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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Mar 16. 2022

박정희에 의해 강제해직된 3008명의 교사들

박정희 독재의 희생자들 1, 끝내 구제받지 못한 교원노조

1960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세력이 가장 먼저 잡아들인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물론 자신의 행위에 반대할만한 사람들이었을 터, 당시의 재야 민주세력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틀 뒤인 18일부터 수천 명의 국민을 체포·구금하기 시작했다.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맹(교원노조)과 전국양민피학살자유족회(피학살유족회), 한국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민족통일학생연맹, 악법반대학생투쟁위원회, 범민족청년회의, 민족자주통일협의회, 통일민주청년동맹, 민주민족청년동맹, 전국학생혁신연맹, 사회당, 사회대중당 등 18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와 간부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군인과 경찰에 끌려갔다. 그 숫자만 무려 2769명이었다.


1960년 마산에서 발족된 한국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당시엔 전국단위 사회단체가 다른 지방에 본부를 두는 경우가 흔했다. 이들도 5.16쿠데타 직후 연행됐다.


체포영장이나 구속영장도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들을 연행하던 때와 똑같은 ‘예비검속’이었다. ‘예상되는 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둔다’는 뜻의 예비검속은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는 국가폭력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이들을 서울의 각 경찰서 유치장에 분산, 장기간 구금 상태에서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를 통해 사형, 무기징역, 15년, 10년, 7년, 5년 등의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이 적용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은 6월 22일, ‘혁명검찰부 및 혁명재판소조직법’은 6월 21일 제정 공포된 법이었다. 즉 불법으로 먼저 잡아다 놓고, 이후 그들을 처벌할 기구와 법률을 뒤늦게 만들어 소급 적용한 것이다. 따라서 법률 자체가 헌법 위반이었다.


특히 교원노조의 피해가 컸다. 형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대표자와 간부들뿐 아니라 3008명의 교사가 교원노조에 가입했거나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강제해직되었다. 1989년 노태우 정부 당시 전교조에서 해직된 1500명보다 두 배나 많은 교사가 교단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들은 이후 복직은커녕 제대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고 진실규명의 길이 열렸을 땐 이미 80대 노인이 되어 있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뒤늦게 이 사건을 조사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데 따르면 해직교원 3008명 중 경남(현재의 부산·울산 포함)이 763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북(대구 포함)과 경기지역이 각 503명과 484명으로 뒤를 이었다. 초등교원은 800개 학교에서 1405명, 중등교원은 666개 학교에서 1603명이 해직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부산 경남지역에서만 600여 명이 체포되어 합수부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다음은 교원노조 경남연합회 이종석 위원장이 진실화해위에 했던 증언이다.


“1961년 5·16직후인 5월 18일 부산시 중구 동광동 경남교원노조연합회 사무실 입구에서 부산중부경찰서 사찰계 형사 2명에 의해 체포이유도 모른 체 연행된 후 …… 부산시 전포동 소재 육군형무소에 이감, 수감되었으며 교원노조 활동을 한 교사들 중에는 부산시 지역에서 200여 명, 경남지역에서 400여 명가량이 체포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체포된 사람들은 …… 합수부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당시 김해농고 교사였던 윤복영 씨도 이렇게 증언했다.


“…… 수업을 중단하고 교무실에 들어가니 이름을 모르는 김해경찰서 정보과 형사 1명이 임의 동행을 요구하여 동행에 불응하자 ‘간단한 조사만 할 것이니 협조해달라’고 하여 당시 김해경찰서로 연행되어 교원노조 설립에 관한 경위에 대하여 조사를 받았으며, …… 유치장에 수감하였습니다. 제가 수감되는 날, 김해경찰서 유치장에는 김해중등교원노조연합회 위원장 서광수, 선전부장 조종택, 김해교원노조초등연합회 위원장 강문중, 부위원장 윤갑철, 사회대중당 김해군위원장 한대섭, 김해피학살자유족회 김상태가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조사 과정에서 엄청난 폭행과 고문을 통해 그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웠다.


“합수부 조사과정에서 잠 안 재우기를 강요당하였습니다. 2~3명의 수사관이 교대로 들어와서 잠을 자려면 깨우고 괴롭혔는데 열흘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경찰과 방첩대 수사관은 ‘이놈이 빨갱이다, 네가 교원노조의 수괴다’라고 하며 구둣발로 정강이를 차고 주먹으로 얼굴(뺨)을 때리곤 하였습니다. 취조하는 형사가 요구하는대로 진술을 안 하면 ‘이놈 빨갱이 제대로 말을 안 하네’라고 하면서 …… 북한의 지령을 받은 사실과 지시한 사람의 이름을 대라고 윽박질렀습니다.”(이종석 증언)


이처럼 쿠데타 세력이 이들에게 뒤집어씌운 혐의는 구체적 범죄사실이 아니라 대부분 ‘용공(북한을 이롭게 한다는)’이었다.


진실화해위는 당시 쿠데타 세력이 법적 근거도 없이 교원노조원들을 징계하라고 지시한 공문도 곳곳에서 찾아냈다. 당시 경남도지사가 각 시군구 교육감과 중고등학교장에게 내려보낸 ‘극비’ 공문(1961년 6월 21일)도 부산전자고등학교(현 부산원예고)에서 발굴됐다. 다음은 공문의 내용이다.


“교원들이 교원노동조합에 가입하므로써 학원의 혼란을 조성하여 교육에 미친 바 영향이 지대하므로 이의 반성을 촉구시킨 바 있으나 최근 정보에 의하면 5·16혁명 후에도 교조에서 탈퇴치 않고 오히려 혁명에 대하여는 극히 냉소적이며 비판적인 태도로 정세를 관망하고 있다는 것은 반공교육의 철저를 기하려는 이때 교원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교조에 가입된 교원들의 정리를 위하여 귀 시·구에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중고등학교에 있어서는 학교장이 다음 요령에 의하여 심사한 후 7월 5일까지 보고할 것.”


이 공문은 심사위원회 구성을 교육감과 학무과장, 서무과장, 장학사, 중심학교 교장, 일반인 1명으로 하도록 하는 한편 A, B, C의 3급으로 심사하되 ‘A급은 구속된 자 또는 처벌받은 자, B급은 노조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한 자, C급은 외부의 권유에 못 이겨 가담되었으나 전혀 활동을 하지 않은 자’로 분류토록 하고 있다. 처리 방법은 ‘A·B급은 심사하여 파면한다’, ‘C급은 교장 또는 확실한 사람의 보증을 받고 계속 근무토록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50여 년 만에 강제해직과 불법 체포·구금의 진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이후에도 피해자들은 국가로부터 사과와 명예회복,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구제할 법률이 따로 제정되지 않아 개별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재심 청구를 하고 무죄 판결을 받아낸 후, 다시 손해배상 소송을 거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엔 여전히 억울한 국민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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