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캄보디아에서 온 '훈' 할머니 이야기
-오늘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중적으로 전국에 알린 사건을 준비했다고요?
네. 1997년 창원시 마산 진동면 출신의 일본군 ‘위 안부’ 피해자 ‘훈’ 할머니 이야긴데요.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위안부’ 문제는 여성단체들의 연대조직이었던 ‘한국정대협’ 내부에서나 다뤄지고 있었을 뿐, 일반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모르는 상태였죠.
그런데 이 할머니가 나타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는 모든 국민이 다 알게 되는 그야말로 ‘전국민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산 진동 출신의 ‘위안부’ 할머니인데, 그 할머니 이름이 ‘훈’인가요?
‘훈’이라는 이름은 캄보디아 이름인데요. 이 할머니가 열여섯 살 때 일본군에 끌려가 태평양 전쟁 당시 캄보디아 전선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고,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지만, 일본군이 한국인 ‘위안부’를 버리고 가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캄보디아에서 현지인으로 위장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킬링필드 학살 때 외국인과 소수민족은 모두 죽였기 때문에 현지인으로 위장)
당시 할머니는 프놈펜 인근에 스쿤이라는 정글마을에 살고 있었는데요. 캄보디아는 크메르루주 정권 수립 이후 우리나라와는 단교 상태였기 때문에 교류가 거의 없었고, 1997년 그해 10월에야 다시 수교를 맺게 되죠.
그 무렵 한국의 젊은 사업가 황기연 씨가 약 캄보디아에 갔다가 우연히 ‘훈’ 할머니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이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한국언론에 전달하면서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일보 등 상당수 언론이 캄보디아 현지에 취재진을 보내기도 했고요.
-그래서 ‘훈’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확인이 되었나요?
문제는 ‘훈’ 할머니가 한국말도 할 줄 모르고, 심지어 아버지 어머니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건데요. 그런 상황에서 이 할머니를 한국 언론사 초청으로 할머니가 여행비자로 한국을 방문했고, 이때부터 한 달 동안 신문과 방송 등 거의 모든 언론이 할머니의 가족 찾기, 고향 찾기를 위한 취재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해방 후 반세기가 넘어 혈육을 찾게 되면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극적 스토리가 완성되니까요.
그런데 할머니가 기억하는 것은 자신이 한국인이고, 위안부로 끌려왔으며, 고향마을 이름이 ‘진동’이라는 것, 그리고 희미하게 자신의 이름이 ‘나미’였던 것 같다 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진동’이라는 지명은 마산 진동면 외에도 강원도 인제군 진동리, 남해군 창선면 진동리 등 세 곳이 있었고, 할머니는 수많은 취재진과 함께 세 곳을 다 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 누나 같다는 사람이 부산에서 나타나 언론이 ‘가족 찾았다’고 단정적으로 보도하기도 했지만, 유전자 감식 결과 전혀 아니라고 나와 오보가 되기도 했죠.
그렇게 훈 할머니는 결국 가족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가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당시 일부 언론은 ‘할머니가 과연 한국인이 맞나’ 하는 의혹을 제기했고, 할머니와 그를 소개한 한국인 사업가 황기연 씨는 사기꾼으로 몰릴 처지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김주완 기자가 할머니의 가족을 찾아냈다고요?
할머니가 캄보디아로 돌아가기 위해 인천공항을 찾은 날, 결국 가족을 찾지 못해 낙심한 탓인지 탈진을 해서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인천 길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죠.
그 와중에도 저는 할머니가 진동에 왔을 때 했던 말을 토대로 취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단서 중 하나가 ‘고향집 마당 한가운데에 엿을 고는 커다란 가마솥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일 진동면으로 출근을 하면서 70세 이상 노인들을 집중적으로 만나 탐문취재를 한 결과, 일제 강점기 당시 엿장수를 했거나 엿을 고아 엿장수에게 공급했던 다섯 집을 찾게 되고, 그 집 지번을 토대로 호적부와 제적부를 확인해 가장 유력한 가족을 찾게 됐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 이름은 이성호, 진동에서 엿공장을 했고, 큰딸 덕이, 둘째딸 남이, 남동생 태숙, 여동생 순이의 이름이 확인됐습니다. 둘째딸 남이가 바로 ‘훈’ 할머니였던 거죠. 제가 합천으로 시집간 여동생 순이 할머니를 만났는데, ‘훈’ 할머니의 사진을 보여주자 바로 알아보며 ‘언니’ 하며 울더군요. 그러면서 둘째언니가 일본군에 끌려가 행방불명됐다고 증언했습니다.
-그야말로 극적인 상봉을 했겠군요.
그렇습니다. 이순이 할머니는 저희 취재팀과 함께 인천으로 날아갔고, 언니와 남동생은 이미 돌아가셔서 올케와 장조카도 함께 갔습니다. 인천 길병원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껴안고 얼굴을 부비면서 울음바다가 됐죠.
유전자 감식 결과도 ‘자매가 확실하다’고 나왔습니다. 훈 할머니는 한국국적을 회복했고, 법무부에서 영주귀국 허가가 났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귀국하셨나요?
네. 그 후 제가 있던 신문사(경남도민일보의 전신 경남매일이었는데요), 신문사에서 ‘훈 할머니와 정신대 할머니를 돕자’는 모금운동을 벌였고,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등 많은 시민이 참여해 1억 원이 넘는 돈이 모금됐습니다. 그 돈 중 약 6000만 원을 이남이 할머니가 귀국해 장조카와 함께 살 수 있는 단독주택을 짓는데 보탰고, 1998년 경산시 화양동 장조카 집에서 올케와 함께 살게 됐습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정착에 애를 먹었고, 결국 다음해에 다시 캄보디아로 갑니다. 거기서 손녀들과 사시다 2001년 끝내 일본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죠.
-그 일을 계기로 경남에도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생겼다고요?
네, 당시 모금한 성금 중 이남이 할머니 정착 지원에 쓴 돈 외에 남은 돈과 지역 시민단체들이 미술전이나 공연을 통해 마련한 수익금으로 ‘경남정신대문제 대책을 위한 시민연대모임’, 줄여서 경남정대연이라 불렀는데요.
그 단체를 통해 ‘훈’ 할머니처럼 해외에서 귀국하지 못한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을 찾아 모셔오는 일들을 했습니다. 1998년 봄에 저를 포함한 경남정대연과 한국정신대연구소 연구원 등 4명이 중국 동북 3성에서 일곱 명의 피해할머니를 찾아 국내에 소개했고요. 그 중 김순옥 할머니 이옥선 할머니, 지돌이 할머니 등이 귀국해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정착하셨고, 이옥선 할머니는 지금 살아계시면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훈’ 할머니, 한국 이름 ‘이남이’ 할머니 덕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소극적이었던 우리 정부에게도 피해 할머니들을 국가가 나서서 챙기는 계기가 됐습니다. 마산 진동 출신의 ‘이남이’ 할머니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