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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Oct 31. 2021

5.16쿠데타 직후 끌려간 사람들

그들은 누구였고, 어떤 일을 당했을까?

오늘은 박정희의 5.16쿠데타 직후 군인과 경찰에 끌려갔던 경남 사람들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알다시피 박정희는 1961년 5.16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했는데요. 5월 16일 쿠데타가 성공을 하고, 바로 다음날인 5월 17일부터 전국에서 군인과 경찰이 수천여 명의 사람들을 체포영장도 없이 잡아가두기 시작하는데요. 그 숫자만 무려 2769명이었습니다.


잡혀간 사람들은 어떤 인물?


잡혀간 사람들은 주로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맹(교원노조)과 전국양민피학살자유족회(피학살유족회), 한국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민족통일학생연맹, 악법반대학생투쟁위원회, 범민족청년회의, 민족자주통일협의회, 통일민주청년동맹, 민주민족청년동맹, 전국학생혁신연맹, 사회당, 사회대중당 등 18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와 간부들이었습니다.


경남에서도 마산유족회와 전국유족회장을 했던 마산의 노현섭 선생과 창원유족회 김봉조, 통영유족회 탁복수, 김해 진영의 김영욱 김영봉 방영조, 밀양 김봉철, 거창유족회 문병현 등이 영장도 없이 연행되었습니다.

또 마산에서 영세중립화 통일운동을 하던 김문갑 선생 등 간부들, 그리고 교원노조 운동을 했던 마산의 황낙구, 이봉규 교사 등이 잡혀갔죠.


영세중립화통일위원회 간부들


그 분들은 무슨 죄를 지어서 잡혀갔나?


그렇게 잡혀간 사람들은 서울의 각 경찰서 유치장에 분산, 장기간 구금돼 있었는데요.


문제는 막상 그렇게 전국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잡아가긴 했는데, 마땅히 그들을 처벌할 법이 없는 겁니다. 왜냐면 그들이 딱히 범죄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냥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활동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혐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박정희는 그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이라는 걸 뚝딱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소하고 재판할 ‘혁명검찰부 및 혁명재판소조직법’이라는 것도 만들죠.


이 두 법이 6월 21일과 22일 제정, 공포되었는데요. 


보통 법이라는 것은, 제정 공포된 후부터 그 법을 위반한 사람한테 적용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박정희는 전세계에 유례없는 ‘소급 적용’이라는 조항을 부칙에 집어넣습니다. 법이 정해지기 전에라도 이 법이 정한 행위를 한 사람은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거죠.


어떤 처벌을 받았나?


그렇게 해서 잡혀간 사람들은 사형, 무기징역, 15년, 10년, 7년, 5년 등의 중형을 받았습니다.


마산의 노현섭 선생도 처음엔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나중에 15년으로 감형되어 10년을 복역하고 나서 주거 제한 조건으로 병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1991년 돌아가실 때까지 옥살이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1960년 마산상공회의소에서 열렸던 마산피학살자유족회 결성식


무슨 죄목으로 그런 판결을 받았나?


바로 ‘용공’ 즉, 공산주의를 용인하고, ‘이적’ 즉,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죄목이었는데요.


그 판결문이 황당합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 보련원(국민보도연맹원) 및 국가보안법 기미결수의 피살은 불법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을진대 … 유족회의 성격과 그 활동결과에 대하여 북한괴뢰의 사상선전에 동조하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음에 ….”(경상남북도피학살자유족회 사건)


쉽게 말하면 판결의 요지는 ‘국가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불법이라 하더라도, 그 불법학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북괴에 동조하는 행위다’라는 뜻이죠. 정말 세계적으로 길이 남길만한 희한한 판결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 동래유족회 사건 판결문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6·25 동란시에 대한민국 군·경찰에 의해 작전상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익분자가 아니라는 근거없는 망언과 재판절차 없는 사형집행이 부당하다는, 당시의 전국(戰國)을 망각한 편견에 사로잡혀 ….”


‘재판절차 없는 사형집행이 부당하다’는 게 ‘편견’이라고 못박는 판결문입니다. 사법부가 사법절차를 부정하는 표현인 거죠.


그분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나?


물론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던 분들은 노무현 정부들어 진실화해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그 조사결과에 따라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 사람들만 최종 무죄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노현섭 선생 같은 경우 돌아가신 사후에 2010년에야 무죄를 받았죠.


그때서야 마산지역에서 노현섭 선생을 아는 분들이 나서 노현섭 선생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그를 추모할 수 있게 되죠.


노현섭 선생의 생전 모습


그나마 후손이 재심청구라도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이렇게 뒤늦게라도 명예회복을 할 수 있었지만, 상당수는 그냥 영원히 빨갱이 딱지가 붙은 채 묻혀져 버렸죠.


잡혀간 사이 민간인학살 희생자의 무덤도 파헤쳐졌다고?


간부들이 잡혀가 유치장에 있는 사이 희생자의 유골을 찾아 만들어놓은 합장묘까지 군인들을 풀어 다 파헤쳐서 유골을 이리저리 흩어버리고, 유족들이 세워놓은 위령비도 정으로 쪼아버리거나 파괴해버리는 엽기적인 짓을 합니다.


거창 민간인학살 희생자 517명의 유골이 합장돼 있던 신원면 박산골에서 그랬고, 김해읍과 진영읍, 그리고 창원군 일부지역에서 발굴된 유골을 합장해놓은 설창리 고개도 똑 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민간인학살로 희생됐던 김해 강성갑 목사의 추도식(1960년)


교원노조에 참여한 교사들의 피해도 컸다고?


형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대표자와 간부들뿐 아니라 3008명의 교사가 교원노조에 가입했했다는 이유로 강제해직되었습니다.


2009년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해직교원 3008명 중 경남(현재의 부산·울산 포함)이 763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북(대구 포함)과 경기지역이 각 503명과 484명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1989년 노태우 정부 당시 전교조에서 해직된 1500명보다 두 배나 많은 교사가 교단에서 쫓겨난 것이죠.


4.19직후 교원노조 마산지회장을 맡았던 이봉규 씨.


그들은 이후 복직은커녕 제대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들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고 진실규명의 길이 열렸을 땐 이미 80대 노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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