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 심리학과 어른 김장하의 나눔 철학
<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지음, 인플루엔셜, 2014)를 다시 읽었다. 어른 김장하 선생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책과 다큐가 나온 이후에도 선생의 삶이 아들러 심리학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꼼꼼히 이 책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책 속에서 뽑은 인상 깊은 구절들이다. 해당 내용에 대한 내 생각은 괄호 안에 푸른 색으로 썼다.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63)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63)
내가 아는 젊은 친구 중에 소설가를 꿈꾸면서도 도무지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이가 있네. 그의 말에 따르면, 일하느라 바빠서 소설 쓸 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니 원고를 완성하지 못해서 문학상에 응모할 여력도 없다는 거야. 과연 그럴까? 사실은 응모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거라네. 남의 평가를 받고 싶지도 않고, 더욱이 졸작을 써서 냈다가 낙선하게 되는 현실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거지. 시간만 있으면 할 수 있다, 환경만 허락된다면 쓸 수 있다, 나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가능성 속에서 살고 싶은 걸세. 아마 그는 앞으로 5년, 10년이 지나면 "이제는 젊지 않으니까" 혹은 "가정이 이어서"라는 다른 핑계를 대기 시작하겠지.(66)
문학상에 응모했다가 떨어지면 좀 어떤가? 그걸 계기로 더 성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되지. 어쨌거나 시도를 해야 앞을 나아갈 수가 있다네. 지금의 생활양식을 바꾼다는 것은 그런 거야. 시도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어.(66)
고독을 느끼는 것은 자네가 혼자라서가 아닐세. 자네를 둘러싼 타인 사회 공동체가 있고, 이러한 것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고독한 거지. 우리는 고독을 느끼는 데도 타인을 필요로 한다네. 즉 인간은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개인'이 되는 걸세.(81)
열등 콤플렉스는 또 다른 특수한 심리 상태로 발전하기도 한다네. '우월 콤플렉스'라고 하지. 심한 열등감에 괴로워하면서도 노력과 성장 같은 건전한 수단을 이용해서 보완할 용기가 없어. 그렇다고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는 열등 콤플렉스도 더는 견뎌낼 수 없지. '못난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거든. 그러면 인간은 더 값싼 수단으로 보상하려고 한다네.(98~99)
마치 자신이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며 '거짓 우월성'에 빠지는 걸세. 예를 들어 자신이 권력자와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짐짓 어필하는 걸세. 경력을 속이거나, 옷이나 장신구 등 브랜드 제품을 과시하는 것도 일종의 권위 부여이자 일부분 우월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지. 어떤 경우든 '나'라는 존재가 우월하다거나 특별해서 그런 것은 아닐세. '나'와 권위를 연결시킴으로써 마치 '나'라는 사람이 우월한 것처럼 꾸미는 거지. 즉 거짓 우월성일세.(99)
정말로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아.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걸세.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일부러 과시하려고 하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누구 한 사람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거든. 이는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라네.(101)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게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105)
청년 : 면전에서 인신공격을 받는경우는어떻게해야하나요? 그저 참기만 합니까?
철학자 : 아니. 참는다는 발상은 자네가 아직 권력투쟁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일세.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그리고 그것이 권력투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서둘러 싸움에서 물러나게.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게. 우리가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네.(121)
애초에 주장의 타당성은 승패와 관계가 없어. 자네가 옳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되어야 하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권력투쟁에 돌입해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그러니까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라네.(123)
아니, 딱 한 명 있었지. (...) 몇십 년이나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 다시 만나도 그 시절과 똑같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과연 그럴까? 친구와 지인의 수는 결코 중요하지 않네. 이는 사랑의 과제와도 연결되는 내용인데, 중요한 것은 관계의 거리와 깊이라네.(131)
(나도 그런 친구가 한두 명쯤 있다.)
아들러는 상대를 구속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상대가 행복하다면 그 모습을 순순히 축복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일제.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는 결국 깨지게 되어 있어.(133)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애는 가능해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감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내게 불신감을 품은 상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수 없겠지? 아들러는 말했네.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136) (그런 관계라면 헤어지는 게 낫다?)
