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혹은 엄마의 자리

by 차가운 열정

처음 신혼집은 다 내 방이었다.

내 침대와 내 화장대와 내 옷장이 있는 침실, 내 책상과 남편 책상이 나란히 붙은 서재, 내 사계절 옷들과 지금 입는 옷이 정리된 드레스룸, 내 티브이와 내 소파, 내 식탁과 내 주방, 내 화장실, 물론 남편과 함께이긴 했지만, 무엇이든 내가 중심이 되어 내 마음대로 꾸미고 나를 위해 준비된 내 공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신혼집에 서서히 작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남편이 조금씩 자기 영역을 확보했다. 서재는 주로 남편이 들어가 있었고, 나는 주로 소파에서 책을 읽었다. 베란다에는 남편의 운동기구가 하나씩 들어왔고, 주방에는 내 취향의 예쁜 그릇이 들어왔다. 남편은 화장실을 오래 사용하는 편이었고, 나는 옷방을 오래 사용하곤 했다. 우리는 사이좋게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혹은 침범하지 않으며 자기 자리를 더 굳건히 다져나갔다.


그러다 첫 아이가 태어났다.

침실에는 아이 침대가 들어왔다. 아이를 위한 모기장을 두르고 모빌을 달았다. 내 화장대는 옷방으로 밀려났다. 옷방의 옷들은 일부 처분했고, 박스에 담긴 옷들은 베란다로 밀려났다. 베란다에 있던 남편의 운동기구는 서재에 비집고 들어갔다. 주방에는 아이 젖병, 소독기, 이유식 용기, 이유식 전용 냄비, 전용 도마, 전용 칼, 전용 믹서기 등등으로 살림이 두 배가 되었다. 아이 전용 삶는 세탁기가 들어오고, 욕실에는 아기 욕조와 목용용품이 들어왔다. 27평 아파트에 아이는 자기 물건들과 함께 그렇게 갑자기 나타났다.


하드웨어뿐만이 아니다.

책꽂이에는 삐뽀삐뽀 119를 비롯한 온갖 육아 기본서들이 자리를 차지해나가기 시작했고, 냉장고에는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유기농 식재료가 들어섰다. 아토피가 있는 아이를 위해 내가 좋아하던 계란도 밀가루도 우유도 다 끊었고, 거의 사찰 음식 전문점같이 밥상을 차렸다. 세제도 친환경으로 바꾸고 이불도 오가닉 순면으로 교체했다. 털이 붙은 인형이나 카펫은 다 퇴출시켰다. 내 일기장에는 아이의 자라 가는 모습이 기록되었고, 카메라에는 내 모습이 사라지고 아이의 모습만 빼곡하게 담겼다. 내가 좋아하던 시끄러운 음악도 대중가요도 귀여운 동요와 잔잔한 클래식으로 바뀌었다. 내 눈코입귀 손발 모두가 다 나로부터 스스로 잊혀갔다.


그 와중에도 나는 단 한 가지를 지켜나가려고 애썼다.

그것은 바로 내 책상이다. 그리 큰 덩치는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쫓겨다니면서 눈칫밥을 먹었다. 하지만 그 녀석의 행랑살이는 그리 길지 못했다. 거실 한쪽 구석 책꽂이 사이에 웅크리고 있던 내 책상은 둘째의 탄생과 더불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버렸다.


나는 괜히 좀 울었다.

이게 뭔가, 싶었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그 책상에서 아이 낳을 준비를 하고, 아이를 기를 정보를 찾아보며, 아이에 관해 기록하고, 아이의 사진을 정리했다. 아니, 그 이전에 그 책상에서 나를 기록했고, 나를 채워나갔고, 나를 위해 공부했다. 아니, 또 그 이전에 그 책상에서 나는 결혼을 준비했다. 그 이전에 그 책상에서 취업을 준비했고, 그 이전에 그 책상에서 입시를 준비했고, 그 이전에 그 책상에서 취학을 준비했고, 그 이전에 그 책상에서 내 꿈을 그렸다. 그렇다. 나는 7세부터 그 책상을 사용했고, 스티커로 꾸미기도 했고, 책상 서랍 안쪽에 그림도 그렸고, 책상 위에서 서투른 흠집을 남기며 공작놀이도 했다. 내 책상은 내 친구였고 선생님이었고 부모님이었고 심지어 알 수 없는 꿈을 꾸는 내 미래였다.


그런 내 책상이 사라졌다.

더불어 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사라졌다. 그래서 한동안 멍했다. 두 아이 물건으로 집안이 넘쳐나기 시작하자, 도저히 오래 묵은 그 책상을, 결혼하기 전부터 애착을 가지고 사용해온 그 책상을, 신기할 정도로 너무나 튼튼해서 아쉬울 것 없이 앞으로도 쭉 사용할 수 있을 법한 그 책상을, 일단 포기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아쉬울 줄 모르고. 이렇게까지 당황할 줄 모르고. 당장 그 책상에 앉을 시간적 공간적 정신적 체력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올해 둘째가 열 살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내 책상이 없다. 지금 우리 집 세 개의 방들에는 각각 책상이 하나씩 들어가 있다. 첫째 아이 방에는 첫째 아이의 책상이, 둘째 아이 방에는 둘째 아이의 책상이, 그리고 안방에는 남편의 책상이 방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식탁에서 이 글을 쓴다. 이 식탁은 처음에는 주방에 있다가, 거실 중앙으로 옮겨진 후, 지금은 베란다 창문 쪽에 붙어있다. 창밖의 햇살과 바람을 내다보며 가장 뜻밖의 장소에서 가장 뜻밖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식탁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올 때 말고는 이 식탁에서 거의 밥을 먹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2인용 식탁을 끌어다 우리 식구들 셋, 또는 넷이 둘러앉아 먹는다. 이 4인용 식탁은 베란다 창에 붙어 항상 화분, 커피, 읽던 책들이 아무렇게나 올려진 채로 나를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나만의 공간은 아니다. 언제든 아이들이 앉아 책을 읽고, 보드게임을 하고, 간식을 먹고, 놀던 장난감을 아무렇게나 올려두기도 한다. 그냥 일종의 유휴공간이라고나 할까?


내 낡은 책상과는 사뭇 다르다.

어떤 애착도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냥 지나가는 자리. 내가 자리매김하기엔 너무나 열려있는 자리, 누구든 언제든 손쉽게 앉았다가 일어나는 자리. 내 책상이 사라지고 나서 내가 앉는 자리는 아이들 놀이 매트, 아이들 책상 옆, 또는 이런 식탁이 되어갔고, 점차 어디에 앉든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책상에서 내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했던 내가 집안 곳곳 어디에서나 필연적으로 내 눈코입귀 손발을 확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 책상에서 홀로 잠잠히 이루었던 나만의 고요한 시간은 설거지나 청소로 시끄러운 중에도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책상에서 기도로 만났던 신을 아이들 눈 속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가 앉는 곳이 내 책상이다. 흘러가는 모든 시간이 다 내 책상이다.

아무렇게나 내 책상^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