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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Nov 27. 2021

독재정권 치하 창원의 세 어머니 이야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치하에서 희생되고 고통받은 아들 딸과 그 어머니

-오늘은 창원 현대사 속에서 세 어머니 이야기를 해보겠다고요?


네. 3.15의거와 4.11항쟁으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그리고, 1975년 박정희 독재 치하에서 조작된 간첩 사건으로 고초를 치렀던 마산 출신 서울대 의과대학생 서광태 씨의 어머니 최말순 여사.

마지막으로 1985년 전두환 독재 치하에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집시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이춘 학생의 어머니 이청자 여사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춘 씨는 지금도 창원에 살면서 열심히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먼저 김주열 열사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어떤 분이었나요?


1960년 3월 15일 마산3.15의거 당일 실종된 사람은 모두 5명. 이 중 4명은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단 한 명 김주열 군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권찬주 여사는 그길로 마산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남원에서 마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 거리였죠.

1960년 국회조사단 앞에서 행방불명된 아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권 여사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기까지 아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며 온 마산을 들쑤셔 놓았습니다. 특히 시청 앞 연못의 물을 다 퍼낸 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진흙 속을 손으로 휘젓고 다닌 것은 마산 시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요. 추모사업회 관계자들은 이 때문에 당시 마산에서 ‘김주열’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 바다에서 떠올랐을 때 특히 시신을 경찰이 바다에 유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마산이 분노로 발칵 뒤집어 진 것입니다. 결국 4.11마산항쟁과 이후 4·19혁명의 근간을 권찬주 여사가 온 마산을 헤매며 닦아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열사의 시신이 떠오른 4월 11일은 권 여사가 아들 찾기를 포기하고 그 남원으로 돌아가던 날이었습니다. 이후 권 여사는 두 번이나 마산시민 앞으로 편지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는데요. 열사가 죽은 그해 5월 8일 권 여사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식 주열이가 죽은 지 거의 한달 동안이나 걱정해주신 끝에 지난 4월 11일 다시 마산에서 의거를 일으켜 나라를 바로 서게 해주신 여러분에게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바입니다. 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남은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게 있겠습니까?"


정말 무서운 말이고 위대한 말이 아닙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어머니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 의미에서 권찬주 여사는 '한국 민주주의의 어머니'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 여사는 특히 경찰이 야밤에 김주열의 시체를 빼돌려 남원에 데려온 후 시체인수증에 도장을 찍으라고 하자 이를 악물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시체를 못받겠으니 이기붕의 집에 갖다 주라."


열사의 어머니 권 여사의 편지는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이 나라 어머니 여러분! 그리고 마산시민 여러분의 그 거룩한 뜻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놈들이 그 같이 악독하게 죽였지만 죽인 그 놈들은 벌을 받을 것이요, 내 자식은 신선이 되어 올라갔을 것입니다. 마산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부디 몸 건강하시실 5백리 지리산 고개 너머서도 빌어마지 않겠습니다. 1960년 5월 8일 어머니날에 권찬주 올림“


-다음은 서광태의 어머니 최말순 여사 이야기죠?


서광태라는 스물네 살 청년이 있었는데요. 경남 마산시(현 창원시) 창동 출신으로, 1975년 당시 서울대 의대 본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그는 11월 29일 등교하던 중 학교 강의실 앞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육군 보안사 소속 군인들에게 끌려갔습니다. 같은 과에 재학 중이던 재일교포 유학생 강종헌 씨도 함께 연행되었는데요. 

1975년 11월 22일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대해 언론에 브리핑하는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김기춘(이후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을 했던 그 김기춘)은 이른바 ‘재일교포유학생간첩사건’을 발표합니다. 마산 출신 서광태가 29일 끌려간 것도 이 사건 수사의 연장선으로 ‘서울의대간첩단사건’이라 불렸죠.

 

-이후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고요?


네. 당시 서광태 씨가 직접 쓴 항소 이유서를 읽어보겠습니다.


“75년 11월 29일(토) 오전 9시 10분, 10여분 늦게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가방을 들고 강의실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는 수사관님들을 따라 나서서 서울역 부근의 모처 지하실에 도착 즉시, 무수한 폭행에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이를 씻은 핏물을 마시우는 등의 무시무시한 공포분위기와,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지만, 무릎을 꿇려 앉히고는 그 아래 박달나무 곤봉같은 나무를 집어넣고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워커발로 허벅지 위를 짓밟는 통에 기절하였음은 물론, 정강이 아래는 피투성이가 되고 나무마저 자근동 부러졌습니다.

옆방에서도 찢어질 것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고문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본인도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 누르는 등의 무수한 육체적 고통이 가해졌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무수히 많은 수사관님들이 차례로 들어와서 감시하는 통에 계속해서 한 주일 이상을 거의 자지 못한 데서 오는 불면의 고통과, ‘면도칼로 살껍데기를 벗기겠다. 빨갱이는 삼족을 멸하니 너하나 쯤이야…’라는 그 지하실의 전율할만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들이었습니다."
서광태의 상고이유서 중 일부


이렇게 하여 없는 간첩을 만들어낸 독재의 하수인들은 이들 학생을 국가보안법상 간첩죄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강종헌만 간첩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고, 서광태는 긴급조치 위반만 적용,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79년 10월 박정희가 죽은 후 석방됐죠. 긴급조치 9호가 실효되었기 때문인데요. 덕분에 그는 이후 복학하여 의사의 꿈도 이루게 됩니다.