연인 사이나 부부관계에 있어서 어느 시기가 지나면 상대가 하는 생동에 사사건건 화가 날 때가 있어. 밥을 먹는 모습이 얄밉게 느껴진다거나, 방 안에서 축 늘어진 모습을 보고 혐오감을 느낀다거나, 숨소리만 들어도 화가 난다거나, 수개월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말이야.(136)
그건 그 사람이 어느 단계에서 '이 관계를 끝내고 싶다'고 결심하고, 관계를 끝내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세. 상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네. 자신의 '목적'이 변했을 뿐이지. 알겠나? 사람은 그럴 마음만 있으면 상대의 결점이나 단점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이기적인 생물이네. 상대가 성인군자와 같은 사람일지라도 싫어해야 할 이유 같은 건 간단히 찾아낼 수 있지. 그렇기에 세계는 언제든 위험한 곳이 될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적'으로 볼 수 있는 거라네.(137)
우리 인간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청거릴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닐세.(140)
철학자 : 가령 자네가 직장에서 쓰레기를 치웠다고 하세. 하지만 동료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해. 혹은 알고 있지만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고 인사 한 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어. 그러면 자네는 그 후에도 계속 쓰레기를 치우겠나?
청년 : 모두를 위해 땀을 흘렸는데, 인사 한 마디 못 듣는다? 그러면 의욕이 나지 않겠죠.
철학자 : 인정욕구의 위험함이 거기에 있네. 대체 왜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걸까? 대개의 경우 그것은 상벌교육의 영향이라네.
청년 : 상벌교육이요?
철학자 : 적절한 행동을 하면 칭찬을 받는다. 부적절한 행동을 하면 벌을 받는다. 아들러는 이런 상벌에 의한 교육을 맹렬히 비판했네. 상벌교육의 결과로 생기는 것은 "칭찬하는 사람이 없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벌 주는 사람이 벗으면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 등과 같은 잘못된 생활양식일세. 칭찬 받고 싶은 목적이 있어서 쓰레기를 치운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칭찬 받지 못하면 분개하거나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딱 봐도 이상한 얘기지. (김장하 선생의 '줬으면 그만이지' 철학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유대교 교리를 보면 이런 말이 있네.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자네는 자네만의 인생을 살고 있어. 누구를 위해 사느냐고 하면 당연히 자네를 위해 살아야겠지. 만약 자네가 자네를 위해 살지 못한다면 대체 누가 자네의 인생을 살아준다는 말인가?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생각하며 사는 거라네.(154)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을 기울이면, 끝내는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된다네.
자네가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 역시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라는 걸세. 상대가 내가 원하는대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돼.(155)
모든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대부분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혹은 자신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에 의해 발생한다네. 과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간관계가 급격히 달라질 걸세.(161) (김장하 선생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 체질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신념에 의한 금주다. 하지만 술꾼을 멀리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주가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늘 먼저 '한 잔 하지?'라며 술을 권한다. 자신이 설립 운영하던 학교 선생님 중 술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선생은 그에게 보약을 지어 보냈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163)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을 택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사는 인생, 다른 사람의 소망을 이룰 수 있게 거들면서 사는 인생. 자네 말대로 이정표가 될지도 몰라. 하지만 너무 부자유스러운 삶 아닌가? 그러면 왜 그런 부자유스러운 삶을 택하는 것일까? 자네는 자꾸 인정욕구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걸세.(181)
청년 : 그러면 자기중심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말씀입니까?
철학자 : 과제를 분리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야.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중심적인 발상이지.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진로와 배우자감까지 간섭한다. 이게 자기중심적인 게 아니면 뭔가?
청년 : 그러면 자식이 되어가지고 부모의 의향이 뭐든 개의치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살면 된다는 말씀입니까?
철학자 : 자기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김장하 선생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철학에 따라 자신의 장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들한테도 '이런 학교를 만들어야 합니다'라든지 '이런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교육은 교육자의 몫이고, 자신은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할 뿐이라며,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완벽히 분리했다.)
철학자 : 세상 부모들은 흔히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 하지만 부모들은 명백히 자신의 목적--세상의 이목이나 체면일지도 모르고, 지배욕일지도 모르지--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네. 즉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아이가 반발하는 걸세.
청년 : 그러면 아이가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아이의 과제니까 방치하라는 겁니까?
철학자 :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네. 아들러 심리학은 방임주의를 권하는 게 아닐세. 방임이란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라네. 그게 아니라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것. 공부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이 본인의 과제라는 것을 알리고, 만약 본인이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사를 전하는 걸세. 단 아이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하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163) (이 또한 선생의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바라는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는 보시'와 일맥상통한다.)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일세.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187)
철학자 :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자유롭게 살 수 없지.
