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희생자 중 유독 독립운동가가 많은 이유
-오늘은 대한민국 정부에 학살된 독립운동가들 이야기를 해주시겠다고요?
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유난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많이 학살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일제 경찰에 쫓기다 잡혀 고문당하고 감옥살이까지 하셨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이승만 정권에 찍혀 감시를 당하다, 전쟁이 발발하니 그 혼란을 틈타 한국군과 경찰이 학살해버린 사례입니다.
-어떤 분들이 그런 일을 당했나요?
우선 창원 상남면 퇴촌리 출신의 안용봉 애국지사인데요. 이분은 1930년대 경성에서 노동조합그룹을 결성해 10여 년 동안 항일투쟁을 벌인 끝에 1940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던 분입니다. 2006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아 독립유공자가 됐고요.
그런데, 이분은 해방된 조국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여러차례 진해경찰서에 끌려가는 등 정권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오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진해경찰서에 다시 끌려가 학살되고 말았습니다.안용봉 애국지사가 공식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2006년 노무현 정부 시절, 마산 내서읍에 살고 있던 그의 아들 안인영 씨가 저와 함께 아버지의 재판기록 등을 찾아 국가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함으로써 가능하게 됐습니다.
-안용봉 지사 말고도 마산에서 학살된 독립운동가가 있다고요?
마산 진전면 곡안리 출신 이교영 선생도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진전 고현시장 장날에 일어난 시위에 참가했다가 주동인물로 체포돼 태형(1920년까지 존속된 형벌) 90대를 받은 것이 인정된다”며 대통령 표창을 받은 분입니다. 마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죽헌 이교재 선생과 항렬자가 같은 일가였고요. 이교재 선생과 함께 해방될 때까지 상해 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입니다.
이분 역시 제가 진전면 곡안리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사건을 취재하면서, 희생자 중 이교영 선생의 이름이 제가 아는 독립운동가 이름과 같아서 확인 결과 동일인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애국지사 추서를 받게 된 케이스입니다.
-그밖에는 또 어떤 분들이 있나요?
통영의 김철호 선생은 일제시대 때 의열단원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했으며, 신간회 통영지회 총무간사를 지낸 분이기도 합니다. 1928년 일제경찰에 체포돼 징역 1년형을 받았고요. 해방직후에는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 위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반민특위 활동 때문에 친일경찰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에 끌려가 학살, 수장되었습니다. 이후 자녀들의 신청에 의해 학살된지 45년이 지난 1995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경남 고성군의 심재인 선생도 항일운동지사로 건국훈장 애국장까지 받은 독립유공자인데요. 해방 후 이승만과 반대편에서 활동하다 1947년 경찰서에서 조사할 게 있다며 끌고 간 후 소식을 몰랐는데, 나중에 마산형무소에 수감 중이라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괭이바다로 끌고가 수장 학살해버린 경우입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고 1932년 전남노동협의회 사건, 1937년 노동운동으로 투옥돼 일제 감옥에서 2년형을 살았던 김한동 선생은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영문도 모른채 경찰에 체포되어 진주형무소에 복역 중, 전쟁이 일어나자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학살됐습니다.
-남편을 보도연맹 학살로 잃은, 희생자의 아내가 독립운동가였는데, 평생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았던 경우도 있다고요?
네. 마산에서 학살된 김영식 씨의 부인 천소악 여사가 그런 경우인데요. 남편을 그렇게 잃고도 자식들에게는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도 무서운 세상이어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독재정권과 친일경찰의 표적이 될까봐 두려워서 그랬다는데요. 해방된 후에도 독립운동 경력이 위험한 시대를 살았던 거죠.
그의 아들 김한석 씨에 의하면 재작년, 그러니까 2019년 보훈처에서 연락이 와서 어머니의 독립운동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훈처 조사기록에 따르면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있었고, 그게 서울까지 확산돼 1930년 당시 숙명여고 3학년이었던 천소악 여사가 서울지역 학생독립운동에 앞장섰는데, 그때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합니다.
천소악 여사는 남편이 희생된지 10년째 되던 1960년 돌아가셨는데요. 돌아가신지 거의 60년만에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게 된 거죠.
아들 김한석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을 때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생전에 자식들에게 그 자랑스런 역사를 말하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이 다시 사무쳤습니다. 그 무섭다는 왜정시절에도 재판을 하고 징역을 살렸으면 살렸지 무도하게 죽이지는 않았는데, 해방 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수립된 우리 정부가 재판도 없이 국민을 무참히 죽였으니 얼마나 한이 되었겠습니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았군요. 바로잡아야 할 역사도 많고요.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역사일수록 이렇게 드러내 밝혀야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