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피노 누아를 마셨다

피노 누아에 굶주린 한 남자의 시식 담(談)

by 정휘웅

한동안 찾지 않게 된다면, 그것에는 약간의 이유는 있겠지만, 마음의 여유와 주머니 사정이 주효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갈증이 과도해지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고, 갈망하듯 와인 한 잔을 마신 감동은 아직까지 잘 남아 있다. 마음속 교만함이 발동하여 다시 피노를 마시고 싶어 졌고, 마침 맥주 샘플링을 하는 자리에 가서는 피노 누아르를 한 병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르고뉴의 마을은 사빈느레본(Savigny les Beaune), 본 로마네(Vosnee Romanee) 마을이다. 그러나 마을 단위로 갈 수 없다면 오코트 드 뉘(Hautes-Cotes de Nuits)도 멋진 맛을 보여준다.


좋은 도멘들은 마을 단위를 넘어서 부르고뉴라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멋진 개성을 드러내니 당연히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치 걸신들린 양 지인의 식당으로 들어간다. 식당 안은 다른 와인 자리와 손님들로 시끌벅적이다. ‘피노를 먹어볼까요’ 개미 같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이야기한다. 냉큼 미국 피노냐 부르고뉴 피노냐 갈등한다. 요즘은 정말로 훌륭한 맛을 선사하는 미국의 피노 누아르도 많이 소개되고 있고, 그 발전 역시 놀라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역시 깊은 맛을 느끼기에는 부르고뉴가 제격이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르는 만병통치약이라 할 수 있다. 과거부터 생각하기에 피노 누아르와 리슬링은 잘 익었거나 잘 다듬어졌을 경우 이 하나만으로도 완전 음식에 속할 정도의 훌륭한 균형감과 맛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배가 고프다면 당연히 요리와 조합을 만들어야 함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와인의 칼로리 보다도 안주의 칼로리가 더 과하기는 하겠지만 요리 매칭은 필수불가결이다. 그리고 피노 누아르에 최상의 조합은, 물을 필요도 없이 고기다. 그것도 신선하고 식감이 좋은 고기다. 고기의 식감이 좋으려면 가급적 덜 익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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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따르고 나니 색상이 왜 이렇게 짙은지 모르겠다. 2012년, 나름 포도원들이 힘든 해 이기는 했지만, 포도나무가 비에이유 비뉴다. 오래된 나무의 힘이 느껴져서인지 보디감이 대단하다. 첫 대면은 부르고뉴가 아닌 것 같은 수준의 오크 터치와 보디감이 전해진다. 그래서 약간의 브리딩을 선사해 본다. 잔을 돌리고, 약간의 수다와 따스한 마음의 온기를 와인 잔 속에 살며시 섞어본다. 이내 와인이 반응을 보여준다. 공명하듯 잔속에서 서서히 아로마의 춤이 피어오른다. 소리의 진동에 아로마가 떨려서인지 서서히 꽃향기와 묘한 라스베리의 아로마가 올라온다. 기분 좋으면서도 유쾌한 아로마다. 보디감도 선명한데 서서히 균형감 있는 질감을 보여주니 기분은 더 매끈해지고 화사해진다. 절로 동공이 풀리고, 앞에 있는 유부남 아저씨가 귀여워 보인다. 이게 피노의 힘인가 보다.


그래서 이 피노 맛 들이면 집안 거덜난다고들 한다. 이 마성의, 마약과 같은 순간에 매료되는 순간 이 짧은 추억과 만남을 잊지 못해 사람들은 다시금 피노를 찾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 피노에는 신선한 고기가 제격이다. 부드럽고도 씹는 질감이 쫀득하여 치아와 입 안에 착 감기듯 전해지는 육질의 느낌이 피노의 관능적인 마리아주와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 육전도 좋은 궁합을 보여준다. 고소하면서도 부드럽게 입 안을 메꾸어주는 이 기분 좋은 질감은 피노 누아르와 기묘한 궁합을 보여준다. 약간의 따스함, 그리고 간장에 찍은 육전의 터치는 콧속에 고기의 풍미와 따스함, 기분 좋은 뭉근함을 함께 선사한다.




이 날 의외의 발견은 피노 누아르도 맞지만 가메이에 있다. 가메이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보졸레의 와인으로 알려져 있고 가격도 비싸지 않으며 장기 숙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보편적인 품종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연히 보졸레 지역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 해당되며 10개의 중요한 마을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뛰어난 양조자들도 존재하지만, 최근 부르고뉴 지역에서 새로운 테루아를 찾기가 더욱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부동산 가격의 상승 등으로 많은 재능 있는 생산자들이 이 지역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티보(Thibault Liger-Belair) 같은 젊은 양조자들은 이 지역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피노 누아르 만큼의 우아하고 멋진 질감을 주면서도 가격은 너무나도 합리적이어서 이제는 가메이의 명주를 찾아서 숙성 잠재력을 과도하게 따지지 않고 언제나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와인으로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과거 라피에르의 모르공을 최고로 꼽았다면 이제는 이와 어깨를 견주거나 더 뛰어난 품질의 가메이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앞으로 이 지역에서 부르고뉴 피노의 풍미를 가지면서도 좀 더 깊이 있는 감흥을 제공해줄 멋진 레드 와인들이 등장한다면 진심으로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