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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에게 해피엔딩 Nov 05. 2022

어쩌면 지금까지 난 스위스 시차로 살았던 걸지도.

3. 취리히와 10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스위스의 새벽형 인간 탄생

최초 눈 뜬 시간은 새벽 3시 40분(한국시간 오전 11시 40분)

다시 눈 뜬 시간은 새벽 4시 40분(한국시간 오후 12시 40분)

잠을 푹 잔 것 같지는 않은데 정신이 맑은 것 같아 그냥 눈을 뜨기로 한다. 평소 집에서라면 상상도 못 할 일. 내가 새벽에 눈을 떴는데 정신이 맑다고?

어쩌면 시차 덕분에 정신이 맑은 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스위스 시간 새벽 4시면 한국 시간으로 12시니까 한국에서 내가 늘 일어나는 시간인 거지. 즉,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서 늘 스위스 시차로 살고 있었던 거고, 드디어 내 생체리듬에 맞는 시차를 만나게 된 거 아닐까? 만약 내가 스위스에서 태어났다면 엄청난 새벽형 인간이었을 텐데!


뭐 이런 터무니없지만 왠지 신빙성 있는 생각과 함께 누워서 오늘 돌아볼 취리히의 명소들을 구글 지도로 찍어본다.

오늘은 오전에 호텔 체크아웃 전까지 2시간 정도 취리히 올드타운을 중심으로 걸으면서 둘러본 후 오후에 루가노로 향할 예정이다. 취리히에서 짧게 묵는 이유 중 한 가지는 10년 전 후배와 함께 돌아다녔던 취리히의 명소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누워서 이것저것 보다 보니 6시가 다 되어가길래 일어나기로 한다. 그리고 씻기로 한다. 벌써? 한국에서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태다. 정말 나 스위스에 살아야 하는 거 아닌지… 인생의 후반기인 42세부터 43년을 스위스에 살았다는 헤르만 헤세처럼… 나도…?


취리히, 다시 만나 반가워.

여유롭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고 조식을 천천히 한 시간 동안이나 먹고(한국에 있는 친한 후배에게 조식 상황을 생중계하며) 배를 든든히 채운 후 9시에 호텔을 나섰다.

구름이 많이 낀 흐린 날씨였지만 춥지는 않고(정말 서울이랑 날씨가 비슷하다)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다(스위스라서 용서되는 날씨일 수도).

우중충함이 느껴지지만 스위스라 좋지 아니한가!

10년 전에는 스위스 여행 마지막 날 취리히에 왔었다. 오스트리아로 넘어가기 전에 취리히 공대를 다니고 있는 후배를 만나서 후배의 가이드로 오후 2시부터 9시까지 약 7시간 동안 이것저것 알차게 많은 명소들을 봤었는데 오늘은 오전만 볼 예정이니 그때 그 명소들은 잘 있는지 확인만 하고 새로운 곳도 가보자.


먼저 오페라 하우스, 우리나라의 예술의 전당 같은 느낌인데 솔직히 예술의 전당이 더 멋있다. 오페라 하우스를 찍고 건너편 호숫가에서 사람이 오면 달려드는 신기한 오리들을 만나고, 그로스뮌스터 대성당(10년 전에는 성당 안에 들어가서 2CHF를 내고 종탑을 올라갔었는데 장관이었다), 율리히 췽글리(유명한 종교개혁가라고 한다) 동상을 만나고, 호수를 건너 프라우뮌스터 수도원(10년 전에는 안에 들어가서 샤갈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봤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가 있다는 성 페터 교회의 큰 시계를 만나고(그때처럼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듣고, 린덴 호프에 올라가서 취리히 전경을 감상하고(여전히 멋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인 듯한데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나만 변했구나.

오페라 하우스
그로스뮌스터 대성당
율리히 췽글리 동상, 성페터 교회의 시계, 린덴호프에서 보는 취리히
너무 우중충해보여서 카메라의 필터를 적용해 몇 장 찍어봄

반호프거리를 걸으며 후배와 갔었던 슈프링글리 가게를 지났다. 그때는 들어가서 선물용 초콜릿도 사고 초콜릿 케이크와 카푸치노를 마셨었는데 오늘은 시간도 많지 않고 혼자여서인지 선뜻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초콜릿’이라는 것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걸지도 모르겠다. 가령 이젠 초콜릿을 먹으면 살이 쪄서 기피하게 되었다거나 이제 더 이상 단 거를 좋아할 만한 어린 나이가 아니라거나…

그리고 그때는 후배가 다니는 취리히 대학교를 올라가서 멋진 야경을 보고(야경 맛집이었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니더 도르프 길을 걸으며 길거리에서 파는 글루바인이라는 와인도 사서 마셨었는데, 오늘은 이래저래 시간이 적절치 않으므로 패스하고 대신 스위스 국립 박물관을 가기로 한다(물론 박물관 안에 들어가지는 않을 예정)

그런데 걷다 보니 점점 해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날씨가 우중충했던 건 혹시 내가 관광을 너무 빨리 시작해서인가? 스위스도 나처럼 여유롭게 관광을 시작해야 하는 도시인가? (자꾸 스위스랑 나를 껴맞추고 있는 중)  


취리히 중앙역을 통과해서 스위스 국립 박물관으로 가는 길이 너무 예쁘다.

스위스 국립 박물관 가는 길(역시 필터 적용)

그렇지, 나는 이런 걸 좋아하지. 여행지에서 대단한 건물이나 유명한 장소를 만나는 것보다 그 도시의 따뜻한 햇살과 자연을 느끼는 걸 좋아하지. 여행을 왔다고 특별한 무언가를 하기보다 그냥 그 도시에 살았던 사람처럼 일상을 보내듯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스위스 국립 박물관 뒤 platzspitz 공원

그래서 공원을 걷고 또 걷다가 더 걷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호텔로 돌아와서 짐을 챙겨 루가노행 기차를 타기 위해 취리히 중앙역으로 향했다.

스위스에서 열차를 타는 것은 꽤나 신나면서 꽤나 떨리는 일이다. SBB앱이나 기차역 시간표에 나와있는 시간과 플랫폼 번호가 너무 정확해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잘못 탈 일도, 실수할 일도 없어서 신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플랫폼을 잘 찾아서 잘 탈 수 있을까, 환승을 잘할 수 있을까, 헤매지는 않을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에.

루가노 가는 열차를 탈 8번 플랫폼

열차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아서 플랫폼 앞에서 바나나를 먹는데 이렇게 밖에서 무언가를 먹어본 게 얼마만인가 싶다.

그런데 스위스는 젊은이나 어른이나 왜 이렇게 담배를 많이 피우는 건지… 담배연기에 몇 번을 질식할 뻔 했다. 내가 보기엔 이렇게 살기 좋은 나라가 어디 있나 싶은데 이들도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많은 건지, 아니면 그냥 멋으로 피우는 건지, 스위스 담배는 다른 나라 담배보다 맛이 있어서 그런 건지(아 이 지독한 스위스 사랑 같으니라고), 아니면 이 좋은 공기와 자연을 가진 자들의 여유인 건지!

여하튼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이렇게나 늙었는데 취리히는 그대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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