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겸은 어떻게 살아왔나

다시 대구로 간 경계인 김부겸의 인생 이야기

by 김주완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또다시 대구시장 선거에 도전한다. 나는 한때 그가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했던 인물이어서 좀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대체로 ‘저쪽‘에서 넘어온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데 2024년 김부겸과 대담프로그램에서 내가 진행자로 함께해야 할 일이 생겼다. 김해 진영 봉하마을 깨어있는시민문화체험전시관 특별전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개막식에 앞서 열린 특별대담이었다.


'김부겸, 김대중과 노무현을 말하다' 특별대담 포스터.

따라서 제대로 대담을 진행하기 위해선 김부겸의 살아온 내력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사서 읽으며 인터넷 검색에서 나온 자료와 대조하며 김부겸을 탐구했다.


그런 과정에서 김부겸이 한때 한나라당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어느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 그가 처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2024년 5월 4일 봉하마을 김부겸과 대담.


그때 조사했던 김부겸의 살아온 내력을 여기에 공유한다.


김부겸에 대해 공부하던 노트의 일부




우선 출생부터 1988년 정치권에 발을 들이기까지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56년 경북 상주 상주읍 오대리 출생

1958년 1월 21일 출생신고

1968년 대구초등학교 졸업(2년 일찍 입학)

1971년 대구중학교 졸업(1년 재수, 중학)

1975년 경북고등학교 졸업(1년 재수, 성균관대 법학과)

1976년 서울대 사회계열 입학, 농업경제학회 가입

1977년 서울대 도서관 점거 유신반대 시위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제적(1978년 징역 1년)

1979년 안양교도소 출소

1980년 5.17계엄령 위반(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수배, 구속

1982년 대구서 이유미와 결혼(한국은행 대구지점 퇴직)

1984년 상경, '오늘의 책' 서점 운영, 출판사 '이론과 실천' 운영

1985년 이철 총선 출마, 합법공간 영향력 만끽

1986년 신림동 서울대 앞 '백두서점' 운영, 민통련 간사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집행위원

1987년 대통령 선거 김대중 여의도광장 유세 때 민통련 대표자 자격으로 지원연설, 선거 결과 노태우 당선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 예춘호 조순형 유인태 원혜영 장광근 등과 함께 한겨레민주당 창당, 동작갑 출마 낙선(당시 정태윤 김두관 등은 민중의당 창당, 총선 참여)




11년만에 대학을 졸업했던 까닭


1977년 11월 11일 김부겸은 서울대 도서관 점거 유신반대 시위(긴급조치 9호 위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그는 구속된 전임회장을 대신해 서울대 농업경제학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정치학과 2학년이었던 그는 차기 학생회장 후보로 내정되어 있어 사찰기관에서 주목하고 있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계엄군이 진주했다. 5월 18일 전남대 시위가 광주시민 봉기로 번지자 계엄군은 실탄을 발사했다. 191명이 죽고 852명이 다쳤다. 광주를 진압한 신군부는 학생운동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 검거에 돌입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에 연루된 김부겸은 신문과 방송으로 공개수배되었다.


도피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김부겸은 공군장교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대구지역 보안부대에 연행되어 조사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계엄사령부에 자진 출두했다. 다시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8월 말 공소기각으로 석방된다.


감옥을 나온 김부겸은 앞길이 막막했다. 재수해서 들어간 대학에선 제적되었고 학생운동 전과로 취업도 여의치 않았다.


김부겸은 바람도 쏘일 겸 대학선배 제정구가 있는 경기도 시흥시 복음자리마을로 향했다. 복음자리마을은 빈민운동가 제정구(1944-1999)가 세운 철거민 마을공동체였다.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고, 1987년 양김 분열 이후 정치권에 입문하여 14대, 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대중운동을 격한 몸짓으로만 알았던 김부겸은 복음자리마을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제정구의 대중운동은 거창한 이념이나 신랄한 구호가 구호가 아니었다. 다만 대중과 더불어 사는 것이었다.