간첩죄로 사형수가 되어 복역 중이던 강종헌도 6월항쟁 이후인 1988년 감형으로 석방됐고,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재심 권고에 이어 2015년 대법원 재심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게 됩니다.


과연 1979년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이 없었다면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의사가 되기는커녕 서광태의 삶은 철저히 망가졌을 것이고, 강종헌도 끝까지 간첩죄를 덮어쓴 채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대 재학중 구속돼 이선관(시인)·김종철(부마항쟁 주도·작고)씨 등에 의해 마산에서 활발한 구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서광태의 어머니 최말순 여사의 호소문이 마산 시민들에게 알려지며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요.


-최말순 여사의 호소문이 어떤 내용이었기에 그랬나요?


네. 제가 좀 읽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2학년에 재학 중 재일교포 학생 강종헌(당시 서울의대 2년)의 학생 간첩사건에 의해 반공법, 국가보안법, 긴급조치 9호 등의 죄명으로 징역 8년, 자격정지 8년의 형을 받고 광주교도소에 복역중인 서광태의 에미입니다.  
전 그다지 배운 게 없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에미로서는 이런 억울한 누명을 쓴 자식에게 진실로 죄스러운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내 자식놈은 문리대 시절 학생회 간부로서 데모의 와중에 휩쓸린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온 가족이 한사코 데모에 가담하지 말도록 말렸습니다. 아무런 불만도 있을 수 없는 제겐 평탄한 환경 속에서 의사가 되어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욕망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의 행동이 저주스럽기조차 합니다. 데모 좀 한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의사로서의 조용한 생활을 바랬기 때문에 데모를 못하도록 말린 게 이렇게 되었으니 천추의 한이 됩니다. 
전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정부의 말이라면 다 믿었습니다. TV 방송극에 나오는 반공 실화극조차 그대로 믿었습니다.
…(중략) 저는 육군 보안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이러한 반공법을 다루는지는 더 더욱 몰랐던 오직 생활에만 여념이 없었던 순박한 6남매의 에미였습니다. 다만 내 자식이 관련되었던 이 사건에서 서울 의대생 14명이 무궁한 앞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간 이하의 고문으로 무참히 짓밟을 수 있었던 무시무시한 권력기관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이래도 좋은 지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죄없는 이 어린 학생을 과거에 데모 좀 했다고 간첩으로 몰아 구만리 같은 앞길을 이렇게 무참히 짓밟은 이 책임을 누가 질 것입니까 육군 보안사입니까 학교당국입니까 아니면 엉터리 재판을 한 재판관입니까.”


-대단한 어머니네요. '데모를 못하게 말린 게 천추의 한이 된다'니...


다음은 1985년 전두환 치하에서 독재정권에 대항해 시위를 하다 구속되어 2년 3개월 감옥살이를 한 이춘 씨와 그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이춘 씨는 지금 창원에 살고 있는 1963년생, 저와 동갑인 여성분인데요. 지금도 열심히 여러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이춘 씨는 1985년 당시 고려대 독문학과 4학년이었습니다. 당시 구로공단 시위에 함께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고, 처음엔 집회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1년 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학교 안에서 운동권 조직활동을 한 것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추가되어 2년 3개월을 복역했습니다. 당시 지금의 노무현재단 유시민 이사장 등 많은 학생이 구속될 때였는데요.


이때도 이춘 씨의 어머니가 나섭니다. 어머니 이청자 여사는 그해 5월, 80여 명의 학부모들이 모여 구속학생 학부모협의회라는 단체를 만들게 되고, 회장이 됩니다. 7월에는 재야단체들이 모여 ‘학원탄압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드는데, 이청자 회장은 그 단체의 부위원장도 맡게 됩니다. 그때부터 학부모들은 수없이 많은 집회에 참석하며 민주화운동의 선봉이 됩니다.


이청자 여사는 “고 2때 4.19혁명이 일어났는데, 당시 울분과 함께 애국심이라는 걸 느꼈었다. 그후 졸업하고 현실에 안주했는데, 딸이 구속되면서 새삼스레 우리나라의 여러 문제점들이 새롭게 인식됐다”고 말했던 게 당시 기록에 나옵니다.

이춘 씨의 어머니 이청자 여사에 대한 기록(황의봉 저, <80년대 학생운동>, 예조각, 1986) 


그때 44세였던 이청자 여사는 대학생들의 집회에도 참석해 이런 연설을 합니다.


“우리도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양심을 가졌다. 우리 딸이 따뜻한 꼬까옷 마다하고 감옥을 선택한 이유를 알고 있다. 어느 누구도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을 막을 수 없다. 학생 여러분도 아무리 민주화 행진이 고통스러워도 용기를 잃지 마라. 여러분의 뒤에 우리 국민과 학부모들이 있다.”


이 연설로 이청자 여사는 집회에 참석한 대학생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습니다.


2년 3개월 후 딸 이춘 씨는 석방됐고, 이후 87년 6월항쟁이 일어났는데, 그때도 딸보다 더 열심히 항쟁에 앞장섰다고 합니다.


이런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 정도만큼이라도 민주화와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창원의 세 어머니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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