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고민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찾은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정체성 중 하나가 '엄마'라는 것이었다. 엄마. 그 누구로도 대체 불가능한, 오직 나만의 영역. 그런데 엄마는 얼마나 무한대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엄마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안다. 그걸 여기서 지리멸렬하게 언급하고 싶진 않다. 너무나 고귀하고 너무나 허름한, 너무나 특별하고 너무나 일상적인, 엄마의 역할. 이건 내가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할 훈장이고 짐이다. 자랑스럽고 무겁다. 작가 '도리스 레싱'은 그 길에 대해 소설답게 조금은 극단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주인공 '수전'은 크고 하얀 저택의 안주인으로서 부족한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든든하게 돈 잘 버는 남편 '매슈'와 함께 네 명의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키우며 가정부까지 두고 말이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안정된 가정, 그 가정 안에서 서로를 향한 적절한 헌신, 그 헌신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원천인 사랑. 그렇다, 사랑. 하지만 사랑이 이 모든 것들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하고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뭔지 모를 아쉬움과 뭔지 모를 답답함 같은 것. 안정된 가정이든 불안정한 가정이든, 아이를 키우고 집안을 돌보며 자기 일을 잃고 혹은 자아를 잃고 가정에 매몰되어본 주부라면 누구나 한 번쯤 왔을 것이다. 이런 알 수 없는 '현타' 같은 것이. 그건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맞닿아있다.
교육 수준이 높고 안목이 있고 판단력을 갖춘 두 사람이 자의로 하나가 되어 서로를 위해 유용한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하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고, 심지어 우리 자신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도 슬픔을 느끼는 것은 수많은 노력이 낳은 결과가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수전과 매슈는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훨씬 더 예의 바르고 부드럽고 애정 어린 태도로 서로를 대했다.-중략-어느 날 밤 매슈가 집에 늦게 돌아와 파티에 갔다가 어떤 아가씨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함께 자고 왔다고 고백한 것 역시 진부했다. 수전은 당연히 그를 용서해주었다. 다만 '용서'라는 말이 적합한 표현이 아니었을 뿐. '이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본문 p283)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삶.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루틴의 인생. 어쩌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야말로 '가장 보통의' 여자. 어쩌면 그래서 그야말로 익명이 되어버린 여자.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고, 누군가의 시선을 위해 존재하며, 삶이 통째로 누군가가 되어버릴 지경인 여자. 인생 다 그렇지 뭐, 하며 그마저도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배부른 소리나 하는 한심하고 비이성적이라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하는, 억울함마저도 사치인 여자. 평균의 전형적인 삶에 불만조차 있어서는 안 되는, 지금 서술하면 할수록 나도 숨이 막히는 여자. 그런 여자 '수전'의 삶이 이런 문장 곳곳에서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다. 나는 혼자야, 나는 혼자야, 나는 혼자야, 라고.
수전은 얼마든지 다시 취업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여성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잠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성실하게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낮 시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보낼 수 있다. 가정부가 집안일을 하는 동안 자신에게 집중하면 된다. 그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코로나 19로 아이들 발이 묶여 삼시 세끼 챙겨 먹일 때,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이 참 감사하다가도 얼른 개학해서 숨통 트고 싶다는 생각이 난들 왜 안 들었겠는가. 아이들이 학교 가기만 해 봐라, 하고 벼르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런데 수전은 정작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 있어도 오롯이 혼자일 수가 없었고 매시간마다 아이들과 집안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줄기차게 선약되어 있었다. 아무리 침실에 혼자 있어도 밖에서 들리는 가정부 파크스 부인의 움직임이 눈에 선했고, 아무리 혼자 정원에 나가 앉아 있어도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이상한 속박과 그것을 향한 분노가 악마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수전은 자유를 원했으나 남편은 냉담했다.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며 생활비와 집 대출을 감당하는 남편인들, 쉬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 나는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지 않고 늘 알 수 없는 불안과 분노를 지성과 이성으로 살짝 가린 채 혼자만의 방, 혼자만의 시간을 꿈꾸는지. 드디어 수전이 혼자만의 방에 대해 매슈에게 얘기했을 때, 매슈는 큰아들과 진지하게 상의하여 수전만의 방을 하나 내어준다. 그냥 나는 원해, 라고 선포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남편과 아들의 길고 긴 검토 끝에. 그러나 그곳도 곧 식구들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그리하여 수전은 드디어 집에서 멀리 떨어진 허름한 호텔 19호실에서 자발적으로 격리되어 몇 시간을 보낸다. 그나마 호텔방에 지불할 돈 몇 푼마저도 남편에게 둘러대며 일일이 청구해야만 한다. 그렇게 간신히 얻은 온전한 자기 자신만의 시간. 그 순간 이후부터는 집으로 돌아와 있는 수전은 껍데기일 뿐이다. 진정한 자신은 여전히 19호실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남편 매슈는 탐정을 고용하여 그곳을 찾아내었고, 수전의 자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수전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 우울함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 우리 부부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래서 혹시 바람피우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차라리 바람 피운다고 하는 것이 낫다. 그에게 이 자유를 향한 갈망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전이 설명조차 귀찮아서 그냥 바람피웠다고 대답하자 그는 오히려 안심했다. 그리고 본인도 데이트하고 있는 애인이 있다는 걸 밝히며 더블데이트라도 하자고 제안했다. 수전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애인 마이클 어쩌고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그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게 아니었으나 여전히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19호실은 고귀한 자아의 회복실이 아니라 의외로 일반적인 용납이 가능한 부도덕한 불륜의 더러운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그 후 19호실은 더 이상 수전에게 안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 되돌아온 집에는 이미 자신이 설 자리가 없었다. 대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엄마의 자리, 주부의 자리도 이미 19호실을 지키기 위해 세워둔 다른 사람들이 능숙하게 자기 역할을 잘하고 있었다. 19호실도, 집도, 더 이상 자신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전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이 되지 못하는 껍데기 수전은 이제 그냥 좀 푹 쉬고 싶다. 그래서 19호실에 조용히 누워 가스 밸브를 열어놓고 마지막을 기쁘게 맞이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소설이지.