제정구는 낮에는 벽돌을 한 장씩 집어올리고 밤에는 주민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철거민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흙먼지 날리는 아득한 황토를 바라보며 김부겸은 고향 대구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학생운동의 시기도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대구로 간 김부겸은 독서실을 차려 생계를 꾸리는 한편 운동권 출신인사들과 소모임을 만들어 근현대사를 공부했다. 그러는 동안 친구의 여동생과 결혼도 하고 아이도 얻었다.


대구에 내린 뿌리가 조금씩 깊어갔다. 그러나 1983년 9월 대구의 미국문화원 정문 앞에서 폭발물이 터지면서 그는 다시 격류에 휩쓸린다. 미문화원 폭파사건과 관계없는 김부겸은 거물급 운동권 인사라는 이유만으로 세 차례나 연행되어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돌도 지나지 않는 아이가 고열로 보름 넘게 입원해 있었지만 풀어주지 않았다.


1984년 1월 김부겸은 용달차에 찬장과 이불 보따리를 싣고 도망치듯 서울로 갔다. 당장 머물 곳이 없어 종로구 부암동 고교 동창의 집으로 갔다. 친구 아버지는 어이가 없어 한동안 쓴웃음만 지었다.


부암동 문간방에서 세 식구의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 김부겸은 작은 전자회사에 다니며 경보기를 팔았다. 회사가 망하자 은행 대출을 받아 서점을 열었다. 외상 손님이 많아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김부겸은 아내에게 서점을 맡기고 재야 활동에 투신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거쳐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간사로 일했다. 활동비로 주당 2만 원과 토큰 몇 개를 받고 투쟁현장을 다니며 유인물을 뿌렸다. 생계는 아내의 몫이었다.


1986년 민통련 식구들과 수련회. 왼쪽 두번째가 김부겸,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이해찬 전 총리.


1985년 대학에 복학한 김부겸은 1987년 2월에 졸업했다. 입학 11년 만이었다.




여기서 잠깐 김부겸과 연관 인물들의 출생연도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김대중 1924년 1월 6일

김영삼 1928년 12월 8일

이부영 1942년 9월 26일

제정구 1944년 3월 1일

노무현 1946년 9월 1일

유인태 1948년 9월 5일

이해찬 1952년 7월 10일

김부겸 1956년 12월 21일

김두관 1959년 4월 10일

이재명 1964년 12월 22일




재야인사에서 정치인으로


1987년 대선에서 국민은 이기고 정치는 졌다. 노태우는 역대 최저인 36.6% 득표율로 제13대 대통령이 됐다. 김대중 김영삼의 합산 득표율은 55%였다. 선거과정에서 김부겸은 민통련 대표 자격으로 김대중 후보의 여의도광장 유세장에서 지원연설도 했으나 결국 후보단일화 실패로 패한 것이었다.


예춘호, 조순형, 제정구, 유인태, 원혜영, 김부겸 등 재야인사들은 적전분열로 정권을 헌납한 제도야권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대신 독자적인 진보정당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3김 정치와 지역주의에 맞서기로 했다. 이 시기 정태윤 김두관 등도 민중의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경북(민주정의당), 경남(통일민주당), 호남(평화민주당), 충청(신민주공화당)을 대표하는 4당 구도를 깨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듬해인 1988년 총선에서 한겨레민주당은 단 1석을 얻었다. 김부겸은 서울 동작갑에 기호 5번을 달고 나와 5등을 했다. 득표율은 3%. 당선을 기대하고 나갔던 건 아니지만 현실 정치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1988년 한겨레민주당으로 첫 출마했을 때의 선거포스터


한편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이 펼쳐졌다. 1990년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은 물밑 협상 끝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이른바 3당합당이다.


그 즈음 김부겸은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에 참여해 부대변인을 맡았는데, 1991년 3당 합당을 거부하고 통일민주당에서 탈당한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이철, 홍사덕, 박찬종, 장기욱, 장석화, 허탁 등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창당하자 여기에 참여한다.


