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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웅 Jan 06. 2023

와인 시음 20년

내가 와인 시음노트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03년이다. 물론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2002년이니 지금 시점으로 보면 정확하게 20년을 넘긴 셈이다. 물론 내 주변에는 나보다 더 오랜 구력을 가진 이들도 많고, 더 훌륭한 시음 역량을 가진 사람은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 작은 기간은 아니기에 2023년의 첫 칼럼은 20년을 잠시 뒤돌아보는 내용으로 쓴다.


2002년 당시에는 와인숍도 많지 않았고 와인 저변도 널리 펼쳐져 있지는 않았다. 당시에 내가 인터넷을 통해서 찾은 와인에 대한 정보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는데 기억하자면 베스트 와인과 와인이십일닷컴이 중요한 와인 정보 채널이었다. 현재까지 그 명맥을 명확하게 유지하고 있는 채널은 와인이십일닷컴이니 이 매체의 중요성은 달리 강조할 필요도 없다. 처음에 와인을 접했을 때에는 와인에 대한 에티켓이 소믈리에의 시음 규칙에 맞추어진 경향이 많았고, 시음회에서도 와인의 시음 순서를 정해두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많은 와인 동호회에서는 이 순서를 준용하는 경우가 많고 음식과 와인에 대한 매칭을 더 엄격하게 들이미는 경우도 많다고 본다. 초기 와인 시음시기에는 내가 마신 기록을 글로 남기기 보다는 더 많은 와인을 맛보는 것이 중요했던 시기다. 백화점에서 사온 칠레 와인 하나를 맛보고 감동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아직까지 머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지만, 그 사이 와인 시장은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당시에는 와인 시장이 1조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다는 이야기들도 했으나 지금은 2조 시장이니 얼마나 시장이 성장하였는가?


무엇보다도 샴페인의 저변이 많이 확산된 점은 주목할만 하다. 거의 20배 가까이 성장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당시에는 샴페인이라 하면 돔페리뇽과 모에샹동이 전부였으며, 이마저도 가격은 6~7만원 가량 했으니 물가를 생각한다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주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서 샴페인이 5만원 조금 넘은 가격대에서도 충분히 좋은 것을 고를 수 있게 되었으니 시장이 많이 성숙되고 수입물량도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는 2007~2008년 과열된 와인 시장과 함께 그 이후 불어닥친 금융위기로 인한 시장의 반토막 현상이다. 당시 신의 물방울은 거의 성서처럼 취급되었고 모든 와인 애호가들의 관심이 다음에 신의 물방울에 어느 와인이 나오느냐였다. 국내에서 큰 반향이 있어서 작가가 한국에도 오고, 수입사들이 여러 와인을 무분별하게 수입하는 바람에 한국이 외국 포도원들의 소위 호갱이 된 일도 있었다. 통계치로 보면 당시 12병 단위 박스당 평균가가 지금보다도 비쌌으니 얼마나 수입 가격이 왜곡되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처럼 비싸게 수입된 와인이 시장에 가득 풀린 상태에서 금융위기를 맞이했으니 얼마나 그 재고 소진에 어려움을 겪었겠는가? 분석으로 보자면 그 당시 어려운 시기를 넘기는데 3년이 걸렸다. 그 이후 서서히 회복했으니 시장에 큰 흔들림이 있으면 복구에 큰 댓가를 치른다는  것은 꼭 명심해야 할 사안이다. 시장이 성숙된다 하더라도 위기는 언제나 다가온다.


20년간의 시음동안 가장 아쉬웠던 뉴스로 아간코리아와 길진인터내셔날이 시장에서 사라졌던 일이 떠오른다. 순수하게 와인 관점으로 생각한다면 두 수입사 모두 멋진 와인들을 많이 수입했는데, 여러 사정들이 있어서 수입시장에서 고배를 마셨다. 특히 길진인터내셔날의 경우 시장에서 좀 더 버텼다면 지금의 좋은 시절을 그대로 맞이했을 것이라 생각되어서 아쉬움이 더하다. 특히 이 수입사들이 수입한 아이템들은 지금 다른 수입사들의 주력 와인이 될 정도로 훌륭한 브랜드들이 많았고, 이 당시 좋은 아이템 중에서 다시 국내에 수입되지 않는 아이템도 많다는 것을 본다면 그 당시 리스트들을 수입사들이 좀 더 살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요즘은 와인업계 접촉이 많지 않다. 큰 행사들이 있다 하더라도 내 직업이 IT 분야다 보니 전문인 시음 행사에 대한 메일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덕분에 좀 더 시장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각이 생긴 것 같고, 와인의 역사나 품질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전문가들이 즐비하며 월등한 역량을 가진 소믈리에와 전문가들이 즐비하니 내가 굳이 그 분야에 관여할 이유도 없어진 셈이다.


지금은 어지간한 와인들을 다 내 돈으로 잘 사서 마시고 있지만, 어려운 시기에 여러 와인들을 시음할 수 있게 기회를 주었던 많은 수입사, 호레카 업장 관계자분들의 도움은 잊을 수 없다. 그런 수 많은 시음과 경험 기회 부여가 12,000건 이상의 시음노트와 10번 이상의 시장 보고서를 만들게 한 원동력이었음은 분명하다. 시장 보고서를 무료로 배포하는 것 역시 오랜 도움에 대한 돌려줌이라고 보면 자연스러울 것 같다. 물론 올해도 적극적으로 와인을 사서 마셔볼 것이다. 사업자에 대한 가장 좋은 지원은 글 하나도 중요하겠으나 어쨌든 매출이 아니겠는가?


2023년은 여러 시장 지표가 긍정적이지는 않으나 좀 더 세분화된 시장 분석, 그리고 여러 관계자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시장 상황을 잘 설명하는 보고서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연간 1천부 이상 배포가 되고 있으니 실제로 보고서를 읽는 이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 추측한다. 간혹 보고서를 받은 뒤 감사의 뜻을 보내오는 이들의 글을 읽으며 보고서의 한 문장 한 문장을 허투루 써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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