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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Mar 18. 2022

독재치하 고문의 강도는 어느 정도였을까?

박정희 독재의 희생자들 3. 서광태와 방배추의 경우

부마민주항쟁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독재 세력을 붕괴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직후 수천 명의 정당·사회단체 간부들을 영장 없이 체포해 없는 죄를 덮어씌웠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감금, 고문, 살해했다. 그 시절 끌려갔던 사람들은 어떤 일을 당했을까?     


마산 출신 의과대학생 서광태 씨


서광태라는 스물네 살 청년이 있었다. 경남 마산시(현 창원시) 창동 출신으로, 1975년 당시 서울대 의대 본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1월 29일 등교하던 중 학교 강의실 앞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육군 보안사 소속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1975년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극에 달했던 시기로 조작된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도예종 씨 등 8명이 4월 9일 전격 사형을 당했고, 4월 11일에는 서울대생 김상진 열사가 폭압에 항거,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해였다.


국민 반발이 심해지자 5월 13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제9호를 공포했다. 집회·시위는 물론 유신헌법에 대한 부정·반대·개정·폐지 주장을 일절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서울대 학생 1000여 명은 5월 22일 관악캠퍼스에서 ‘김상진 열사 추도식’을 열고 시위를 벌였다.

1975년 11월 22일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대해 언론에 브리핑하는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이런 분위기 속에서 11월 22일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김기춘(이후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을 했던 그 김기춘 맞다)은 이른바 ‘재일교포유학생간첩사건’을 발표한다. 마산 출신 서광태가 29일 끌려간 것도 이 사건 수사의 연장선으로 ‘서울의대간첩단사건’이라 불렸다. 연행된 학생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울대 의대 : 강종헌 서광태 전성환 황혜원 황승주 진관보 정필현 이인수 송군식 장우환 전영훈 이근우 △서울대 문리대 : 나병식 △고려대 : 박종열      


끌려간 서광태가 집중 추궁을 받은 것은 ‘서울의대 유학생인 재일교포 강종헌이 간첩인데, 그의 지시로 간첩행위를 한 사실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보안사 수사관들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다. 다음은 서광태가 손글씨로 꾹꾹 눌러 쓴 대법원 상고이유서 중 일부다. 좀 길지만 독재 치하의 공안기관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인용한다.


“75년 11월 29일(토) 오전 9시 10분, 10여분 늦게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가방을 들고 강의실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는 수사관님들을 따라 나서서 서울역 부근의 모처 지하실에 도착 즉시, 무수한 폭행에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고, 이를 씻은 핏물을 마시우는 등의 무시무시한 공포분위기와,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지만, 무릎을 꿇려 앉히고는 그 아래 박달나무 곤봉같은 나무를 집어넣고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워커발로 허벅지 위를 짓밟는 통에 기절하였음은 물론, 정강이 아래는 피투성이가 되고 나무마저 자근동 부러졌습니다. 옆방에서도 찢어질 것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고문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본인도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 누르는 등의 무수한 육체적 고통이 가해졌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무수히 많은 수사관님들이 차례로 들어와서 감시하는 통에 계속해서 한 주일 이상을 거의 자지 못한 데서 오는 불면의 고통과, ‘면도칼로 살껍데기를 벗기겠다. 빨갱이는 삼족을 멸하니 너하나 쯤이야…’라는 그 지하실의 전율할만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들이었습니다.
…(중략) “강종헌이 알지” “잘 모릅니다” “야, 이새끼야 , 왜 몰라!” “….” 무수한 폭행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하고 화장실에 가니, 또 다른 나의 벌건 선혈이 뚝뚝 바케스째 기다립니다. 얼핏 거울을 보니, 피에 뜯긴 해골이 짓이겨져 있습니다. 수직으로 거꾸로 세워서 팔굽혀 펴기를 시킵니다. 못먹고 잠도 못잔 해골에 피가 몰려 쓰러지면, 기다리는 것은 즐거운 발길질입니다.
…(중략) 그리고 옆방에서 교포학생이 계속 고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독하던 서투른 한국말의 고문소리도 점점 낮아집니다. “이 새끼 이북에 갔다 왔지” “아닙니다” “….” 항거하던 어린 참새도 이젠 날갯죽지가 쭉쭉 찢어지고, 사지에 넣어 비틀던 지렛대가 부러졌나 봅니다.” 
서광태의 항소이유서 중 일부


독재의 하수인들은 병원의 간호사까지 동원하여 간첩임을 인정하는 자백을 유도한다. 

