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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Mar 21. 2022

박정희 영구집권의 제물이 된 ‘인혁당 재건위’ 사람들

박정희 독재의 희생자들 4

부마민주항쟁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독재 세력을 붕괴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직후 수천 명의 정당·사회단체 간부들을 영장 없이 체포해 없는 죄를 덮어씌웠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조작 사건을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감금, 고문, 살해했다. 그 중 대표적인 조작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사건이었다.


1975년 4월 9일 이후 강순희(당시 42세) 씨는 신문에 박정희의 얼굴이 나올 때마다 찢어서 입안에 넣고 씹은 후 “퉤!” 뱉었다. 남편의 묘소에 갈 때마다 절을 올린 후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살인마 박정희는 천벌을 받아라! 살인마 박정희는 천벌을 받아라! 살인마 박정희는 천벌을 받아라!” 


한 번 외치면 안 들어줄 것 같아 이렇게 꼭 세 번씩 외쳤다. 꼬박 5년간 씹고 외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저주가 하늘을 움직였는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우홍선 씨의 부인 강순희 씨가 1974년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사진은 이들의 구명활동을 돕던 외국인 선교사가 찍었다


강 씨는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우홍선(당시 45세) 씨의 아내였다.


나는 2000년 10월 22일 뜻밖의 장소에서 또 다른 인혁당 희생자의 유족을 만난 적이 있다. 경남 거창 민간인학살 위령제 현장에서 만난 분은 우홍선 씨와 함께 사형됐던 도예종(당시 51세) 씨의 아내 신동숙 씨였다. 신 씨는 72세의 나이에도 인혁당뿐 아니라 인권문제와 관련된 일이라면 전국으로 뛰어다닌다고 했다. 거창 위령제에 참석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렇게 남편을 잃은 아내들은 인권운동가가 되었다.

8명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자 가족들이 울부짖고 있다.


앞서 1972년 10월 18일 박정희는 군대를 동원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선포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박정희가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영구집권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하고, 원하면 몇 번이든 다시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또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직선제를 없애고, 대통령이 의장을 맡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게 했다.


이런 유신헌법과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1973년 10월부터 시위 등을 통한 박정희 정부의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이 본격화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유신헌법 51조를 근거로 1974년 1월 긴급조치 1·2호를 공포한다. 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개정·폐지 주장 등을 일절 금지하고, 위반 시에는 영장 없는 체포·구속·압수·수색 가능, 긴급조치 위반에 대한 재판은 군법회의에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1974년 4월 3일에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관련 가입·활동 등 모든 행위와 학교 내외의 집회·시위·농성 등 일절 금지하고, 위반자는 최고 사형에 처하는 내용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을 주축으로 한, 정부를 전복하려는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규정하고, 이와 관련하여 긴급조치 제4호 및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1024명을 영장 없이 체포, 그중 253명을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했다.


문제는 어린 학생들이 이런 정부 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믿는 국민이 별로 없었던 것. 독재정권은 학생들을 배후조종했다는 어른들 조직이 필요했고,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만들어낸다. 북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이 민청학련을 지휘했다는 구도였다.


그렇게 1974년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인혁당 지도부가 된 사람은 23명. 1975년 4월 8일, 이들 중 8명에게 사형이 확정됐고, 7명은 무기징역, 나머지는 징역 15~20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이렇게 대법원 선고가 난 뒤 하루도 지나지 않은 4월 9일 새벽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사형된 8명 중 5명은 경남 출신이고, 3명은 대구·경북 출신이다.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도예종, 하재완, 여정남, 송상진
△김용원=1935년 경남 함안군 군북면 수곡리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경기여고 교사
△도예종=1924년 경북 경주군 경주면 서악동 출생. 대구대 경제학과 졸업. 삼화건설 회장
△서도원=1923년 경남 창녕군 대합면 신당리 출생,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송상진=1928년 경북 달성군 공산면 백악리 출생. 대구대 경제학과 졸업. 양봉업
△여정남=1945년 대구 중구 전동 출생. 전 경북대 학생회장
△우홍선=1931년 경남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 출생.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이수병=1936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생, 부산사범·경희대 졸업. 삼락일어학원 강사
△하재완=1931년 경남 창녕군 이방면 안리 출생, 단국대 졸업, 건축업


또 이들 8명 외에 사형당하진 않았지만 유진곤(1937년생) 씨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8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으나 옥중생활 후유증으로 숨졌다. 장석구(1927년생) 씨도 <평화신문>과 <대구일보> <민족일보> <대구매일신문> 기자 출신으로 구속돼 75년 10월 옥사했다.


박정희 독재는 사법살인도 모자라 시신도 유족들에게 제대로 인도하지 않았다. 유족들은 형장에서 나온 시신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의 도움으로 서울 응암성당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정권은 서울 이외 지역 거주자의 시신은 서울에서 가족에게 인도하기를 거부하고, 각 거주지 시립병원으로 실어 보냈다. 송상진 씨의 시신만은 어떻게든 성당으로 옮겨 안치하려 했으나 유족과 신부, 목사 등이 경찰 300~400명이 대치 충돌한 끝에 시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송상진, 여정남 두 사람의 시신은 끝내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경찰이 벽제 화장터로 싣고 가서 화장 처리해버린 것이다.


1974년 당시 민청학련 사건 한양대 총책으로 끌려가 서울구치소에서 인혁당 사형수들과 4개월쯤 함께 수감되어 있었던 이상익(경남 함안군 새길동산노인요양원 원장) 씨는 “인혁당 관련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이유로 붙잡혀 왔는지도 모르더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있던 방과 사형당한 우홍선 선배가 있던 방이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위치였다. 서로 창살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거리였다. 그때 수화로 얘기를 나눴는데, 우홍선 선배에게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더라. 우홍선 선배는 정말 이유를 몰랐다. 당시 다리가 매우 불편했고 매우 선한 얼굴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 사건에 대해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으로 판명했다. 이어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도 2005년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그해 법원이 재심을 받아들여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은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 8인에 대하여 최종 무죄를 선고한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죄 없는 국민을 살해한 박정희의 죄상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빚진 사람이 너무 많다. 세월이 흘러도 그들을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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