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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Oct 31. 2021

해방 이후 마산 최고의 권력자 김종신

과연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나?

오늘은 창원의 역사 인물 중 김종신이라는 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하는데요.

이분은 1904년 마산 오동동에서 태어나서 1978년 74세로 사망하기까지 그야말로 마산을 지배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엠비씨경남과도 관계가 깊은 분인데요. 1969년 2월 엠비씨경남의 전신 경남방송주식회사, 당시는 케이비씨라고 불렀죠, 그 케이비씨가 창립된 직후인 1969년 7월 케이비씨 사장을 맡은 분이 김종신입니다.


마산시 홈페이지에 있던 김종신 사진

당시 케이비씨는 지금의 경남신문, 당시 이름으로는 경남매일과 같은 회사였는데요. 김종신 씨는 경남매일과 경남방송 두 회사의 사장을 겸임하게 됩니다. 그보다 앞서 경남신문이 1946년 남선신문으로 창간할 때는 초대 사장을 지내기도 한 인물인데요.


1970년에 출간된 <오늘의 마산>이라는 책에는 김종신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 각 분야, 각 계층에 걸쳐 적어도 마산을 움직이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역할이라면 거의 다 해 온 정상의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맡아온 직책만 봐도,

1945년에는 미 군정이 임명한 적산(일본인재산)관리소장, 동양주정 관리인,

1946년에는 남선신문 초대 사장과 마산상공회의소 회장,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위 준군사조직인 민보단 고문, 마산약주 동양주류, 소화주류 사장, 마산 보도연맹 사업부장, 지금 예총의 전신인 문화단체총연합회 즉 문총 회장, 그리고 우익단체인 국민회 마산지부장, 마산시체육회장, 자유당 마산시당 위원장, 마산시장, 3.15의거 직전까지 자유당 국회의원을 했죠.


그리고 지금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마산대학 학장과 경남방송 사장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정치권력, 행정권력, 문화권력, 교육권력, 체육권력, 언론권력, 그리고 기업체를 소유한 재력가로서 상공회의소 회장까지 했으니 경제권력까지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보니 눈길을 끄는 게 있었어요.


바로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일본 유학생 시절, 조선공산당에 연루되기도 했고, 1930년에는 항일단체인 신간회 간부를 하기도 했는데요.


일제 말기인 1940년대에 들어서는 마산약주 사장과 마산피복공업 사장이 되더니, 1943년에는 마산부회, 그러니까 일제치하의 마산시의회 의원을 지냈더라고요. 요즘은 시의원 도의원을 주민직선으로 뽑지만, 당시에는 절반을 일제가 임명하고, 나머지 절반만 투표로 뽑았는데요. 김종신은 일제가 임명한 의원이 된 거죠. 그렇다면 친일 혐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요.


6.25 전쟁 전후에도 의심스러운 전력이 발견됩니다. 즉 마산에서만 16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던 보도연맹 간부를 지낸 전력인데요. 6.25 직전인 1949년 마산보도연맹 사업부장을 맡았고, 동시에 그 당시 최고의 우익단체인 국민회 마산지부장, 그리고 이승만 친위조직인 민보단 고문을 맡았다는 겁니다. 당시 보도연맹은 위원장을 검찰지청장이 맡고, 이사장은 경찰서장, 위원은 경찰서 사찰과장, 그리고 각 부장은 우익단체 간부들이 맡았는데요. 거기에 김종신 씨가 사업부장을 맡았으니, 민간인들의 보도연맹 가입 권유는 물론 학살에도 관여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1960년 마산피학살자유족회 결성식 모습. 장내는 울음바다였다.




그 여세를 몰아 전쟁 중에 치러진 선거에서 김종신은 마산시의원으로 당선되고, 다시 간선으로 마산시장이 되죠.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54년에는 자유당 국회의원이 되는데요.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1960년 3.15마산의거가 터질 때에도 자유당 마산시당 상임고문이었어요.


그런데, 3,4월 마산시민항쟁 당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중앙부두에 떠오른 김주열군의 시체를 촬영해, 세계적인 특종을 했던 당시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쓴 ‘내가 겪은 의거 얘기’라는 글에 김종신으로 짐작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요.


허종 기자가 뭐라고 썼냐면...


김주열군의 어머니가 아들의 책가방을 들고 마산시가지를 헤메고 있을 때 마산시청 뒤의 저수지에선 시체수색작업이 실시되었다.(…) 시청 뒤 저수지에서 시체수색이 있은 다음날인 3월 하순의 어느날 이른 아침 채 잠도 깨기 전에 머리맡의 전화벨 소리가 요란했다. 수화기를 든 바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귀창을 때렸다.
“허군인가?…내 김인데….”
“아니 선생은 어쩐 일이십니까?”
“…사람이란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모르는 법인데 내가 지금 몹시 신경이 날카롭네. 이 사람아 자네가 요새 좀 심하지 않나….”

찰그락 전화는 끊어졌다. 김모 선생이란 언론계 출신으로 내가 평소 존경하던 자유당 시당 간부였으며, 그분도 나를 아껴왔던 처지였다. 그러다가 3·15의거를 계기로 마치 압박자와 피압박자 같은 사이가 돼버렸다.
전화기를 든 내 손이 떨릴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아니 몽둥이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았다. ‘천하공당 자유당이 협박을 한다…, 내가 존경해온 분이지만 좋다. 해보자. 이젠 죽기 아니면 살기로구나…’싶어졌다.
얘기가 앞질러지지만 정권이 무너진 5월 어느날 그분은 중간에 사람을 넣어 나를 만나러 왔었다. 신마산의 콜럼비아 다방에 중재자의 뒤를 따라 나타난 김 선생은 냉정한 태도의 나더러 “허군 사람이 살다보면 별일이 다 있는 법인데 내가 지나쳤던 점 양해하고 마음을 풀게”하고 달랬다. 그러나 나의 입에서는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처음 그분을 본 순간 섬뜩한 기분을 느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산 3.15의거탑


그 후 언론인 김태룡 선생이 3.15의거의 전개과정을 최초로 밝힌 논문을 1964년 마산시사 사료집이라는 책에 발표하는데요. 여기에도 김종신의 이름이 나옵니다.


김주열 군의 참혹한 시체가 발견되고 4.11 항쟁으로 다시 마산이 뒤집어진 직후인 4월 16일 정당과 사회단체로 구성된 ‘마산민심수습대책위원회’가 발족하는데요. 이 단체의 대표 5명 중 1명이 김종신이었던 거죠.


그러자 당시 민주당은 “김종신이 대표로 있는 민심수습대책위원회는 초당적인 단체가 될 수 없다”면서 참여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대책위는 별다른 활동을 못하고 흐지부지됐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김종신은 창원의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자리와 권력을 누렸지만, 결코 시민의 입장에서 존경하고 지지할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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