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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ul 30. 2015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의 한(恨)과 아버지가 남긴 유훈(遺訓)

2010년 3월 2일 아침 6시 30분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쉰 후 돌아가셨다. 향년 81세. 그때 나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저희 아버지 김두평(金斗坪)은 호적에 1930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론 1929년 음력 12월 3일생으로 82세를 일기로 2010년 3월 2일(음력 정월 열이레) 아침 6시 30분 즈음 마산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경남 남해군 서면 대정리 남정마을 888번지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서당 훈장을 하셨던 할아버지 슬하에서 소학교를 졸업하신 후 홀로 독학을 계속하여 한학과 유학에 능하셨으나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가정을 책임지셔야 했습니다.


스무 살에 어머니 하순엽(河順葉)과 혼인한 아버지는 2남 6녀를 낳아 다섯 마지기 남짓의 벼농사와 마늘, 보리, 고구마 농사로 8남매를 어렵게 길렀으며, 마을 이장을 10여 차례 연임하면서 마을 발전에도 애썼습니다.


또한 이장단협의회 회장, 남해군 김해 김씨 종친회 이사, 대서초등학교 육성회장, 노인회 서면협의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팔순의 연세에도 컴퓨터와 인터넷을 배워 자식들과 인터넷 카페를 통해 소통해왔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던 병원 입원실.

오늘 아버지의 제적등본을 떼어봤더니 전 호주 김현표(나의 할아버지)의 사망으로 호주 상속을 한 날이 1939년 11월 13일이다. 겨우 열 살 정도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것이다. 그때부터 계모 아래에서 성장해 1954년 12월 24일 어머니 하순엽과 결혼한다. 어머니는 1932년 3월 29일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333번지에서 하성렬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2005년 9월 1일 만 73세의 나이로 마산 정다운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위암 수술을 받았으나 완치되지 못한 채 병원에서 고생을 많이 하시다 끝내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폐암 진단을 받았으나 수술이나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도 어머니보다 5년을 더 사셨다. 그래서 나는 암 수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내 몫으로 가져오라"던 돈의 액수는?


어쨌든 어머니는 시집 온 후 아버지의 계모 아래에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셨고, 그 과정에서 남편이 한 번도 당신 편을 들어주지 않아 한이 많이 맺혔다고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털어놨다. 또한 말이 8남매지 생각해보면 2년 터울로 무려 16년간 임신과 출산, 육아, 또 임신을 거듭했던 셈이다. 그런데다 집안 살림이나 농사일까지  함께해야 했으니 그 힘들었던 삶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그밖에도 여러 가지 남편에게 받은 설움을 돌아가시기 전 큰아들에게 한풀이하듯 털어놓았다.


게다가 농촌 마을 사람들이 대개 그랬듯 집안의 돈 관리는 모두 아버지가 쥐고 있었다. 어머니는 읍내 시장에 푸성귀나 마늘쫑 등을 내다 팔아 만든 푼돈까지 아버지에게 갖다 바쳐야 했다. 그래서 평생 당신 돈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마산의 병원에 모시고 회사와 병원, 집을 오가며 간병을 하던 어느 날 어머니는 뭔가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물고 이렇게 말했다.


"너거 아부지에게 내 몫으로 돈 가져오라 캐라."

"얼마 가져오라 할까요?"

"200만 원!"


순간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2000만 원도 아니고 200만 원이라니. 하여튼 아버지에게 전화로 그 말을 전했고, 다음날 아버지는 농협에서 200만 원을 찾아 병원에 오셨다.


어머니는 그 돈을 나에게 맡겨놓고 가끔 손자들이 오면 용돈을 주기도 했다.


지금도 아쉬운 건 어머니 살아계실 때 해외여행을 한 번도 함께 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자식 덕에 호강한 이야기를 이웃에 자랑하길 즐겼다. 딱 한 번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남아 있는 사진 속 손자(태윤)가  5~6살쯤 되어 보이는 걸 보니 내 결혼 후 6~7년쯤 되었을 시절이다. 어머니는 그 사진을 확대해 부엌에 걸어놓고 매일 들여다보는 게 낙이었다. 제주도도 그랬는데 일본이나 중국 같은 외국 여행이었다면 얼마나 행복해하셨을까.


