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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Feb 08. 2022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거창사건'의 진실

거창사건 특별법에 ‘등(等)’ 자가 들어간 까닭


-오늘도 김주완 기자 모시고 역사비화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한국전쟁 당시 대표적 민간인학살 사건인 ‘산청 함양 거창사건’에 대해 알아보신다고요?


네. 흔히 ‘거창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건은 1951년 2월 7일 산청군과 함양군에서 시작됐으니까 어제가 딱 71주기가 되는 날이네요.


이 사건에 관한 법(法) 이름이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인데요. 법 이름에 ‘무리’를 뜻하는 ‘등(等)’이 들어있는 게 좀 특이하죠?


정확한 사건개요를 말하자면, 11사단 9연대 3대대가 2월 7일 산청군 금서면에서 주민 395명을 학살한 후, 함양군 유림면으로 넘어가 거기서 또 310명을 죽입니다. 그렇게 산청 함양에서 총 705명을 학살한 3대대는 이틀 뒤인 2월 9일 거창군 신원면으로 넘어가 11일까지 719명을 학살합니다.


그러니까 3대대가 산청과 함양을 거쳐 거창까지 모두 1424명의 민간인을 아무런 재판절차 없이 총으로 학살한 사건입니다.

(11사단장 최덕신, 9연대장 오익경, 3대대장 한동석 소령)


-그렇다면 ‘거창사건’과 ‘산청 함양사건’이 서로 다른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의 동일사건이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창사건’은 널리 알려져 한국언론은 물론 미국 <뉴욕타임즈>까지 보도됐지만, ‘산청 함양사건’은 한동안 묻혀 있었는데요.


그렇게 된 것은 사건 발생 당시 거창 출신의 신중목 국회의원이 3월 29일 이 사건을 국회에서 폭로하면서 거창의 희생자들에 국한하여 보고했고, 언론도 아예 사건 이름을 ‘거창사건’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해 4월 11일자 <뉴욕타임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창사건에 대한 뉴욕타임즈 보도 영인

-그래도 사건이 그렇게 이슈화했다면, 이후 진상조사 과정에서 산청과 함양의 피해도 밝힐 수 있지 않았나요?


국회가 진상조사단을 보냈지만, 당시 김종원 계엄민사부장이 부하들을 빨치산 복장으로 위장시켜 국회조사단에 공포를 쏘면서 조사를 못하게 한 사건도 있었고요. 이후 4월 23일 이승만 정부가 자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그것 역시 거창군 신원면에 국한시킨데다, 그것마저 터무니없이 축소하여 발표했죠. 


-그랬군요. 그 이후에도 산청 함양사건이 조명될 기회는 없었나요?


네. 한동안 그랬습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이후 잠깐 알려질 기회가 있었지만. 1961년 5.16쿠데타로 또 묻혀버렸고,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 국면에서 전국 23개 대학의 학생대표들과 학보사 기자들이 거창 신원면 합동묘소에 참배를 하고, 전국의 대학신문에 이 사건이 보도되면서 거창사건은 다시 널리 알려졌지만, 역시 산청과 함양은 빠져있었습니다.


1988년에는 거창사건에 대한 책도 두 권이 출간되는데요. <남부군과 거창사건>(차석규 지음), <거창양민학살>(노민영 강희정 기록)이라는 책인데, 여기에도 산청과 함양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십 년 동안 이 사건은 ‘거창사건’으로만 알려져 있게 된 거죠.

산청 함양을 빼고 거창사건만 담은 책

-그래서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때도 ‘거창사건’에만 국한될 뻔 했다고요?


네. 1995년 12월 김영삼 정부 때 비로소 이 법이 발의되었는데요. 민간인학살에 관한 최초의 법이었죠. 그런데 이 법도 애초에는 산청 함양을 빼고 ‘거창사건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었습니다. 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도 몰랐던 거죠.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산청 함양의 유족들이 “왜 우리는 뺐느냐”고 항의하자, 법안 심의과정에서 그제서야 산청 함양 거창 사건이 하나의 동일한 사건임을 알게됐고, 그래서 막판에 법 이름 안에 ‘무리 등(等)’자를 넣어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라고 하자. 그러면 ‘등’이라는 말 속에 산청 함양 피해자도 포함될 수 있지 않느냐, 이렇게 해서 통과되게 되었던 겁니다. 


-그게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래서 산청 함양 피해자들도 이 법에 의해 명예회복이 되었나요?


네. 그래서 거창 신원면에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조성되었고, ‘산청 함양’을 묶어 산청 금서면에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이 따로 조성됐죠.


그러나 아직도 ‘산청 함양 거창사건’이 하나의 동일한 사건일 줄을 모르고 ‘거창사건’만 따로 있는 걸로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면 포털사이트에 ‘거창사건’만 나오고 ‘산청 함양 사건’은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위키백과에도 ‘거창사건’으로만 기재돼 있고요.


그래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차원에서 법 이름부터 ‘산청 함양 거창사건 특별법’으로 바꿔야 합니다.


언론과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내용파악을 못한 채 첫단추를 잘못 끼우는 바람에 이렇게 역사가까지도 왜곡되고 있는 겁니다.

산청군 금서면 추모공원에 있는 산청 함양 거창사건 주범 부조상


-그렇군요. 정치와 언론의 중요성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되네요. 특히 언론은 정치인의 말을 받아쓰기만 할 게 아니라 현장 확인취재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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