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휘웅 Apr 13. 2021

와인을 마시는 이유

수입와인시장 분석보고서를 9년째 발간하다 보면 많은 사연들을 접하게 된다. 2021년에는 보고서가 이미 약 600건 가량 배포가 되었지만 지금도 1주일에 3~4건 가량의 보고서 요청 이메일이 도착한다. 몇일 전 평소처럼 보고서 요청이 왔고, 보고서를 보냈더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다시 도착했다. “혹시 소비자들이 와인을 마시는 이유에 대한 자료는 없을까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떤 질문도 쉽게 해준다고 생각했던 나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장문의 이메일로 답신을 해주기에는 너무나 호기심이 가는 질문이고 고민도 되는 부분이라 칼럼으로 올리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하여 이메일에 대한 답신으로 칼럼의 형식을 빌려본다.


소비자들이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비자들이 재화를 어떤 이유에 의해서 구매하게 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직결되어 있는 부분이라 그 범위를 정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나에게 지금 100만원이 아무 이유 없이, 단지 소비하라는 미션 하나만 주어진 상태로 던져진다고 생각해보자. 조건은 하나다. 무엇인가를 사는 것이다.(빌린 돈을 갚는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증여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살 것인가?


나의 예를 들어서 생각해본다면, 일단 데일리 와인으로 2만원 정도 되는 것을 한 박스 가량 구매한다. 그리고 좋은 고기를 살 것이다. 아주 좋은 부위의 한우로 말이다. 남는 돈으로는 좋은 컴퓨터 모니터를 하나 살 것이다.(물론 이 돈으로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내 개인의 선택이니 이 부분에 이성이 개입할 부분은 없다. 다만 내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생각해본다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다는 점이다. 와인을 하나만 사서 마시면 왠지 기분이 나지 않는다. 당연히 와인에는 고기가 따라야 한다.(내 지론이다.) 좋은 와인과 좋은 고기는 천생연분이다. 그 순간으로 나에게 그 이상의 즐거움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정말로 고급 와인을 좋아하고, 브랜드를 중요시 하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데일리 와인 한 박스가 아니라 24만원짜리 와인 1병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와인을 마시는 이유”에 합당할까? 24만원짜리 와인을 매일 마실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날(예를 들어 여자친구에게 프로포즈를 한다거나)에 내기 위해서 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와인은 “마신다”라는 개념 보다는 어떤 “의식” 혹은 “행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객체로서 와인의 존재 의미가 격상된다. 단순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행동을 완성해주는 정점이 와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여러 가지 내포하는 의미가 있다. 일단 와인을 술로 볼 것인가 와인 그 자체로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그 다음으로 와인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목적으로 와인을 사느냐 하는 것이다. 사는 이유와 마시는 이유는 다르다. 사는 이유는 선물을 하기 위해서 살 수도 있고, 기념하거나 투자 개념(보르도 와인처럼)으로 살 수도 있다.


마시는 이유 역시 사는 이유 만큼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마시는 이유에는 투자 개념이 없을 것이다. 그 와인을 느끼고, 그 와인을 마셔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것을 범주화 해서 생각해본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1. 건강에 좋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폴리페놀 성분, 혹은 신문에서 와인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와인을 마시는 경우다. 다만 이때에는 주당들이 선별적으로 찾아내는 핑계의 하나일 수도 있다. 와인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제한된 환경에, 그리고 간이 아주 튼튼하다는 전제조건 하에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주당들은 자신이 원하는 핵심 키워드를 통하여 술을 마시는 이유를 정당화 하고, 그 부분에 와인이 그나마 방어 기제가 있으니 이를 활용한다. 나도 여기서는 자유롭지 않다. 와인은 건강하다는 머릿속 선입관을 갖고 와인을 마신다. 이만큼 큰 자기위안도 없다.


2. 정신 건강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기분이 좋아서 마실 수 있고, 기분이 나빠서 마실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사람에 따라서 이 부분을 해소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가는 사람도 있으며, 종교시설에 가서 기도를 올리거나, 아니면 조깅이나 운동을 하기도 한다. 어느 사람이든 정신 건강을 위해서 별도로 하는 행동들이 있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 와인을 선택하는 사람은 와인이 본인의 정신 건강에 가장 도움이 되어서일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마음의 평안”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와인을 고른 사람들은 와인을 마신다.


3. 그냥 나는 와인을 마신다, 고로 존재한다: 와인 이외의 술은 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간혹 와인을 절대적 술의 영역으로 생각하여 다른 술에 대해서는 배타적 사고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물론 진정한 주당은 모든 술을 숭상한다.) 이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취향, 그리고 선택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 것 역시 와인을 마시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왜 그렇게 많은 술 종류를 두고도 와인을 마실까? 별 것 없다. 입맛에 가장 맞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내 입맛에 가장 맞다보니, 와인을 가장 즐기게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와인만큼 음식에 다양하게 맞는 술이 없다: 내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중국음식에는 백주만큼 잘 맞는게 없고, 감자칩에는 맥주, 그리고 김치삼겹살에는 소주 이상 가는게 없다. 그런데 이런 모든 편향성을 뛰어넘는 술이 있으니, 바로 와인이다. 와인만큼 다양성이 큰 술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덕분에 전 세계 그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물론 고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소믈리에라는 전문 직업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인연을 찾아주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오죽 했으면 마리아주(mariage, 결혼)이라는 단어를 붙였겠는가? 아무나 손만 잡으면 결혼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와인은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다. 이 맛을 알게 되면 와인을 계속 마시게 된다.


5. 있어보이지 않는가: 대개 와인을 처음 접하는 경우, 그리고 그 맛에 눈을 뜨고 브랜드를 알게 되는 경우 많이 발생한다. 이 과정을 거친 뒤에는 브랜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나만의 취향을 따르게 된다. 그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으니 바로 와인의 브랜드(유명세)를 한 번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와인에 대해서 보다 넓은, 밝은 시각을 가지게 되며 다양한 형태의 와인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 해탈의 단계에 접어들기 이전에 반드시 “와인은 있어보인다”라는 단계를 뛰어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 이 과정은 필수적이다.


쭉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명확하게 나온 것 같다. 공자 가라사대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知之者는不如好之者요 好之者는不如樂之者, 논어)” 여기에 와인을 마시는 이유가 다 들어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팬데믹 1년, 그리고 와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