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만약 내가 돈봉투를 받았더라면...
기자가 된 후 처음으로 재벌기업 삼성의 불법행위를 고발한 기사였다.
당시 신문은 석간이었는데, 아침에 기사를 출고하면 편집을 거쳐 낮 12시쯤 윤전기가 돌아가는 구조였다.
그날 아침부터 삼성시계와 삼성항공의 임원들이 편집국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신문사 사장 왕아무개 씨를 붙들고 기사를 빼달라며 사실상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다행히 기사는 사회면 머리와 박스로 나갔다. 신문이 나올 때까지 편집국에 죽치던 삼성 임원들은 왕 사장과 인근 롯데크리스탈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다. 거기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장은 나에게 "후속기사는 쓰지 말 것"을 지시했다. 당시엔 노조도 없었고 기자회도 유명무실이어서 사장의 지시를 거부할 도리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삼성측은 나에게도 두툼한 돈봉투를 건네려 했지만, 당연히 거절했다. 만일 그때 내가 봉투를 받았더라면 내 기자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당시 내게 봉투를 건네려던 삼성 임원 중 한 명이 1년 8개월 후, 우리 신문사를 인수합병하기 위한 책임자로 온 것이다.
그 사이 우리는 노동조합을 결성, 왕 사장 퇴진을 외치며 1년 가까이 투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결국 왕 사장은 한 건설회사에 신문사를 매각하게 되었는데, 그 건설사 회장이 삼성 출신인 주아무개 씨를 영입해 신문사 상무이사로 보냈던 것이다.
아찔했다.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원수까진 아니었지만, 내가 그때 돈봉투를 받았더라면, 우리회사 상무로 온 그 앞에서 나는 '돈 받아먹은 기자'라는 약점으로 인해 죽은 듯이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걸로 내 기자 인생은 끝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