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다른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요한 경험을 꼽으라면, 단연코 타인과의 공존을 통해 얻는 경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에는 분명 한 개인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으며, 개인의 잠재력을 단계적으로 펼쳐나가는 데 기여하는 만남들이 있다. 동시에 고통스럽고 부담이 되는 만남도 있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만남은 당연히 피하고 싶기 마련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때로는 긍정적이고, 또 때로는 부정적인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내적 표상을 만든다. 공존에서 오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며 어떤 모습으로 인간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 그에 대한 신념이 생기는 것이다. 이 관념이 개인의 정체성과 연결될 때, 우리 뇌에는 특별한 내적 표상이 만들어진다. 바로 존엄이라는 표상이다. (p.131-132)
우리는 큰 상자 속에 들어와 있다.
상자 속은 엔트로피의 폭주. 우리는 날 때부터 상자 속에 있었고, 혹은 상자 밖에 있다가도 언제든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또 인식했다 하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혹은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애써 외면했고, 혹은 외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힘이 없었고, 혹은 힘이 있더라도 힘을 쓸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고, 혹은 설득력이 있더라도 설득할 대상이 없었다. 왜냐 하면, 어차피 정해진 길이었고, 역사는 돈보다 앞서 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존엄을 잃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죽을병에서 건져지고 있다. 하지만 이후 차도가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수술 사흘 만에 내 침대는 다음 환자에게 팔린다. 의료 공장에서 의료 서비스보다는 의료 기술을 제공받고 나온다. 기업의 매출을 끌어올리기 위해 우리는 tv 앞에서 강제로 광고를 보고 강제로 욕망하며 강제로 소비한다. 강렬한 소비의 유혹을 두둔하는 편이 저항하는 것보다 편리하다. 우리 남편은 그 기업의 책상 어딘가에 앉아 매출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느라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때로는 한동안 먼 나라의 책상 어딘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다. 매출의 객체, 소비의 객체로 서로 팔고 팔린다.
이것은 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선가 누군가 굶어 죽고 있을 때, 반대편 어디선가 소떼에게 먹일 엄청난 양의 옥수수를 수확한다. 그 소떼는 반대편 어디선가 소비한다. 소떼로 인한 이산화탄소는 반대편 누군가의 상공에서 오존을 뚫고 있다. 어디선가 아직도 전쟁 중이며,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과 같은 나라에 사는 누군가는 전쟁 무기를 제작하고 판매한다. 자원은 약탈당하고 전 세계는 쓰레기로 뒤덮였다. 기후는 나날이 예측의 바깥에서 건재하며 인류의 뒤통수를 친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존엄을 위협한다.
아니,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존엄하지 않았기에 생긴 일이다.
인정한다. 저자의 주장은 이미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이다. 다만 뇌과학자로서 우리가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우리의 존엄은 이미 삶의 패턴으로 뇌에 형성되고 저장되어 있는 것이기에, 이 패턴을 잘 만들어갈 수 있도록 교육하고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기 존엄성을 자각할 수 있도록, 자기가 사물화되고 수단화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도록, 나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이 이기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존엄을 지켜주는 데에서 시작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가의 작은 풀이나 곤충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용하냐,
하는 정보가 아니라, 이 풀과 곤충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하는 인식의 시작, 심미적 가치, 혹은 존재론적 가치, 그 생명의 경이로움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식의 전환이다. 그것의 이용 가치나 수단으로써의 의미가 아니라 공존하는 삶이 주는 가치, 조화로움, 적어도 이기적 유전자의 도그마에 사로잡혀 우린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네, 이런 뇌구조였네, 어쩔 수 없었네, 그 상자 속 세상은, 이런 핑계는 대지 말자고. 이 신경생물학자의 존엄에 대한 주장은 그래서 동의가 된다고.
조금은 지루하고 뻔한 이야기 같지만 진정한 존엄을 일깨우는 인간성의 회복,
이 화두를 철학자도 윤리학자도 사회학자도 인류학자도 아닌, 뇌과학자가 양심선언하듯 던졌다는 것에, 오직 과학적 사실만을 서술하는 건조하고 방향성 없는 글이 아니라, 존엄을 잃은 채 파괴와 모멸을 주고받는 인류의 방황에 애정 어린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에,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