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갑(甲)이 될 수 없는 처지의 특이한 술버릇
군을 제대하고 고향에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며 대학 복학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12월인지 이듬해 1월이었는지는 기억이 아련하다. 87년 대선이 끝난 뒤였던 건 확실하다. 6월항쟁으로 어렵게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기쁨도 잠시, 김영삼 김대중을 제치고 가뿐히 노태우가 당선되는 과정을 본 마음은 참담했다. 집에 있기 싫었다.
부모님께 대학이 있는 도시로 가서 자취를 하며 3월 복학을 준비하겠노라고 말했다. 미리 공부도 좀 하면서 굳은 머리도 풀고, 아르바이트로 용돈도 좀 벌어놓겠다는 핑계였다.
군대에서 슬쩍 들고 나온 따블(Duffle)백이라는 게 있었다. 자취생이 간단한 가재도구를 쓸어담아 이동하기에 딱 좋은 거였다. 그 따블백에 작은 석유곤로와 냄비, 그릇, 그리고 옷가지와 책 몇 권을 넣어 양쪽 어깨에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시외버스를 타고 도시에 도착했다. 우선 허름한 달셋방을 구해야 했다. 월세가 저렴할듯한 동네를 하루종일 돌아다녔지만 내가 원하는 방을 구하지 못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대충 값싼 저녁을 먹고 독서실을 찾아 하룻밤을 지낼 요량이었다.
그때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술이 취해 몸을 못 가누는 분이었는데, 쓰러진 상태였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다. 내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추운 겨울밤 얼어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사는 동네가 어딘지를 물어 택시를 잡았다. 함께 탔는데 이 할아버지가 내릴 지점을 못찾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택시를 타고 헤맬 수는 없어 교대 근처에서 내렸다. 거기서 또 한참 할아버지와 헤멘 끝에 겨우 집을 찾았다.
예상대로 허름한 주택 1층이었는데, 방은 단 두 칸, 방 사이에 좁은 부엌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 칸, 내 나이 또래(혹은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아들 내외가 다른 한 칸에 살고 있었다. 아들은 술취한 아버지를 데려다 줘서 고맙다며 술상을 차렸다. 술상이라 해봐야 김치와 소주가 전부였다. 잘하면 독서실 비용을 아끼고 여기서 하룻밤 잘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도 그렇고 아들도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인줄 알았던 여자는 아직 결혼식을 하지 않은 동거녀였다. 할아버지는 옆방에서 잠들었고, 할머니와 여자는 그 남자가 술 마시는 걸 계속 말렸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르자 그는 나에게 하대를 하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데려다준 저의가 뭐냐는 식이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싶었다. 내가 억울하다는 투로 한마디 했나 보다. 그 남자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부엌에 나가 뭔가를 한참 찾았다. 그러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와 다락에 올라갔다. 이윽고 다락에서 가지고 내려온 것은 식칼이었다. 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럴 줄 알고 숨겨놨더니... 또 이러네."
할머니와 여자가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노골적으로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무조건 납작 엎드렸다.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오해를 푸시라고. 원하는대로 하겠다고. 지금 가라면 당장 가겠다고.
그랬더니 그는 지금부터 자기를 형님으로 부르라고 했다. 시키는대로 "네. 형님"이라고 했다. 그제서야 좀 마음이 풀리는 듯 했다. 그가 칼을 바닥에 놓고 소주를 들이켰다. 할머니가 슬그머니 칼을 주워 밖으로 나갔다.
그의 마음이 풀리는 기회를 노려 이제 가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만류하며 자기가 잘 아는 술집이 있다며 밖에 나가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사양했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따블 백을 메고 나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따블 백을 그 집에 놓고 밖에 나왔다.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택시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 좁은 골목(이었는지 건물 안 통로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안에 있는 어둠컴컴한 맥주집에 갔다. 술집에 들어가기 전 그는 자신의 말에 "네. 형님"이라고 대답하라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술집은 여성 접대부가 있는 집이었다. 맥주를 시켰고, 여종업원이 옆에 앉았다. 그의 말투가 이상해졌다. 영화에 나오는 깡패 두목(또는 중간보스)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내 역할은 '똘만이'였다.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네. 형님" "그렇습니다. 형님" "알겠습니다. 형님"을 반복해야 했다.
그랬다. 그것이 그의 술버릇이었던 거다. 젊은 나이에 막노동으로 살아야 하는 설움. 누구에게도 갑(甲)이 되지 못하는 처지. 그런 상황에서 술이라도 취하면 자기보다 약해보이는 상대를 이런 방식으로 제압한 후 '역할 놀이'에 빠지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짠 했다. 열심히 그의 비위를 맞춰줬다.
새벽에 다시 그의 집으로 갔다. 술집에서 바로 헤어지고 싶었지만 따블백이 그 집에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집 대문은 닫혀 있었다. 담이 제법 높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 담을 뛰어넘지 못할 내가 아니지."
그러나 대문은 닫혀 있었을뿐 잠겨 있진 않았다. 내가 밀었더니 스스르 열렸다. 그가 멋적은 듯 말했다.
"에이. 가뿐히 뛰어넘으려 했는데..."
그렇게 하여 새벽에 그와 헤어졌고, 나는 아마 심야 만화방에서 새벽잠을 잤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다음날 도시 외곽에 공짜로 써도 좋다는 자췻방을 구했다. 아니 자췻방이 아니라 빈집 한 채를 통째로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