청년 : ........선생님은 저더러 "남에게 미움을 받아라" 하시는 겁니까?
철학자 :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하는 뜻일세.(187) (선생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원하지 않았다. '칭찬하지도 나무라지도 말고 그대로 봐주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네의 과제가 아니야. 역으로 "나를 좋아해야 한다", "이렇게 애를 썼는데 좋아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상대의 과제에 개입하는 보상적 발상이라네. (188)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189)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은 얼핏 타인을 보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밖에 보지 않아.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지. 즉 자기중심적이라네.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걸세.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집착이나 다름없지.(210)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기에 속해있네. 공동체 안에서 내 자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느끼는 것. 즉 소속감을 갖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네. 이를테면 학업, 일, 친구, 그리고 연애와 결혼도 어떻게 보면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여겨지는 장소와 관계를 찾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그렇지 않나?(212)
(이 대목에선 구영회,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나남출판, 2023)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 삶에서 인생길에서 가장 완벽한 '제자리'는 어디일까? 괴롭거나 힘겹거나 시달리지 않고 일체의 풍파가 고요히 가라앉아 지극히 평온한 제자리 말이다. (...) 삶이 요동치지 않고 근심 걱정이 사라진 가장 평화로운 자리에 놓이고 싶어 하는 것은, 악당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소망하는 바일 것이다. 삶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고 '최적화'된 그 지점. (9~10))
자기 자신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본인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지. 이런 사람들에게 타인이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사람'에 불과해.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행동하는 존재이며 내 기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네. (...) 따라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해줄까?" 그것만을 생각하지. 그런데--아마 이 부분이 왕자님이나 공주님과 다른 점이겠지--그 기대가 번번이 깨질 거야. '타인은 나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래서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그들은 크게 실망하고 심한 굴욕감을 느끼게 되지. 그리고 분개하네. "저 사람은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저 사람은 내 기대를 배신했어", "저 사람은 이제 친구가 아니 적이야" 하고 말이야.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머지않아 '친구'를 잃게 되네.(213)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갖기를 원해.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소속감이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네. (...) '이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commit)하는 길일세. (...)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세.(215~216)
(칭찬은 평가이고, '고맙다'는 말은 평가가 아니라 감사의 인사라고 구분한 후,)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되지. (...) 아들러의 견해는 다음과 같지.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 '나는 가치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과제에 직면할 용기를 얻게 될 걸세. 인간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네. 이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대답이지. ('좋다' '잘했다' 따위의 칭찬보다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공동체, 즉 나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236)
(신뢰의 반대말은) 회의(懷疑)라네. 반대로 자네가 인간관계에 '회의'를 품고 있다고 하지. 남을 의심하고, 친구를 의심하고, 가족과 연인을 의심하며 살고 있다고 말이야. 거기에서 어떤 관계가 싹틀 수 있을까? 자네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면 상대방은 바로 알아채지. "이 사람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구나"라고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네. 거기에서 어떤 발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겠나. 우리는 조건 없는 신뢰를 가져야 하네. 그래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아들러 심리학은 간단하네. 자네, 지금 '누군가를 무조건 신뢰해봤자 배신당할 뿐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배신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네가 아니야. 그것은 타인의 과제지. 자네는 그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되네. "상대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도 주겠다"라는 건 담보나 조건이 달린 신용관계에 불과해. (...)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네.(265~268)
자기수용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배신이 타인의 과제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을 걸세.(269)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생위인 셈이지.(272)
평생 다 쓰지도 못할 재산을 모은 부자들도 대부분 지금 바쁘게 일하고 있다네. 왜 일하는 걸까? 한없이 탐욕스러워서? 아니야. 타자공헌을 위해, 나아가서는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확인받고 싶어서라네. 엄청난 부를 쌓고 자선활동에 매진하는 부자들조차도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고,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거지.(273)
철학자 " 타인에게 공헌할 때 우리는, 설사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곧 '공헌감'을 가지면 그걸로 족한 걸세.
청년 : 잠깐만요! 그러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행복이란.....
철학자 : 이미 자네도 눈치 채지 않았나? 바로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이게 행복의 정의라네.(288)
인정욕구와 공헌감의 차이.
