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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an 04. 2022

시민 버리고 몰래 도망한 진주의 지도층

6.25전쟁 당시 시민에겐 '피난금지령', 시장 군수 경찰 언론인은 도망

김주완의 역사 비화 10. 진주 퇴각의 비화

 

-오늘 주제가 ‘진주퇴각의 비화’인데요. 6.25전쟁 때 이야기인가요?

그렇습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마산 창원까지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못했지만, 인근 진주시와 진양군에는 인민군이 들어와 2개월간 인민공화국 치하에 있었죠. 그때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비화’, 그러니까 ‘숨겨진 이야기’라는 겁니까?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고, 이틀 후인 27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시민들에게 ‘대통령과 정부는 끝까지 서울을 사수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자신만 도망해버린 일은 워낙 잘 알려져 있잖아요?

특히 이승만은 내각과 국회에도 알리지 않고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도망을 갔는데요. 대전에서 서울중앙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말을 녹음하게 합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니 …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대다수 선량한 서울시민은 대통령의 말만 믿고 서울에 남았죠. 그러나 이미 대통령도 도망갔다는 소문을 들은 정부 관료와 군·경찰 고위 관계자, 국회의원들은 가족과 함께 재산을 챙겨 서울을 탈출했습니다.

그것뿐이 아니었죠.

그런 거짓연설이 방송된 지 4시간 뒤인 28일 새벽 2시30분,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해버린 겁니다. 다리 위에 있던 수백~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이 이 폭파로 죽었고, 피란길은 차단되었죠. 이로써 당시 서울시민의 3분의 2는 어쩔 수 없이 인민군 치하에 남아야 했던 거죠.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3개월 후 서울이 수복되자 군경은 서울에 남았던 시민들을 상대로 부역자·협조자 색출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또다시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는 사람들이 처형됐습니다.


이승만이 두고두고 욕먹을 수밖에 없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습니다.


-진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6.25전쟁 전 진주성 촉석루와 남강

예, 진주는 7월 31일 사천과 하동, 산청쪽에서 들어온 인민군에 함락되었는데요. 진주에서도 서울과 똑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민들에게는 ‘피난금지령’까지 내려놓고 있던 진주시장, 진양군수, 법원 검찰, 경찰서장, 군인들은 물론 언론인들이 소리소문 없이 도망가 버린 겁니다. 소속 공무원들도 건물과 주요 문서를 내팽개치고 다 도망가버렸는데요. 그러다 보니 진주의 호적부 제적부 등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된 겁니다.

반면, 특이한 것은 교육공무원들만 여기서 제외됐는데요. 그러다보니 진주사범학교, 진주농림중학교, 금산초등학교 등에서는 교장과 교사들이 학적부를 땅 속에 묻거나 개인 집에 숨긴 덕분에 남아있게 됐습니다.


심지어 경찰은 자신들이 도망가기 전 피란을 가려는 시민들을 가로막기도 했었는데요. 당시 병원장이었던 김준기 씨가 피란 준비를 하자 경찰이 ‘상부의 명령’이라며 ‘짐을 풀고 다시 병원 문을 열어라’고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김준기 원장은 결국 인민군 치하에 남겨지게 됩니다. 

6.25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촉석루의 흔적


-시민 몰래 도망간 지도층 중에 언론인들도 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당시 진주에 본사를 두고 있던 경남일보였는데요. 도망가기 전까지는 기자로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 “문화유격대를 만들어 지라산에 들어가 삐라 형식의 신문이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하던 경남일보 기자들도 함락이 임박해지자 모두 신문사를 빠져나와 부산으로 피란을 가버렸습니다. 기자들은 아무래도 일반 시민들보다 정보가 빨랐을 거잖아요. 그 정보를 시민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들의 도피에 이용한 거죠.

-서울에서 한강다리를 그랬던 것처럼 진주 남강다리도 그랬다고요? 

당시 유일한 남강다리는 진주교였는데요. 뒤늦게 고위지도층이 도망간 사실을 안 시민들은 31일 새벽에야 피란을 가려 했으나 진주교는 군·경에 의해 통행이 금지돼 있었으며, 이후 군·경은 진주교를 폭파하고 마지막으로 철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군·경은 진주로 진격해오는 인민군에 맞서 한번도 싸우지 않고 야반도주해버렸습니다.

-참으로 비겁하고 한심한 사회지도층이었군요. 하긴 대통령도 그랬으니.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쩔 수 없이 진주에 남게 된 진주시민들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인민군의 우익인사 처단 등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 속에 9월 25일까지 2개월을 보내게 됐는데요. 두 달 후 돌아온 군인과 경찰은 그렇게 인공 치하를 버틴 진주시민들 모두를 인민군 부역자로 간주하고 조사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숫자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이 부역혐의로 처형됩니다.

기록으로 나타난 숫자만 해도 당시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 일대에서 2786명의 부역자가 체포됐고, 그 중 1931명이 송치됐다고 하는데, 석방된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그 중 대다수가 처형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 그 당시 진주시민들은 9월 25일 인민군이 물러나고 다시 국군과 경찰이 들어오자 모두 거리로 뛰어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열렬한 환영을 했는데요. 


군·경은 그렇게 자신들을 환영하러 나온 시민들까지 모두 인민군에 협조한 부역혐의자로 간주하고 닥치는대로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환영나온 시민과 시내에 남아있는 변두리 집까지 검색해낸 시민들을 경찰서 앞 마당에 집합시켜 부역혐의 조사를 벌였고, 1000여명의 시민들을 진주중학교 교정에 모아놓고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역자 색출이 시작되자 첫날 군인들을 환영나왔던 시민들은 모두 집안에 꼭꼭 숨어 거리는 쥐죽은 듯이 조용한 풍경을 연출했다고 합니다.


-알면 알수록 화가 치미는 역사비화로군요.

네. 세월호 침몰사건 때도 선장이 승객들에겐 ‘선실이 안전하니 현재 위치에서 절대 움직이지 마라’ 해놓고는, 선장 자신은 탈출해버린 일이 있었죠. 그런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우리나라 지도층의 이런 비겁한 역사에서 이어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지도자를 잘 뽑아야 할 이유입니다.



참고자료 : 김경현, '6.25전쟁 시기 진주지역의 사회사', 경상대학교대학원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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