아쉽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어머니는 병을 앓고 계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를 모시고 여러 번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래 봤자 중국 북경, 중국 상해, 소주, 항주, 일본 규슈 등 가까운 곳이었지만... 그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녔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는 식당마다 대개  마뜩잖아했다.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이런 걸 먹으러 오느냐'는 거였다. 처음엔 아들이 돈 쓰는 게 안쓰러워서 그러나 보다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연로하신데다 치아도 좋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다리 성하고 치아 좋을 때 많이 다니고 많이 먹으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글씨가 좋았고 한자에도 능했다. 그래서 내 어릴 적엔 동네사람들이 마치 우리집을 대서소처럼 이용했던 기억이 있다. 새마을지도자와 이장을 오래하셨고, 마을동민 일동과 박정희 시절 내무부장관 명의로 감사장을 받은 것도 있다. 그렇게 바깥일을 많이 하다보니 집안 농사에는 다른 집 남자들에 비해 좀 소홀히 했던 것 같다. 어머니가 그때문에 더 고생을 많이 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가 내심 자랑스러웠고, 아버지께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다. 어찌 보면 아버지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주눅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계모와 아내 사이에서 아내 편을 들고 싶어도 들지 못했을 수 있다. 아버지는 한때 농협조합장 선거에 나가려 했으나 젊은 후배가 사정하는 바람에 양보했던 적도 있고, 종친이 국회의원 선거에 나왔을 때 돕다가 경찰의 감시를 당한 적도 있다. 그때 경찰이 하는 짓이 워낙 미워 야당 지지자로 돌아섰던 것 같다. 이후 대통령 선거 땐 김대중과 노무현을 찍었다.


어쨌든 어머니를 병원에서 모시고 있을 때 보니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부산 동아대병원에 있을 때도 매일 마산과 부산을 오갔다. 그 시외버스 요금과 택시비도 만만찮았다. 어떤 날은 오전에 다녀와 회사 출근했다가 퇴근 후 저녁에 다시 가는 일도 있었다. 마산의 병원에 모셨을 때는 아예 하루에 두 번 가는 게 일상이었다. 병원비는 형제들이 십시일반 보탠다 하지만 왔다 갔다 하며 쓰는 돈도 내 형편엔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만 남았을 때 오케이실버보험이라는 걸 넣기로 했다. 불입하던 중 돌아가시면 1000만 원의 보험료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 보험을 믿고 '아버지 모시는 데 쓰는 돈은 아깝게 생각하지 말자'는 취지였다.

아버지는 폐암을 앓고 있었지만 당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 내가 말씀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제들과 합의했다. 다행히 입원해야 할 정도로 심하게 아프진 않으셨다. 침이 마른다든지, 전립선염으로 불편해하시긴 했지만 한 달에 한두 번 부산 대학병원에 모시고 가 외래진료를 받는 정도였다.


아버지가 남긴 유훈


그렇게 몇 년을 보낸 후 결국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내가 간병하기 용이한 마산의료원으로 모셨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 때처럼 매일 병원에 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때 하필 내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일이 생겼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간병에 더 몰두할 수 있었다. 1월에 아버지를 입원시켰고, 2월 19일 사직했다. 그러나 아버지 간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3월 2일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아들이 사직한 일로 인해 마지막 순간까지 걱정을 끼쳐드렸다는 점이다. 끝까지 불효를 한 셈이다.


장례를 치른 후 사직한 신문사에 이런 광고를 실었다.


삼가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지난 3월 2일 저희 아버지(김해 金씨 斗자 坪자)의 상례에 바쁘신 중에도 경향각지에서 찾아와 문상과 조의를 표해주시고 저희의 슬픔을 위로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여러분의 배려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를 올려야 마땅한 도리이지만, 우선 제가 재직했던 신문 지면을 통해 이렇게 마음만 전해 올립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라옵고, 앞으로 각 가정의 대소사 때 꼭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희 형제자매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항상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3월 9일 경남 남해군 서면 대정리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형제들이 모두 일터로 떠난 후 혼자 고향집에 남아 유품을 챙기던 중 아래와 같은 글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공책 내지를 뜯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쓰신 '家訓(가훈)'이었다.


가훈

(1) 글을 읽어 이치를 탐구하여 시비를 분별할 줄 알라.

(2) 남을 해치지 말고 구원하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활로를 개척하라.

(3) 허욕과 사치를 버리고 근검을 생활신조로 삼아라.

(4)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거울(鏡) 같이 항상 올바른 마음을 가져라.

아버지가 남기신 유훈.

참, 오케이실버보험은 5년이 지난 지금에야 보험금을 청구하게 됐다. 알고 보니 내가 넣었지만, 수익자 지정을 해두지 않아 8남매의 인감증명서와 도장을 첨부해야 했다. 번거롭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차일피일 미루다 5년이 흘렀다. 알고 보니 지금이라도 청구할 수 있다는 말을 어느 보험설계사에게 들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말했더니 왜 그걸 안 찾고 뒀느냐고 한다. 우편으로 인감증명서와 '보험금 받는 분 대표 지정서'를 받아 보험회사에 보냈다.


보험금을 받으면 일곱 형제들에게 각 100만 원씩 나누려고 했더니 다들 안 받겠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성장과정에서 가장 많은 신세를 졌던 큰누나께 절반은 드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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