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세상이 만든' 주류의 울타리를 뛰어넘을 용기
친구 A는 출산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라도 둘째아이 계획을 물으면 오히려 A의 남편이 정색을 하며 "그런 계획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A는 또 다시 아케론(Acheron.그리스신화에서 죽은 사람이 저승에서 만나는 첫 번째 강, '비통의 강' 또는 '슬픔의 강'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앞에 서려고 한다. A는 "외동아이의 비율이 늘고있긴 하지만 아직은 형제있는 아이들이 더 많다"며 "아이를 비주류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둘째아이를 고민중"이라고 말했다.
A는 '대입부터 취업과 결혼, 출산에 이르기까지 삶을 지배한 중요한 정서 중 하나도 비주류가 되는 두려움이었다'고 고백했다. 스물아홉에 버진로드를 걸었던 그는 당시 고등학교 친구들이 대부분 일찌감치 결혼해 아이를 양육하던 상황이었고, 그래서 그들을 만날 때면 주류에서 벗어난듯한 조금의 소외감과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경험했다고 했다. 이런 감정들이 당시 결혼을 결정하고 직후 출산을 하게된 이유 중 하나인것 같다고 짐작했다. A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고개를 백번쯤 끄덕였을까. 주류(다수)에 대한 욕망이 아닌, 비주류(소수)에 대한 근거없는 불안감으로 떨었던 시간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이하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논의는 수적 다수와 소수에 대한 인식으로 한정함)
스물다섯, 함께 취업을 준비하던 친구들 모두가 취업에 성공하고 홀로 '취업준비생'으로 면접을 이어가던 유쾌하지 않던 그 시간들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를 '실패는 나태의 산물'이라고 오독(誤讀)했던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겨 주었다. 그때의 쓴맛은 '실패'를 '나태'와 동의어로 규정했던 나의 오만함을 보란듯이 산산조각 냈다는 점에서 의미있었지만 주류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욕망, 아니 비주류가 되선 안 된다는 공포 역시 가져다줬다는 점에서 '꼭 경험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몇년 전부터 유행했던 아들러 철학을 빌리자면 트라우마는 없었을지라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건 아니라고 소리쳤던 성깔이 취업재수를 경험으로 많이 죽은 것은 분명하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취업실패를 경험으로 나는 더 비겁하고 더 순응적인 사람이 됐다.
신입생시절, 생전 처음 본 동아리 선배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장기자랑을 하는 인권침해를 경험한 뒤 오랜 선배들의 협박과 농담이 섞인 조언에도 불구하고 신입생 환영식에서 장기자랑 코너를 없앴다. 대학생때도 술을 강권하는 선배들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색하며 인권강의를 이어가던 나였지만 신입사원이 된 뒤에는 이따금 쏟아지는 인격모독적인 발언과 술강권 등 인권침해적 행태, 눈앞에서 펼쳐지는 교도소 담장을 넘나드는 성희롱과 성추행들을 '학생들은 몰랐던 이 사회의 관행이겠거니'하며 눈감았다. 실은 많은 사람이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소리내는 소수,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분류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일생이 비주류가 되지 않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A의 고백에 비겁했던 이런 나의 시간들이 뭉개뭉개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회생활 10년차에 접어든 뒤에서야 알게됐지만 내가 주류의 울타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이는 사이에 비주류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던쳐버린 채 목소리를 내며 울타리를 나간 사람들에게 나는 현재의 많은 부분, 어쩌면 미래의 상당 부분까지 빚지고 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만해도 (무려 200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보장된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12개월을 모두 사용하는 '언니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재 몸담은 회사만 해도 6개월이 최대치였다. 하지만 입사동기가 부서장과 얼굴을 붉히며 '법으로 보장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쟁취한(?) 뒤에야 내가 몸담았던 조직은 비로소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를 준수하는 조직이 됐다. '법에 보장하는 생리휴가를 사용하겠다'는 선배 덕에 우리 회사 사용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사용자는 여성근로자의 청구가 있을 경우 생리휴가를 줘야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500만원 이하의 벌금, 근로기준법 114조)에 처해질 위기'에서 벗어나게 됐다. 나는 주류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처음 깃발을 들었던, 비주류를 자처했던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
나는 이유모를 야근을, 주말특근을 잔뜩 구겨진 얼굴로 견뎠지만 '불필요한 야근은 하지 않겠다'며 사무실을 박차고 나간 후배들덕에 겨우 '불합리'을 말할 수 있게 됐다.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저출산이 하루이틀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비혼과 딩크를 당당하게 말하는 비주류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납세자 감소와 노동자.소비자의 감소로 정부와 기업에 직면한 위협으로 외화되고 나서야 비로소 살인적인 노동시간문제가 정책적 화두가 됐다고 믿는다. '가만있으라'는 소리에 '가만있지 않겠다'며 목소리를 내고 주류에 당당히 흠집을 낸 비주류들에게 나는 삶의 적지 않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더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회사에 퇴사를 선언하곤 '유예된 퇴사일(회사에선 병가를 권했고 현재 병가중)'을 받은 뒤 나는 처음으로 육아휴직이 아닌 장기휴직을 사용한 주니어가 됐다. 나의 번아웃과 우울증, 면역질환이 격무부서 직원들의 가혹한 업무량에 대한 논의, 주니어들에게 집중되는 업무 등에 대한 조정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나의 병력이 '열정넘치는 직원 한 명의 자.발.적 산화'로 기록되지 않길 격렬하게 바란다.
다만 다시 일터로 돌아간다면 부당한 업무는 물론 관행, 문화에 목소리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려한다. 뒤에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뒷담화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높은분들 앞에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당돌한년이 되련다. 세상을 이끄는 주류도 아니면서 수적 주류의 울타리 안에서라도 머물기 위해 안달복달 안절부절 살아온 내게 남은건 산더미처럼 쌓인 미안함과 고마움뿐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