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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Mar 15. 2022

62주년 3.15의거, 가해자는 누구인가?

민주항쟁 반대편의 원흉을 규명하고 죄상을 기록해야 할 이유


-3.15의거가 일어난 지 62주년이 되는 날인데요. 오늘은 3.15의거 가해자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하셨죠?

네. 이런 역사적 사건이나 국가범죄, 반인권 범죄에선 구체적인 가해자를 밝혀내고, 법적인 처벌은 물론 역사에도 기록으로 남겨 다시는 그런 가해자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게 중요한데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관련단체나 행정에서는 매년 기념행사를 하면서도 가해자를 규명하고 그들의 죄상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해방 이후 우리가 친일파를 제대로 처단하지 못해 지금도 역사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있는 것도 역사의 가해자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유태인 학살의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전쟁 이후 전범재판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나는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는 논리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잖아요? 거기서 ‘악의 평범성’이란 말도 나왔는데요.


가해자를 제대로 규명하고 처벌하지 못하면 아이히만과 같은 군인이나 경찰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3.15의거 가해자에 대한 기록이 지금까지 전혀 없는 건가요?


다행히 마산 3.15민주묘지 안에 있는 3.15의거 기념관 전시물 중 하나의 패널에 그 가해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3.15의거기념관에 있는 가해자에 대한 전시물


사실 그것도 처음 기념관을 만들 때 제가 3.15의거기념관 전시설계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가해자 명단을 반드시 새겨넣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해 그거라도 걸리게 됐거든요.


그렇게 가해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야 그걸 보는 사람들이 ‘역사에서 죄를 지으면 저렇게 영원히 이름이 남아 아들 손자, 후손들까지 욕되게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반인도적이거나 정당하지 못한 지시나 명령을 거부하는 공직자도 나올 것이고요.


-기념관에 그게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러면 그 가해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요? 


물론 1차적으로는 이승만과 이기붕을 비롯한 정권이죠.

그러나 마산에서 직접 부정선거를 총지휘하고 시민의 봉기를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왜곡했을 뿐 아니라 폭력적인 진압과 발포명령으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책임자들도 분명히 규명이 돼야 하는데요.

우선 부정선거의 총책으로 그의 집이 ‘오동동 경무대’라 불릴 정도로 권세를 자랑했던 창원 국회의원이자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이었던 이용범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산시민의 민의를 배신하고 이용범에게 매수돼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꾼 뒤 역시 부정선거를 지휘한 마산 국회의원 허윤수도 뺄 수 없죠.


또한 발포명령자로 지목되는 서득룡 부산지검 마산지청장과 손석래 마산경찰서장도 직접적인 가해자로 꼽히죠. 또 이용범의 수족노릇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북마산파출소 방화사건 조작 등 죄상을 남긴 강상봉 마산경찰서 사찰계장과 노장현 경위, 항쟁을 공산분자의 소행으로 모는데 앞장섰던 이필재 서울신문 마산지국장, 시위진압을 지휘한 최남규 경남경찰국장도 대표적인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그 외 발포경찰관으로 △박종표(마산경찰서 경비주임) △김종복(남성동파출소 주임) △주희국(마산경찰서 수사계 형사) △이종덕(마산경찰서 수사주임) △이종한(북마산파출소 순경) 등 다섯 명이 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기소돼 재판을 받았는데요. 처음 혐의는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이었으나 이후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죄명이 바뀌어 기소됐습니다.)


이들 중 최남규 경남경찰국장과 박종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은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과 헌병 출신이라는 것은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고요.


-가해자들은 이후 어떤 처벌을 받았습니까?


이용범 국회의원은 3.15 관련해서는 처벌을 받지 않았고요. 3.15와 무관한 부정부패죄로 두 번 구속되어 상당한 재산을 몰수당한 뒤에도 권력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몇 번 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1968년 서울의 3류 호텔에 살다가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 소설가 이병주 씨가 <산하>라는 소설에서 이용범을 주인공으로 풀어내기도 했죠.

허윤수 국회의원은 3.15 당시 시민들에 의해 집이 파괴되기도 했지만, 희한하게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1992년까지 천수를 누리다 고향인 진주에서 숨졌고요.


-그래도 발포명령자나 경찰관들은 처벌을 받았겠지요?


네. 최남규 경남경찰국장은 시민이 총에 맞아 숨진 데 대해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는데 군중이 던진 돌멩이와 총알이 ‘키스’하여 되돌아와 군중의 뒤통수에 맞았다”는 당구의 ‘쓰리쿠션’ 원리를 강변했던 사람인데요.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나 서울대병원에서 간장염으로 죽었습니다.

그 외 서득룡 지청장과 손석래 마산경찰서장, 다섯 명의 발포경찰관들도 각각 처벌을 받았는데요.


어찌된 일인지 방화사건을 조작하고 고문한 강상봉 노장현 두 사찰계 형사는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강상봉은 4.19혁명 직후 경찰직을 그만두고 진주에 가서 사업을 하다가 1981년에는 마산에 다시 와서 경남에너지 사장까지 했습니다. 노장현은 4.19 이후 김해의 한 저수지에서 자살했는데요. 3.15 당시 정권의 무시무시한 용공조작 음모를 수립했기 때문에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용공조작에 앞장섰던 언론인은요?


언론인 이필재 역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론개혁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보태자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가해자들의 이름과 죄상은 순전히 제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아직 더 연구하고 규명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연구결과에 따라 추가로 나올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가해자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네, 오늘까지 김주완의 역사비화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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