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당신, 무슨 옷을 입고 있나요?

'진짜 옷'을 입다

by 차가운 열정

잠옷을 입고 있다.

늘어진 티셔츠에 일명 꽃바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다. 이런 날은 눈곱도 안 뗀다. 자고 일어난 그대로, 자연미 넘치는 생활이 시작된다. 어슬렁거리는 한낮 집구석, 이 반 야생의 움직임 중에 유일하게 문명스러운 것이 있다면 커피 한 모금. 이런 날은 시간도 문명의 가장자리로 튕겨나 있다. 할 일이 분명 태산인데, 다 하잘 것 없이 느껴지고, 아무 거나 손에 잡히는 걸 읽거나 바쁜 창밖 풍경을 영화 보듯 무심하게 구경할 뿐. 정말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눈을 떴으나 아직 수면 중인 생활. 현실이지만 그냥 꿈을 꾸는 시간. 느릿느릿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지금 당장 불이 나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은 절대적인 게으름의 경지를 만끽한다(에이, 불이 나도 설마 저러고 있겠어?라고 진실을 따지지는 않기로 하자. 에헴.)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 잠옷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날이 흔한 건 아니다.

대체로는 집 앞 마트라도 다녀올만한 간단한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런 날은 세수도 한다. 머리도 단정하게 묶고 간단한 집안일을 시작으로 집 공장을 가동한다. 그런 옷차림으로는 하루의 고된 노동량을 감당할 수 있다. 나는 앞치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대놓고 작업복이라서. 줄무니가 그려진 티셔츠에 검은 통바지, 적당한 긴장과 적당한 자유가 그 줄무늬처럼 교차한다. 너무 펑퍼짐하지 않으면서 몸에 부대끼지 않는, 그런 옷은 일의 능률을 높인다. 마음이 너무 펑퍼짐해지지도 부대끼지도 않으니까. 평범한 일상은 역시 평상복이다.



멀쩡한 외출복을 입을 때도 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학교에 근무할 때에는 나이치곤 옷 잘 입는 선생님 top 3에 항상 들었다.(여기서 팩트체크에 목숨을 걸진 말기로 하자. 흠흠.) 비싼 옷은 아니지만 몸뚱이의 구조를 잘 참아주고 존중해주는 옷으로 교사의 품위를 유지했다. 교실 문을 열면 허름하게 입은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기세가 다르다. 나의 기세도 얼라들의 기세도 다 다르다. 보이는 데에 집중한 이 세대 앞에서 심지어 같지도 않게 가르치는 짓까지 해 먹으려면 직장 유니폼 같은 절제가 필요하다. 옷이 주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어울리는 액세서리가 필요하고. 신발도 필요하다. 뭐, 교실에 가방까지 달고 다니진 않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예전에는 코스프레를 좋아했다.

코스프레도 자주 하다 보면 그게 진짜 내 옷 같고 편하고 좋아진다. 주로 나는 위악과 방황, 고독과 공허의 옷을 입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냥 쟨 저러나 보다 했다. 불편하니까 물어보지 말자고, 내버려두면 알아서 털어낼 테니까, 오늘 저 인간의 겉옷을 벗기려 하지 말자고. 나는 그 적당한 거리를 즐기며 여러 가지 답을 모르는 질문들을 껴안고 페미니스트라든가 실존주의자, 때로는 인본주의자들이 입다 버린 옷들을 주워 입곤 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뭘 입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남들이 입혀주는 대로 입었다. 또는 남들이 입으라는 것이 싫어서 반대 색깔을 찾아 입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입고 싶은 옷이 생겼다.