철학자 : 공헌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라면 결국 남이 의도한 대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어. 인정욕구를 통해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지. 우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네.
만약 진정으로 공헌감을 갖는다면 뭐 하러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겠나. 일부러 인정받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할 수 있는데 말이야. 즉 인정욕구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직도 공동체 감각을 갖지 못하고,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을 하지 못한 거라네.
청년 : 공동체 감각만 있으면 인정욕구가 사라진다는 말씀입니까?
철학자 : 사라지네. 타인의 인정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290~291)
아들러 심리학이 중요하게 내세우는 것이 '평범해질 용기'일세.
왜 '특별'해지려고 하는 걸까? 그건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특별히 잘하는' 상태가 실패로 돌아가면 극단적으로 '특별히 못되게 구는' 상태로 빠르게 넘어가는 걸세. 그런데 보통인 것, 평범한 것은 정말로 좋지 않은 걸까? 어딘가 열등하다는 뜻인가? 실은 누구나 평범하지 않나?
자기수용은 그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일세. 만약 자네가 '평범해질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거야.(296~297) (김장하 선생은 '선생님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라는 장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은, 아마도 자네가 '평범해지는 것'을 '무능해지는 것'과 같다고 착각해서겠지. 평범한 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네. 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는 것뿐이야.(297)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선(線)'으로 파악하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선이 크고 작은 굴곡을 그리면서 정점에 다다르다 그대로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맞이한다고. (하지만 인생은) 선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점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분필로 그어진 실선을 확대경으로 보면, 선이라고 여겨진 것이 실은 연속된 작은 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 선처럼 보이는 삶은 점의 연속, 다시 말해 인생이란 찰나(순간)의 연속이라네. '지금'이라는 찰나의 연속이지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선'의 인생을 강요하지. 좋은 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등 이런 선로를 따라가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서, 그래도 인생은 선이 아니라네.(301)
자네가 극장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그때 극장 전체에 불이 켜져 있으면 객석 구석구석까지 잘 보일 거야. 하지만 자네게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바로 앞줄조차 보이지 않게 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네.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이겠지. 아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하지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하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308)
*잠들기 전 후회나 근심, 번뇌가 없으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일을 한 게 있다면, 오늘 당신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자네의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네. 먼 장래에 이룰 목표를 설정하고 지금은 그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 이런 건 인생을 뒤로 미루는 삶의 방식이네. 인생을 뒤로 미루는 한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단색으로 칠해진(monochrome) 따분한 나날만 보내게 될 것세. '지금, 여기'는 준비 기간이고 참는 시기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그런데 먼 장래에 있을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는 '지금, 여기'도 이미 내 삶의 일부라네.(311)
목표 같은 건 없어도 괜찮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춤일세. 심각해질 필요 없어.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한 것을 착각하지 말게. (...) 인생은 언제나 단순하지. 심각한 게 아니라네. 각각의 찰나를 진지하게 살면 심각해질 필요가 없지.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두게. 에네르게이아적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언제나 완결되어 있다는 것을.
설사 자네나 내가 '지금, 여기'에서 생을 마친다고 해도 불행하다고 할 것까진 없네. 스무 살에 마친 삶도 아흔 살에 마친 삶도 모두 완결된 삶이며 행복한 삶이니까.(312)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은 것이라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서 뭔가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거지. 자네는 지금까지 '지금, 여기'를 외면하고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에만 빛을 비춰왔어. 자신의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찰나에 엄청난 거짓말을 했던 거야.(313)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했네.(314)
예를 들어 전화(戰渦)에 휘말려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을 앞에 두고 '인생의 의미' 같은 걸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뜻에서 인생에 일반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그래서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란 없다"라고 답하고는, 이어서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네.(315~316)
(인생의 '길잡이 별'은) '타자공헌'에 있네. '타자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고 뭘 해도 살관없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며 자유롭게 살면 되네.
그리고 찰나인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춤추고, 진지하게 사는 걸세. 과거도 보지 말고, 미래도 보지 말고, 완결된 찰나를 춤추듯 사는 거야.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엇고 목적지도 필요 없네. 춤추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 테니까.(318)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는 뜻이지.(319)
* '나'와 '환경', 그리고 '너' 중에서 가장 바꾸기 어려운 것은 '너'. 가장 바꾸기 쉬운 것은 '나'.
세계는 단순하다. 인생 또한 그러하다.(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