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독재의 희생자들 2
1961년 5.16 군사반란을 일으킨 박정희는 다음날인 17일 아침 8시 30분 육군 방첩부대장 이철희(준장)를 육군본부로 불렀다. 그리곤 이런 명령을 내렸다.
“즉시 군 수사기관을 동원, 경찰이 갖고 있는 ‘리스트’에 근거해 용공분자들을 색출하라.”
그가 말한 ‘리스트’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는 1961년 5월 18일 주한 미국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으로 짐작할 수 있다. “쿠데타 세력이 당시 한국 정보기관들이 갖고 있던, 전쟁이 발발하면 자동적으로 체포해야 할 명단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승만 정권 때 만들어놓은 ‘요시찰인 명부’였던 것이다.
체포 대상에는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학살로 가족을 잃은 유족회 간부들도 대거 포함됐다. 전국유족회장 겸 마산유족회장 노현섭, 창원유족회 김봉조, 통영유족회 탁복수, 동래유족회 문대현 송철순, 대구유족회 이원식, 경북유족회 권중락 이삼근 이복녕, 경주유족회 김하종 김하택, 금창(金昌 : 김해와 창원을 뜻함)장의위원회 김영욱 김영봉 방영조, 밀양장의위원회 김봉철, 거창유족회 문병현 등이 영장도 없이 연행되었다.
이들이 법적 근거도 없이 불법 구금되어있는 동안 바깥에서는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위령비가 훼손되는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쿠데타 직후 경남도지사를 겸하고 있던 최갑중 36사단장은 거창 유족들에게 7월 30일까지 시한이 명시된 ‘개장명령서’를 발송했다. 그러나 시한보다 45일이나 앞선 6월 15일, 거창 민간인학살 희생자 517명의 유골이 합장돼 있던 신원면 박산골에 경찰과 인부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합장묘를 파헤치고 비석은 정으로 쪼아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한 후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 파헤쳐진 합장묘는 1954년 유족과 주민들이 여러 곳에 방치돼 있던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습하여 조성된 것이었다.
김해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1960년 김영욱 김영봉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금창피학살자합동장의위원회’는 6월 중순 김해읍과 진영읍 일대, 그리고 창원군 일부지역에서 한국전쟁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골을 발굴해 진영읍 포교당에 임시 안치했다. 6월 25일 포교당에서 발인식을 한 후, 진영역전에서 유족과 일반시민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별식을 거행한 후 유골을 선두로 약 10여 리에 달하는 진영읍 설창리 고개까지 행진, 국도변에 합장묘를 설치했다.
이곳에도 쿠데타 세력의 지시를 받은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인부들을 모두 동원해 합동묘를 파헤친 후 유골을 아예 없애버렸다. 한 희생자의 유족은 2008년 노무현 정부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합장묘를 파헤친다는 소식을 듣고 묘 터에 갔는데, 출입을 통제하여 현장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으며, 입구에서 만난 진영읍내의 지게꾼 박 씨로부터 ‘읍내 지게꾼들을 모두 동원하여 (합장)묘 개장작업을 하고 있다’, ‘유골은 화장해서 광목자루에 넣어서 저 낙동강 물에 가서 띄울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시라’고 하여 돌아왔다가, 다음날 새벽에 다시 가니까 파헤쳐진 무덤 구덩이엔 바위를 밀어 넣었으며 개장작업을 하던 인부들은 모두 떠나버리고 없었습니다.”
동래유족회가 800여 구의 유골을 수습해 부산 연제구 거제동 화지산에 조성한 합동묘와 추모비도 마찬가지였다. 쿠데타 직후 체포됐던 송철순 씨는 2008년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복역 후 출소한 후 합동묘 인근에 가서 주민에게 합동묘가 없어진 사유를 물으니 ‘5.16 이후 어느 날 새벽에 정복 차림의 경찰관들이 합동묘 주위 경비를 하고 사복형사들은 인부들을 지휘하여 묘소 철거작업을 했으며 자신도 일급을 받고 묘소 철거작업에 동원되었다’고 얘기한 것을 들었습니다. 묘소에 있던 추모비도 자신과 인부들이 망치와 정으로 잘게 깨어 거제역의 동해남부선 철로에 버렸고, 유골은 푸대자루에 담아 당감동 화장터로 가져가서 화장하여 분쇄한 후 근처 산에 뿌렸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 쿠데타 직후 연행됐던 유족회 간부들은 어떻게 됐을까? 소급입법으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을 만들어 사형, 무기징역, 15년, 10년, 7년, 5년 등의 중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이 판결문이 황당하다.
“… 보련원(국민보도연맹원) 및 국가보안법 기미결수의 피살은 불법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을진대 … 유족회의 성격과 그 활동결과에 대하여 북한괴뢰가 간접침략의 한 방안으로서 기대하는 그들의 동조자의 확대 및 조직강화 그 사상선전에 동조하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음에 ….”(경상남북도피학살자유족회 사건)
쉽게 말하면 판결의 요지는 ‘국가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불법이라 하더라도, 그 불법학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북괴에 동조하는 행위다’라는 뜻이다. 정말 세계적으로 길이 남길만한 희한한 판결문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동래유족회 사건 판결문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6·25 동란시에 대한민국 군·경찰에 의해 작전상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익분자가 아니라는 근거없는 망언과 재판절차 없는 사형집행이 부당하다는, 당시의 전국(戰國)을 망각한 편견에 사로잡혀 ….”
‘재판절차 없는 사형집행이 부당하다’는 게 ‘편견’이라고 못박는 판결문, 사법부가 사법절차를 부정하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일당은 왜 이렇게까지 한 걸까? 박정희가 쿠데타 직후 설치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제사법위원장이었던 이석제의 회고록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를 통해 그 의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
“5.16혁명 직후 … 미국이 박정희 장군과 김종필 예비역 중령의 배경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 미국의 사상 공세를 일거에 역전시키고 군사혁명의 성공을 결정하는 비상한 조치가 필요하여 보도연맹원 등 좌익사상범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반공에 대한 의지를 미국에게 보여주자 ….”(진실화해위원회, ‘5.16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사건 진실규명결정서’에서 재인용)
한마디로 정당성 없는 쿠데타를 합리화하고 미국에게 인정받기 위해 유족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고백이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학살로 가족을 잃었던 유족들은 4.19혁명 직후 진상규명을 요구하였으나, 이듬해 5.16쿠데타 세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러 노무현 정부가 발족한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기회를 얻었지만, 미처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명박 정부 들어 위원회는 와해되고 진실은 또다시 봉인되었다.
다행히 문재인 정부에서 2021년 어렵게 재가동을 시작한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된다. 지금이라도 전쟁이나 쿠데타 같은 준전시 상황이 벌어지면 과거 정권이 만들어놓은 ‘리스트’, 즉 요시찰인 명부에 의해 졸지에 끌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바로 내가 그 대상 중 한 명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