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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Mar 14. 2022

3.15의거 희생자 수를 둘러싼 논란

경찰의 총탄에 희생된 열사는 12명일까 14명일까?

-3월의 첫날입니다. 3월은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3.15의거가 마산에서 발생한 계절인데요. 오늘 ‘3.15의거 희생자 수를 둘러싼 논란’을 정리해주신다고요? 


네. 오늘부터 다음 시간까지 두 차례에 걸쳐 3.15의거의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사망자 숫자인데요. 지금까지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열두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15의거 2년 뒤인 1962년 건립됐던 마산합포구 신포동 3.15회관(현 마산노인종합복지관)의 전면에는 열두 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세워져 있었는데요. 기둥이 하필 열두 개였던 이유는 3.15 당시 경찰이 쏜 총탄에 학살된 12열사를 기리기 위한 의미였습니다.

그때의 사망자 수 집계를 근거로, 지금도 3.15의거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는 당시 사망자로 12열사의 인물자료만 등록돼 있습니다. 또 최근에 문을 연 마산 창동 3.15의거 발원지기념관에도 12열사의 영정만 걸려있습니다.


-12열사는 어떤 분들인가요? 


네, 먼저 3월 15일 1차 봉기 때 경찰의 실탄 발사로 숨진 열사로는 당시 마산공고 학생이었던 김영호(당시 19세) 열사와 강융기 열사(19), 마산고등학교 학생이었던 김용실(18), 마산상고 신입생이었던 김주열(17), 이렇게 학생이 네 명이었고요.


노동자였던 김효덕(19), 무직이던 김영준(20), 전의규(18), 김삼웅(19), 그리고 구두닦이였던 오성원(20)까지 합쳐 이렇게 3월 15일 시위로 숨진 열사는 총 아홉 명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른 날 밤, 경찰과 대치하던 중 총탄에 숨진 노동자 김영길(17) 열사가 있고요.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날 시위를 벌이던 중 희생된 노동자 김평도(38), 마산동중 학생 김종술(16) 열사까지 3명을 합쳐 모두 열두 명이 된 겁니다.


김주완 1997년 보도


-그런데 12열사 말고도 사망자가 더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두 분이 더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은 제가 1997년 취재과정에서 찾아낸 분인데요. 당시 무직으로 스무 살이었던 조현대 열사입니다. 마산 상남동에 살던 조현대 열사는 3월 15일 1차 봉기 때 북마산파출소 앞에서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이 쏜 총에 오른쪽 가슴 관통상을 입었습니다.


그 후 조현대 열사는 구 북마산역 앞에 있는 황의원이라는 곳에서 1개월 가량 치료를 받았지만, 장기적인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는데다 상태가 점점 악화되자 1961년 2월 25일 친척이 있는 부산시 영도구로 갔다가 사흘 뒤인 28일 피를 토하고 숨졌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61년 3월 15일자 부산일보 기사를 발견했기 때문인데요. 그렇게 부산일보에 보도됐지만, 5.16쿠데타 이후 진행된 3.15 관련 혁명재판 과정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공식적인 희생자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당시 혼란스런 사회분위기 때문에 유족들이 희생자 신고를 못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유족들이 있었나요?


네. 당시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조현대 열사가 숨진 후 당시 북마산 제비산 자락 동편에 있던 한 양로원에서 식모로 일하던 어머니 박연순 씨와 형 태근 씨, 동생 현식 군 등 유족들이 부산 영도구 동삼동 공동묘지에 매장했다고 합니다.


김주완 1997년 보도


-그럼에도 김주완 기자의 보도 이후, 아직도 공식 사망자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뭔가요?


아직 유족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현대 열사가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 북마산 황의원도 지금은 없어져 치료기록을 찾을 수 없었고요. 당시 보도 이후 마산보훈지청에서 유족을 찾기 위해 내무부 전산망을 통해 유족 조회를 했지만 못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 들어 4.19혁명 유공자로 ‘건국포장’ 추서 대상이 됐지만, 아직 유족을 찾지 못해 국가보훈처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에 곧 가동하게 될 진실화해위원회 3.15의거진상규명 마산사무소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조현대 열사의 유족이나 친인척을 찾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유족을 찾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까지 ‘12열사’로 불러왔던 3.15의거 민주열사를 ‘14열사’로 바꾸는 것도 시급한 일입니다.


-조현대 열사 말고도 또 다른 한 분은 누구인가요?


그렇습니다. 3월 15일 남성동파출소 인근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3년간 병원 치료를 받아오던 중 1963년 11월 22일 결국 숨진 김동섭 열사(28, 무직)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비록 병원 치료 중 나중에 숨졌다 하더라도 직접 사인이 경찰의 발포로 인한 것이라면 당연히 3.15의거 민주열사로 포함해야 한다는 거죠.

3.15의거기념탑 앞 안내물은 여전히 사망자 수를 12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3.15의거 특별법에 따라 진상조사가 다시 시작되는데요. 거기서 사망자가 추가로 나올 가능성도 있을까요?


의지를 갖고 얼마나 열심히 조사하느냐에 따라 추가로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당시 신문보도 등에 따르면 김주열 열사 외에도 실종자가 상당수 있었고, 경찰이 사망자 숫자를 고의로 축소시켰다는 의혹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상자도 당시 아버지가 공무원이었던 경우, 자기 신상에 불이익이 있을 걸 우려해 자녀의 부상 사실을 숨기고 은밀히 치료를 시켰던 경우도 많았고, 이후 마산시가 부상자 조사를 할 때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더욱 철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된 3.15의거의 원흉, 즉 가해자는 누구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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