그해 9월 꼬마 민주당은 김대중이 이끌던 신민주연합당(구 평화민주당)과 합당해 통합된 민주당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여기서 김부겸은 노무현, 홍사덕 대변인과 함께 부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92년 김대중 후보와 함께


1992년 총선에서 김부겸은 서울 동작갑에 공천을 신청했다. 그러나 신민계의 동교동 측근이 같은 지역에 공천을 신청하면서 일이 꼬였다. 결국 공천을 받지 못해 출마는 좌절됐다.


1992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김부겸은 이선실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된다. 국가보안법 위반죄(불고지)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1995년 광복절 특사로 피선거권 회복)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난다. 김부겸은 구속에서 풀려난 후 민주당 당무기획실 부실장으로 복귀해 실장인 제정구를 보좌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조순이 당선되지만 민주당 내에서는 동교동계와 이기택의 불화가 생겼다.


1995년 김대중은 정계에 복귀한다. 그러나 민주당으로 돌아오지 않고 신당(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추진했다. 민주당 내 동교동계 의원들은 대거(53명) 탈당해 김대중을 따르기로 했다. 민주당은 39명의 국회의원만 남은 소수정당으로 전락하고 통합 4년만에 분열될 위기에 처한다.


제정구의 선택을 따르다


김부겸을 포함한 민주당 내 재야 출신들은 장고에 들어갔다. 김부겸도 김대중을 따라갈 생각이었으나 제정구의 영향으로 잔류하게 된다. 당시 제정구의 일갈은 이랬다.


"인생은 선택이야. 어렵게 내린 선택이라고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옳은 선택이라고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나이 마흔까지는 명분을 지켜야 하는 거라. 그 이후엔 현실을 따른다고 해도 탓할 생각은 없어. 재야 출신이란 것들이 현실적 이익에 몸이 달라서야 되겠어?"


적당한 분위기만 조성되면 못이기는 척 김대중을 따라나설 생각이었던 김부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주류에 편입될 기회이기도 했고, 김대중에게 보다 큰 정치를 배우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제정구의 40대 명분론에 무너지고 말았다. 서른 일곱 김부겸은 대의명분을 택했다. 명분이 아니라 실리를 택했다면 애당초 꼬마 민주당에 입당할 일도 없었다. 아직도 김부겸은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제정구의 일성을 되새긴다고 한다.


제정구와 김부겸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1996년 총선이 그랬다. 야권은 분열된 상태로 총선을 치렀다.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이 139석, 김대중신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79석, 자유민주연합이 50석, 민주당이 15석을 얻었다.


선거 참패로 민주당은 내홍을 겪었다. 김부겸을 포함한 민주당내 개혁세력은 당 쇄신을 요구했지만, 당내 주류인 이기택 계파에 밀려 힘을 쓰지 못했다.


그렇게 당권에서 밀려난 인사들은 1996년 11월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한다. 통추에는 김원기, 노무현, 제정구, 이강철, 김정길, 김원웅, 원혜영, 박석무, 이철, 이미경, 홍사덕, 김홍신, 홍기훈, 이수인 등이 속해있었다. 김부겸은 통추에서도 막내였다.


노무현과 함께 고깃집을 차리다


통추에는 낙선한 정치인이 많았다. 그래서 민의를 수렴하며 정치자금도 조달하고자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열었다. 여름 화로가 겨울 부채처럼 당장은 쓸모 없어도 때가 되면 꼭 필요해진다는 의미였다.


통추 회원들은 하루씩 돌아가며 식당에 나와 고기도 썰고 술잔도 기울였다. 노무현과 김부겸도 그 중 하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통추는 진로를 모색했다. 크게 세 가지 갈림길이 있었다. 첫째는 여당 후보(이회창)와 연대, 둘째는 야권 통합론에 따른 제3후보(김대중) 지지, 셋째는 독자후보를 내세우는 방안이었다. 여야 후보들은 정치적 상징성이 큰 통추를 영입하기 위해 애썼지만 통추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대선 정국은 빠르게 돌아갔다.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이회창이 선출되었다. 8월 20일 조순 서울시장은 민주당에 입당해 대선후보로 추대되었다. 10월 27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이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 11월 4일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인제는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선후보로 나섰다.