 

“얼마 후 병원입니다. 정신이 들락말락 하면, 무슨 신문에 북괴라고 쓴 옆에다 별표(인공기 표식-필자 주)를 하여 다시 간첩이라는 망상에 빠지게끔 세뇌하였습니다. 백의의 천사님이 오셔서 부릅니다. 조용 조용 말씀하십니다. … (평범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 (느닷없이) ‘자수하셔요….’ 육감적입니다. 전혀 기억이 희미합니다. … 이제는 간첩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 자수하자. 내가 이북에 갔다 왔나 ….’”   

  

의대생인 그에게 의료기기를 이용한 살해공포를 주입하기도 한다. 

 

“병원에 끌고 가서는 큰 주사기에 소바늘 만 한 바늘을 끼고는 왼쪽 혈관에다 직각으로 꼽고 쑤셔 넣기 시작했습니다. 주사를 놓기 전에 그들은 터무니없이 Arrhythmia(부정맥-필자 주)라고 진단을 내려놓았습니다. 죽이는 거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죽여라, 차라리 죽여라. 차라리 죽고 싶다― 지금 왼쪽 Median Vein(혈관의 일종-서광태 주)을 만져보니 폐쇄되어 있습니다.”     
서광태의 항소이유서 중 일부


이렇게 하여 없는 간첩을 만들어낸 독재의 하수인들은 이들 학생을 국가보안법상 간첩죄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했다. 하지만 강종헌만 간첩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고, 서광태는 긴급조치 위반만 적용,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79년 10월 박정희가 죽은 후 석방됐다. 긴급조치 9호가 실효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이후 복학하여 의사의 꿈도 이루게 된다.


간첩죄로 사형수가 되어 복역 중이던 강종헌도 6월항쟁 이후인 1988년 감형으로 석방됐고,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재심 권고에 이어 2015년 대법원 재심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다.


과연 1979년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이 없었다면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의사가 되기는커녕 서광태의 삶은 철저히 망가졌을 것이고, 강종헌도 끝까지 간첩죄를 덮어쓴 채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최고의 주먹 방배추 어른도 피해가지 못한 고문


나에게 고문이 얼마나 사람을 망가뜨리는지 실감케 해준 사람이 있다. 지난 2015년, 지금은 고인이 된 양산 효암학원 채현국 이사장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 또는 백기완 황석영과 함께 ‘조선 3대 구라’로 불리는 방배추(본명 방동규, 1935년생) 어른을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다.

아래 위 의치를 꺼내 보여주고 있는 방배추(동규) 어른


그는 박정희 치하인 1974년 강원도 철원에서 원시공동체와 공동분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느메기밭’을 개간하던 중 ‘김일성과 교신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혐의로 대구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엄청난 고문을 당한 후 간첩 누명을 쓰고 6개월을 복역했다.


또한 1986년 전두환 치하에서도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태홍의 도피를 도왔다는 이유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두 번의 고문 결과는 이렇게 나타났다.


“몸이 으스러지고 만신창이가 되었지. 어느 정도였냐면, 고문 후유증으로 위아래 이가 다 빠져버렸고, 쩍 하고 벌어져버린 항문이 도무지 닫히지 않는 거야. 항문이 풀렸다는 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는 얘기지. 몇 개월 동안 아내는 내 곁에 붙어 똥오줌을 받아내야 했어.” 


그는 아래위 의치를 꺼내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40대부터 이렇게 의치로 살아왔어. 이게 다 박정희 전두환 때문이야.”

   

나도 사실은 치아가 좋지 않다. 하지만 지금 나는 50대 후반이다. 잇몸이 아리거나 치과에 갈 때마다 방배추 어른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모두 그분들에게 빚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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