나는 만능 슈트가 입고 싶다. 이 '만능 슈트' 하면 생각나는 슈트 중의 슈트가 있는데, 바로 아이언맨의 슈트이다. 아이언맨은 어떤 모습이 진짜일까? 캐주얼한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연구소에서 일할 때일까?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딸을 재우며 삼천만큼 사랑한다는 딸의 사랑 고백을 받아낼 때일까? 모두 다 스타크 맞다. 하지만 아이언맨 슈트를 입고 악당들과 싸울 때의 모습이야말로 스타크의 진짜 모습 중 하나이다. 입으면 벌써 에너지가 달라지고, 여러 가지 능력이 생긴다. 그야말로 슈트 빨(?)인 셈. 하지만 그 능력을 컨트롤하는 힘이 그의 진짜 능력이고 전투력일 것이다. 우주를 날아다니고 지구를 구원하는 영웅 아이언맨의 슈트 같은 만능 슈트를 입고 싶다.(저 나이에 아줌마가 저런 옷을 입고 싶어 하다니, 하고 멘털까지 의심하지는 말기로 하자. 흠흠.)



하지만 영웅은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영웅 (英雄)
[명사]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국어사전)
英雄 (영웅)
①재능(才能)과 지혜(智慧ㆍ知慧)가 비범(非凡)하여 대중(大衆)을 영도하고 세상(世上)을 경륜(經綸)할 만한 사람
②재능(才能)과 담력(膽力)이 뛰어난 사람(한문사전)

(출처 : 네이버 어학 사전)

따라서 영웅의 반대말은 보통 사람, 범인(凡人)이다. 세상은 지독하게 평범을 추구한다. 대중을 영도하고 세상을 경륜하는 것을 특별한 누군가에게만 허락된 일처럼 여긴다.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억압당한 것이라고 여기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을 오지랖이 넓다고 여긴다.



왜 우리는 평범의 선을 넘으면

좋은 것 나쁜 것 가리지 않고 다 이상하게 여길까. 더 뛰어나면 그걸 '특이하다'라고 여기고, 더 새로운 길을 먼저 가면 '독특하다'라고 한다. 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을 선택하면 '괴짜' 같다고 하고, 한발 더 나아가 희생적인 삶은 '바보' 같다고 한다. 너무 착하지 말라고, 너무 친절하지 말라고, 너무 특별하게 잘하지 말라고, 너무 책임지려 하지 말라고, 심지어 너무 열심히 살지 말라고 한다. 혼술 혼밥 혼영 혼차 혼행 혼자 뭘 해도 어색하지 않고 코로나를 등에 업고 점점 더 혼자인 것이 지혜로워져 가는 시대에, 남과 어울리고 양보하고 배려하고, 더 책임지고 더 성실하게 더 열심히 더 뛰어나게 더 자기만의 개성을 확신하고, 더 자존감 높게 더 서로 존중하며, 함께하는, 부대끼는 삶을 향해 '관종'이라고 한다.



마음속에 영웅의 스위치가 꺼져가는 시대,

얼마 전 폭설이 쏟아지던 날, 출근하던 한 시민이, 너무 추워서 커피 한 잔만 얻어 마시고 싶다고 하는 노숙자에게,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내어 쥐어 주고, 겉옷에 자기 장갑까지 벗어주는 사진이 기사로 실려 우리를 따뜻하게 했다. 지구를 구하고 우주 악당과 싸우고 그렇게까지 위대한 삶은 아니더라도, 딱 내 쭉 뻗은 팔이 껴안을 수 있는 반경만큼은 내가 영웅이 될 수 없을까. 잠옷이든 출근복이든 그 위에 덥석 주워 입고 뛰어가는 나만의 전투복 한 벌 쯤 다 우리 옷장에 있지 않나. 더러운 것도 볼품없는 것도 흉터도 다 커버해주고, 퀭한 눈빛은 맑고 생기 있게 만들어주는 자체 에너지 장착, 나쁜 짓을 하고 싶은 손을 쓱 거두어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고, 내 것 움켜쥐고 있던 손을 호주머니에서 싹 꺼내어 주변에 나누어주는, 무거운 공기를 휙 휘저어 날려버리고 LED보다 밝은 빛을 달고 다니는, 진짜 멋진 이 옷. 아직 완전히 착 감기진 않지만, 점점 이 옷이 내게 가장 편안하고 자유롭게 느껴지고 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지고 온 자기만의 영웅 옷, 오늘은 먼지 떨어서 한번 걸쳐보는 게 어떨까?



영웅은 날아야 제맛^^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27)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태복음 5:41)








(사진 출처: 네이버 <어벤저스> 영화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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