한나라당으로 가게 된 까닭


그리고 바로 다음날 민주당 조순과 신한국당 이회창이 합당을 발표했다. 대선후보는 이회창, 당대표는 조순이 맡기로 하고 한나라당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회창이냐, 김대중이냐, 이인제냐, 통추는 여전히 좌고우면하고 있었다.


모든 길에 하나씩은 흠결이 있었다. 이회창은 지역주의에 편승해 신한국당에 입당했고, 김대중은 신당 창당으로 민주당을 분열시켰고, 이인제는 3당 합당에 영합해 이력을 쌓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결국 통추는 끝까지 합치된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각자의 정치적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김원기, 노무현, 김정길, 유인태, 원혜영 등은 민주당을 떠나 새정치국민회의로 갔다. 제정구, 박계동, 김원웅, 이부영, 이철 등은 민주당에 남아 자동적으로 한나라당에 합류하게 되었다. 통추의 막내 김부겸은 이번에도 제정구를 따랐다. 제정구를 떠날 수 없었던 김부겸은 민주당에 남아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 창당에 함께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0년 총선에서 김부겸은 네번째 도전 끝에 한나라당 당적으로 제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부겸은 고 제정구 의원의 보좌직원 세 명과 함께 국회로 입성했다. 국회에 등원해 처음 벌인 일은 세비 반납운동이었다. 5월 30일에 임기가 시작되었는데 이틀이 지나자 달이 바뀌어 한달치 세비가 입금되었다. 김부겸은 남경필, 원희룡, 김영춘 등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세비 반납운동을 전개했다. 그렇게 모인 5000여만 원을 고성 산불피해 지역에 써달라고 강원도에 기탁했다.


초선 의원 시절 김부겸은 직접 차를 몰았다. 국회의원이 되면 차량유지비와 운전기사 월급이 지급되지만, 기사를 고용할 돈이면 정책비서를 한 명이라도 더 쓰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2003년 7월 김부겸은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와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한다. 총선을 불과 9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들은 지역주의 타파와 국민통합을 기치로 내걸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규합하고자 했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렀다. 물론 변형된 형태의 철새정치인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독수리 5형제


한나라당 탈당, 열린우리당 창당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당선된 후,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소수여당이었다. 노무현 후보를 지원해 대통령에 당선시킨 신주류 개혁세력, 이들은 2003년 11월 11일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40명)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그리고 개혁국민정당 김원웅, 유시민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창당한다.


그러던 중 총선 직전인 2004년 3월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민련 의원들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이 탄핵안은 국민의 거센 저항을 받아 역풍을 불러오게 된다.


그렇게 탄핵 역풍의 바람을 타고 열린우리당은 영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승리하면서 152석의 거대여당이 되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통일부장관, 김근태 원내대표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상임중앙위원 중 서열 2위인 신기남 의원이 승계받아 2대 의장이 되었으나(2004년 5월 17일), 부친(신상묵)의 일제 헌병 경력이 드러나 물러나야 했고, 그 뒤를 한나라당 부총재 출신 이부영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4대 개혁입법 추진과정에서 실패의 책임을 지고 이부영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도 물러나고 만다.


2011년 12월 김부겸은 여당의 텃밭인 대구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2012년 1월 김부겸은 대구시 수성구로 갔다. 뚜껑을 열어보니 득표율이 40.4%였다. 18대 총선에서 유시민도 32%, 17대 총선에서 이강철도 35%에 그친 곳이 대구였다.


2014년 김부겸은 다시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새누리당 권영진이 56%,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은 40.3%였다. 2년 전 총선에 출마했던 수성갑에선 당선인보다 높은 50.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는 지고도 이겼다.


그리고 2016년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다시 출마, 62.3%라는 득표율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이후는 생략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조사했던 김부겸의 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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