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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ul 12. 2015

기자 그거 왜놈 순사 같은 것 아니냐

아들이 신문기자를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했던 말

1990년 3월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갓 창간한 지역주간신문에서였다. 당시 나는 1학기를 마치고 하계 졸업이 예정되어 있었고,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 창간된 그 신문사에서 우리 학과 교수님께 기자 추천을 의뢰했고, 교수는 나를 추천했다. 주간신문이니 일이 그다지 빠듯하진 않을테고, 아르바이트 삼아 학비를 벌면서 대학원을 다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교수님의 추천 이유였다. 나도 순진하게 그러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선뜻 추천에 응했다.


그러나 막상 신문사 일을 해보니 주간지라고 해서 결코 일이 수월하거나 여유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1년이 지나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 1년 동안 내가 기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거나 기자 노릇에 재미를 느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다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애초엔 은사 중 한 분의 모교인 서울 Y대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해볼 생각이었다. 거기서 문학비평을 전공하고 싶었다. 그러나 1년새 생각이 바뀌었다. 지방국립대 국어교육학과 석사과정에 가기로 했다. 주간지 기자생활은 병행하기로 했다. 학위를 따면 사립중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고픈 공부를 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숙집에서 나와 독서실에 들어갔다. 퇴근 후 새벽 2시까지 대학원 진학 대비 공부를 했다. 아마 두어 달쯤 그렇게 지냈고, 시험을 쳤다. 합격통지를 받았는데 놀랍게도 수석합격이라는 거였다. 전액 장학금이 주어진다고 했다. 웬 떡이냐 싶었다.


그러나 그 대학원은 제대로 다녀보지도 못하고 초반에 그만두게 됐다. 1991년 10월 10일 발생한 진주전문대 사태, 소위 '지리산 결사대 사건'에 대한 전국 모든 언론의 왜곡 날조 보도에 충격을 받았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제대로 기자 노릇을 해보기로 결심했다.(지리산 결사대 사건에 대해선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역일간지 수습기자 공채시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1992년 3월초였다. 예정대로라면 그때부터 대학원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포기하고 자퇴서를 냈다. 조교로부터 "차라리 장학금이라도 받지 않았으면 다른 학생에게 그 혜택이 돌아갔을 텐데"라는 핀잔을 받았다. 미안했다.


부모님께 일간지에 출근할 거라는 소식을 알렸더니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지금이라도 기자 그거 그만두고 학교 선생 하면 안 될까?"
"아니, 어머니, 기자가 어때서요?"
"기자 그거 왜놈 순사 같은 것 아니냐?"
"에이~, 아녜요. 왜놈 순사가 아니라 오히려 독립운동가 같은 거예요."
"글쎄다. 그럴까…?"

그랬다. 1932년생인 어머니가 아는 기자는 토박이말로 '모찬이'(우리 고향에선 버릇 없고 못된 짓만 하고 다니는 껄렁패 같은 인간을 그렇게 부른다) 같은 것들이 하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어릴 때 봤던 일본 순사의 모습과 지역유지로 행세하며 온갖 원성을 사고 있던 지역일간지 주재기자들의 모습을 어느새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그 당시 주재기자들 중에는 '모찬이' 같은 인간들이 꽤 있었다.

악질 친일 경찰의 대명사 노덕술. 어머니는 일제 순사와 기자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그 말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줬다. 나도 사람들에게 그런 기자로 보이지 않을까? 어머니에게 기자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벗겨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의 뇌리에서 왜놈 순사의 모습을 지워드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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