만족스러운 삶의 표본 같은 지성 넘치는 중산층 부부가, 심지어 서로의 불륜을 충분히 공감하고 존중해주는 배려와 성실이 넘치는 이 부부가, 아무런 갈등도 없이 아니, 갈등을 표면에 올려놓지 않고 잠잠히 각자의 처소에서 끌어안은 채, 서로의 파국을 맞이하는 이야기. 이 과정에서 그냥 웅크리고 있을 것이지, 자꾸 튀어나오는 우리의 엄마, 친구, 나, 동생, 딸 같은 수전의 자의식. 불륜보다 더 악해서 도저히 용인되지 않는 악마 같은 자유에의 갈망. 온전히 잠잠히 자기 자신이고 싶은, 어디서 감히, 모든 걸 다 가진 여자가, 네 아이의 엄마이며 능력 있고 잘생긴 남편의 아내가, 어디 감히 경망스럽고 건방지게스리, 자기 자신이고 싶단 말인가. 그래선 안 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의 갈등은 남편과의 갈등, 남편이 대출금을 갚으며 꾸려나가는 집과의 갈등,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서도 절대 깨뜨리지 않을 가정과의 갈등, 남편이 속한 모든 이 세상과의 갈등, 그래, 그건 19호실 문 밖과의 갈등이다.
그 문이 닫혔다.
그 안에서 만나는 나를 향한 서러움과 자기 연민을 지켜내려고, 더럽고 누추한 외진 어느 한 호텔의 싸구려 방으로 표상되는 정말 작고 허름한 한 여성의 보잘것없는 영혼의 자유를 지켜내려고, 자기가 서 있어야 할 모든 자리를 내어주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고서라도 반드시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은 한 엄마, 아내, 안주인, 그 이상의 수전, 그 이외의 수전, 그 자체로서의 수전, 그냥 순수한 수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그냥 그런 수전을 지켜내려고, 19호실의 문은 굳게 닫혔다.
나에게도 '19호실'이 있다.
남편도 안다. 그곳이 어디인지. 이 소설의 주인공 '수전'과는 달리 나는 애당초 대놓고 19호실을 마련했으니까. 내가 진정으로 해방되고 내 자아가 새롭게 설정되는 공간. 그곳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쉬었다. 더럽고 낡은 의자에 웅크리고 수줍지만 뜨겁게 옷을 벗고 본연의 나를 만났다. 19호실은 누구에게나 그런 '외도'의 공간, 기존의 나를 떠나 새로운 나와 만나 철저하게 고독한 침묵의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나와 조심스럽게 사랑을 나누는 곳이다. 그곳은 때로는 도서관이었고, 때로는 조용한 카페였으며, 또 꽃이 핀 나만의 베란다일 때도 있었다. 한동안 열렬히 예배당 한 귀퉁이였거나, 사람들과의 소란스러운 식사 자리일 때도 있었다. 종종 전시회장이나 연극 객석일 때도 있었다. 늦은 밤 청계천 자전거 탄 풍경일 때도 있었고, 비 오는 길거리 우산 속이기도 했다. 에어팟 속 멜론(음악)이기도 했고, 요즘은 제법 이곳 '브런치'일 때가 많다. 나에겐 무한대의 19호실이 있었고 또 있을 것이며 있어야만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생각난다.
어찌하여 여성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그렇게 하찮고 소중한 '방'을 오매불망 노래해야만 했을까? 내 책상처럼, 수전의 19호실처럼, 꿈꾸는 여성은 그런 '자기만의 방'을 원한다. 그 누구의 침범도 간섭도 없는 오롯한 내면의 시간, 적나라하게 벗어던진 내가 춤추는 거울이 달린 공간을. 짧아도 허름해도, 또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절대적인 무중력 상태를 원한단 말이다. 왜 그걸 일일이 설명해야만 하며, 왜 설명해도 이해시킬 수 없으며, 왜 이해받지 못해도 지켜야만 하며, 왜 지키지 못해도 계속 주장해야만 하며, 왜 주장해도 설득시키지 못하며, 왜 설득시키지 못해도 존재해야만 하는가? 19호실은!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 (본문 p277)
이렇게 시작하는 이 소설은 '지성으로 분류되는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신사적이고 부드러우며 상식적이고 다정한 폭력. 한 여성이 한 남성의 세계에 갇혀 점점 자신을 잃어가지만, 그걸 되찾는 것은 불법이나 부도덕보다 더한 광기로 여겨지는 가부장적 가치관 속에서 현실의 우리는 수전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없다. 너무나 공감하면서도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섬뜩하게 현실적이면서도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인 이야기. 책을 덮으면서 괜히 남편 얼굴을 유심히 본다. 내 결혼 생활은 과연 무엇에 발목을 붙잡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