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존엄에 관한 고찰1

실존 탐구 보고서

by 차가운 열정

천부 인권설이 있다.

이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다. 태어나는 순간,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 혹은 자명한 존엄성. 나의 존엄은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동전의 양면처럼, 생명이 있다면 반드시 같이 갖게 되는 신성불가침의 것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스럽다. 과연 나에게 존엄이 있는지. 그러면서 인간의 이성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규명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내가 누구이고 왜 존재하는지, 나라는 한 인간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나의 나다움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나는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문제에 대한 최초의 고민은 6세 때였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고민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기억하지 못하므로, 우선은 6세 때인걸로. 아마 막내가 태어나면서 남아선호사상을 신앙처럼 떠받들던 할머니와 드디어 아들을 낳고 큰 책임을 다한 엄마의 안도 속에서 느낀 본능적인 고뇌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뭐지? 왜 태어났지? 나의 존재 의미는 뭘까?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나? 내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는 내 존엄성에 대한 탐구이다. 이 최초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꽤 긴 세월 동안 찾아헤매었다.



6세가 찾아낸 좋은 방법은 칭찬받는 것이었다.

칭찬받는 순간, 나는 존재 의미가 선명해졌다. 아, 나는 이런 면에선 좀 쓸만한 인간이구나. 제법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로구나. 가족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구나. 막내를 돌보기 바쁜 엄마를 위해 둘째와 많이 놀아준다든지. 집안일 거드느라 바쁜 할머니의 잔심부름을 하러 뛰어다닌다든지. 아무도 신경써주지 못하는 마당에 묶인 강아지를 산책시켜준다든지. 글자를 깨치고 책을 읽는다든지. 이런 행위들이 가져다주는 소소한 칭찬들을 먹고 살면서 점점 더 많은 칭찬을 받기 위한 몸부림이 피아노로 공부로 이어졌고 사춘기가 오면서 더 이상 칭찬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며 스스로의 존엄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칭찬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는 이제 무엇으로 존재할지 새로운 고민에 휩싸였다.

더 이상 피아노도 공부도 아니다. 이제 나는 친구들의 관심 속에서 존재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내가 먼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종종 나의 관심사는 그들의 관심사와 달랐으므로. 나는 개와 고양이에 관심을 가질 때 그들은 이성 친구에 관심을 가졌고, 내가 만화책에 푹 빠져있을 때 그들은 tv드라마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는 애쓰지 않으면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웠고, 종종 애쓰지 않아도 교집합이 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교집합이 없어도 서로 관심을 가져주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또래 집단 안에서 자존감과 사회성을 키우며 내 존엄성도 성장했고, 관계가 꽃피고 지는 과정에 내 존엄도 피었다 지곤 했다. 실상 관심은 칭찬의 또 다른 이름일 뿐. 존재 자체가 가지는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내 존재는 그 이후론 취업을 통해 증명되어야만 했다.

라디오 음악PD가 되고 싶었으나 취업 경쟁에서 나는 존엄하지 못했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의 패기는 내 존재 의미를 더해주지 못했다. 좌절 끝에 교사가 되었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는 교권이라는 존엄을 부여받았으나, 현실에서 교원증을 꺼낼 일이 없는 것만큼이나 교권은 꺼낼 수가 없었다. 나는 가르치는 부품이 되었다. 아파도 병원갈 틈을 쪼개기가 어려웠다. 내 존엄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표의 한 퍼즐 속에 있었고, 학생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적표 속에 있었다. 내가 아니어도 되는 자리에 내 존엄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드디어 나여야만 하는 자리를 찾았다.

그건 나만이 차지할 수 있는 딱 한 자리, 바로 네 옆, 결혼. 이것만큼 분명한 존엄은 없다. 인정한다. 이 안에서 나는 명분이 분명한 존재감을 누렸다. 하지만 점점 서로의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확인시켜주고 지지를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다. 이미 지나치게 확인한 서로의 존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지고 빛을 잃는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보다 더 강렬한 존재감은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존엄을 누렸다. 이젠 너무나도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다른 누구로도 대체 불가능한 존엄성. 엄마. 참 감사하고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지치기도 체하기도 잘 하는 이 실존의 아픔은 또한 그 누구도 대신해주기 어렵다는 구멍. 엄마.



뭔가 더 필요하다.

그냥 나 자체만으로, 나 하나만으로, 그냥 내 생명만으로 완전한 존엄성. 분명히 인권선언에는 써있는데 나는 잘 모르겠는. 그게 뭘까. 어디에 있는 걸까. 간간이 고민하고 방황했다. 나는 그냥 딸이고 교사이고 아내이고 엄마이면, 그 안에 부단히 갈등하며 떠다니는, 나는 그렇게 존재하는 존재인 걸까?



존엄의 다른 이름은 결국 정체성이었다.

무엇으로 존재하느냐,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인격적인 존중을 어떻게 스스로 인정하고 누리느냐. 누구로부터 존중받고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 그 자체로서 가지는 의미. 그걸 찾고 싶었던 거다. 아무도 훼손할 수 없고, 뭘 잘 하지 못해도, 뭘 공유하거나 공감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어떤 중요한 상대가 아니어도, 천륜이라는 끈으로 하늘이 내린 특별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더라도, 엉망진창이고 내 멋대로이고 예쁠 것도 없고 막, 그래도. 나는 그냥 나라고.



그래, 너는 그냥 너야.

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다. 나는 나 맞아. 나는 나야. 라고 확신하는 순간이 온다. 그건 어떤 자격도 조건도 갖추지 못한 발가벗은 한 존재를 향한 부르심이었다. 무엇으로도 증명할 수 없고, 어떻게 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무거운 한 생명을 향한 다정한 목소리. 그로 인해 존재와 존재 사이에 존재했던 나, 역할과 역할 사이에, 조건과 조건 사이에, 어딘가 빈 틈에, 내가 찾던 답들과 답들 사이, 어디엔가 버려져있고 남겨져있고 뒤쳐져있고 찌그러져있던, 그 모든 존재들이 다 불러젖혀졌다. 남몰래 미워하고 불평하고 남탓하고 거짓말하고 둘러대고 다 말해서 뭣하랴. 아무 구실을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못되고 덜되어 어딘가 숨어있던 존재들까지 모조리 밖으로 다 나와 햇볕을 쬐었다. 모두가 다 나이고 어쩔 수 없는 나이고 그대로 나이고 깨끗하게 나였다.



비로소 완전해진 나의 존엄.

그렇게 내가 된 나는 이제 내 존재를 글로 남긴다. 때론 말로, 때론 눈빛으로, 때론 따뜻한 한 끼 밥상이나 축축한 손수건으로, 그리고 또 다시 글로.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아가려 하는지. 내가 어떻게 존재 의미를 갖게 되었고, 누군가에게 어떻게 존재 의미를 발견하는지. 그냥 생명이 있고 살아 숨쉬고 그래서 이미 존엄한 완전한 존엄성에 대하여. 그 에너지와 흔적에 대하여. 한 글자 한 글자 호흡의 깊은 무게를 꾹꾹 눌러담아 쓴다.



오래 헤맨 나는 이미 내게 있었다. 태초부터.

파랑새같이
















(제목 사진 출처: pixabay / 일러스트 by 차가운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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