에게 달려들어 응급조치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냥 눕혀놓은 채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었다. 내 친구도 그런 상황이 답답해서였을까? 마침에 다가온 젊은 의사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러자 의사도 심각한 투로 말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입원을 했고, 접합 수술을 받았다. 다리 안쪽에 쇠꼬챙이 두 개를 심어 넣는 수술이었다. 처음으로 전신마취를 당했다. 어렴풋이 마취에서 깨어나는데 목 안에 뭔가 귀찮은 이물질들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신이 드냐?"

"예 아부지. 그런데 내 목에 '노태우'가 한그슥 차있어요."

"뭐가 있다고?"

"노태우가요."

"이 자슥이 뭐라카노?"

"노태우가 목구멍 안에 드글드글 차 있다고요."

이런 세균 말이다. 이것보다 훨씬 작은 놈들이 목 안에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마취 중 목에 꽃아 두었던 호스 때문에 가래가 차 있었거나 뭔가 이물질의 느낌이었던 모양인데, 나는 그걸 만화에 나오는 세균 이미지로 연상했고, 그 세균의 이름을 우리가 타도해야 할 노태우로 착각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친구 한 놈에 의해 한동안 재미있는 얘깃거리로 회자됐다. 어쨌든 그 때문에 나는 한 학기 휴학을 했고, 여름에 졸업할 수밖에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