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18개 시군 75명의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 생생한 증언 채록
-이번에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집을 펴냈다고요?
네. 경남도청의 예산 지원을 받아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에서 <70년만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총 다섯 권의 책을 출간했는데요. 제가 젊은 작가와 연구자들과 함께 증언을 채록하고 기록하는 실무를 맡아서 했죠.
-다섯 권이면 상당히 방대한 내용일 텐데,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어려웠지만, 집단학살이 있었던 1950년으로부터 무려 70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니, 아버지가 학살되던 당시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유복자의 나이도 벌써 70이 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유족들의 증언이라도 채록해놓지 않으면, 1세대 유족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아무도 이런 역사를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죠.
실제로 이번 증언집에 담긴 마산의 김정의 유족은 저희와 인터뷰를 한 뒤 2개월 후에 결국 책이 나오는 걸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나마 생전에 법원으로부터 학살당한 아버지의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냈고, 이 책에 증언이라도 남기고 돌아가셨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증언집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요?
책에 실린 총 75명 중에서 72명이 유족이고, 나머지 3명은 당시 학살현장을 목격했거나 그 사건을 알고 있는 분들이었는데요.
72명의 유족들 중에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된 유족이 가장 많고요. 마산형무소나 진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 학살, 그리고 한국전쟁이 나기 이전인 1949년 우리 국군이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의 공비토벌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공비에게 밥을 줬다, 짐을 옮겨줬다 이런 명목으로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학살한 사건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산청군 시천면과 삼장면에서 220여 명을 통비분자로 몰아 학살했고요. 함양군 수동면에서 50여 명, 백전면에서 20여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보도연맹 사건과 재소자 학살은 뭔가요?
보도연맹의 ‘보도’는 도와서 바른 데로 인도한다는 뜻인데요. 이승만 정권이 사실상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관리하기 위해 국가차원에서 만든 관변조직입니다. 1949년 그 숫자가 30만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요. 이 보도연맹원들을 한국전쟁이 나자 전란기의 혼란을 틈타 모조리 학살해버린 사건입니다. 당시 마산과 창원에서도 2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그렇게 학살됐는데요. 마산의 경우 시민극장과 강남극장에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한 뒤 마산형무소로 연행했고, 이후 미군 함정에 태워서 구산면 괭이바다에서 수장 학살했습니다.
또 마산형무소와 진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이른바 사상범이나 정치범들도 그렇게 학살해버렸죠.
-이번에 출간된 증언집에도 그런 내용이 생생히 담겨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유족이 젖먹이 때거나 어릴 때 일어난 일이어서,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가 많고요. 이 책은 단순히 학살사건을 알리는 내용보다 그렇게 아버지를 잃고 난 뒤 남은 유족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경찰의 감시는 물론 연좌제로 인해 취직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고통스런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증언에 한국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죠.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혀 가장 힘들게 살아온 민중의 역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더욱 의미와 가치가 있는 작업이었군요.
어제 경남도민일보가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정근식 위원장을 인터뷰했던데요. 정 위원장은 이 책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더군요.
“길고 긴 금기의 세월을 강요받아온 유족들이 고통을 고백하고, 이를 공동체의 기억에 각인하는 일은, 그 자체로 치유와 화해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서 “이번 구술채록작업은 지방정부와 시민사회 협력의 산물로, 전국적인 모범사례이며, 앞으로 진실화해위가 수행해야 할 증언채록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아, 다른 지역에선 이런 유족 증언집이 나온 적이 없나요?
네. 경남이 처음입니다. 그 지역의 학살사건을 취재해 기록한 책이나 언론보도는 있지만, 유족들의 생생한 육성을 광역단위에서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 건 이게 처음이죠.
경남에서 나온 이 책을 보고, 다른 지역에서도 유족들이 더이상 돌아가시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특별히 소개해주실만한 유족이 있나요?
아까 증언채록 후 돌아가셨다는 마산 유족 김정의 씨인데요. 학살된 그분의 아버지 김태동(당시 36세)은 평소 아들에게 “이승만이는 친일세력을 업어가지고 정권을 잡고 저것은 인간으로서는 대통령 할 자격이 없다”고 자주 말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그런 이승만 정권에 미운털이 박혔고, 전쟁 발발 후 시민극장으로 소집된 후 학살됐죠.
이후 김정의 유족은 1960년 마산 3.15의거와 4.11항쟁에 적극 참여했는데, 그 동기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우리 가정을 어렵게 만든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물리친다 해서 3월 15일에 함께 데모했지요. 김주열 군이 사망하고 시신이 발견했을 때인 2차 항쟁에 참여했었지요. 그리고 4월 혁명이 일어난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이승만이 뭐가 나쁘냐 하면, 자기 생각하고 다르면 전부 다 빨갱이라 몰아가지고 죽여버려가지고 그게 제일 나쁜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의식이 아주 뚜렷한 유족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국가가 나서 민간인학살 문제를 확실히 규명하고, 보상도 하고,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실려야, 우리가 당당하게 일제의 ‘위안부’ 동원이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등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증언집은 비매품으로, 책의 전체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PDF 파일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