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속이니 방법이 없다

하늘에 물어도 방도가 없을 것 같다

by 송달

인생의 많은 문제는 남이 아닌, 내가 나에게 걸어놓은 덫일지 모른다.

사주는 나를 설명하는 하나의 언어다.

태어난 시각, 그 틀 안에서 나는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 사주의 굴레를 진짜로 만드는 건 외부가 아니라, 내 안의 믿음일 수도 있다.

사람은 태어난 시점으로 기질을 갖고, 환경 속에서 운명을 겪는다.



같은 사주, 다른 인생, 왜 어떤 이는 임금이 되고 어떤 이는 꿀벌을 기르는가?

우리는 사주를 해석하려 하지만, 실은 그것을 핑계로 삶을 설명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믿지 않으면서 의지하고, 의지하면서도 부정하는 그 모순 속에서,

나는 나를 끊임없이 속이고 살아간다.



그 끝에서 나는 묻고 싶다.

운명을 따르는 삶이 현명한 것인가,

아니면 운명을 바꾸려는 몸부림이 인간다운 것인가.




예전엔 하루를 12등분 하여 시간을 나눴다.

요즘은 신생아가 태어나는 순간, 몇 시 몇 분까지 정확히 기록된다.

과거에는 두 시간을 하나의 시각으로 계산했기 때문에, 사주를 볼 때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이,

우리나라 인구 비율로만 따져도 수십 명에 이른다.



나와 같은 사주를 지닌 사람들을 모아본다면, 그들은 모두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주는 과연 믿을 수 있는가?

결국 사주는 확률의 게임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말했다.

"나와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을 찾아라"

무학대사가 찾아낸 이는 어느 산골에서 양봉을 하고 있었다.

무학이 그에게 물었다.

“주군은 한 나라를 다스리시는데, 그대는 어찌 이리 살고 있는가?”

그는 대답했다.

“주군께서 많은 백성을 다스리신다면, 저는 많은 꿀벌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같은 사주인데, 임금과 양봉업자의 삶은 왜 다른 걸까?.




학문적으로 보면 사주보다 풍수지리 공부가 더 어렵다.

하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선 사주가 더 복잡하고 어렵다.

풍수는 ‘땅’이라는 고정된 대상을 다루기 때문에 이론만 잘 세우면 길흉의 판단이 정확하다.

그러나 사람은 동적이다.

수많은 인간관계와 환경, 선택 속에서 삶이 형성되기에 운명을 예측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대개는 결과론적으로 과거를 해석하며, 신비함을 덧씌운다.

어릴 적 스님이 지나가며 “이 아이는 장차 큰 인물이 되겠다”거나 “수행하지 않으면 단명할 운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마치 오늘날의 주식 차트를 보고 결과를 해석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사주를 볼 땐.

곧, 타고난 복과 후천적인 운의 작용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면 금수저를 물고 시작한 셈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그것이 주어진 운명이라 믿고 살아가야 한다.

같은 사주라도 누가 어떤 ‘복’을 가지고 태어났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옛말에 ‘남의 복은 끌로도 끌어올 수 없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운을 받기 위해 종교나, 부적을 지니는 등 실생활에서 도움 되는 행위들을 한다.

이 모든 것은 삶을 예측하려는 인간의 오랜 습관에서 비롯됐다.



“사주는 바꿀 수 있는 것은, 땅밖에 없다”라는 말도 있다.

홍콩은 삶 자체가 풍수이고, 일본은 천황을 제외한 누구도 매장을 할 수 없을 만큼 풍수에 엄격하다.

중국과 대만 역시 민감하다.

서양에서도 점성술처럼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이와 비슷하다.




정치인, 기업인들 중에서도 풍수를 부정하는 이는 드물다.

요즘은 ‘인테리어 풍수’라 하여, 주거지와 사무실의 위치, 가구의 배치, 색상의 조화, 식물이나 그림까지도 철저하게 신경 쓴다.

대체로 일반인보다 상류층으로 갈수록 이런 이론을 더 많이 적용한다.

왜냐하면 없는 사람이 욕망을 갖는 것보다, 가진 자가 지키려는 의지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하지 않던가.

풍수든 사주든, 그 효과를 어딘가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더 신중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자는 어떤 행위든 활용해 보고, 그 결과가 좋았는지는 분명히 기억한다.

결국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체험을 통해 긍정적인 믿음이 생긴 것이다.

반면 가난한 자는 경제적 여건 때문에 그마저도 시도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우리나라에는 동의보감이라는 고유의 의학 서적이 있다.

수백 년의 임상을 바탕으로 집대성된 귀중한 지식이다.

풍수설도 마찬가지다.

이치에 기반한 인간 삶의 오랜 관찰과 적용의 산물이다.

물론 이를 불신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100% 불신하지는 않는다”라는 점이다.

삶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많은 이들이 이미 이치에 따라 살고 있다.

단지 이론을 체계적으로 알지 못할 뿐이다.



무조건적인 부정이나 배척보다는, 삶에 조금이라도 이로울 수 있다면 그 장점만이라도 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이론이든 100% 지지받을 수는 없다.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나 방법론이라도, 모두에게 똑같이 통하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상류층이 이런 이론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검증되지 않은 것을 무작정 따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와는 다른 수준의 ‘결과론적 데이터’가 있고, 그것을 확신할 수도 있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로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내고, 실생활에 적용해 왔다.

쓸모없었다면 진즉 사라졌겠지만, 아직도 남아 있고 쓰이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존재 가치’가 있다는 증거 아닐까.

같은 메뉴를 판매하는 가게도 유독 잘 되는 자리가 있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의 매출 차이가 난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를 부정한다.

그것이 어쩌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인간 본성일지도 모른다.



부자는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일단 해본다"라는 태도다.

해보고 결과가 좋으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다음 방법을 찾는다.

H사의 창업주가 말했다.

“해보기는 해 봤어.”

이 말이야말로 모든 실천의 시작이자 진짜 부자의 태도다.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판단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

하지만 기준이 나의 체득이 아니라, 남의 말이나 인터넷의 ‘카더라’라면

그건 영혼 없이 부정에 가담하는 꼴이다.



말의 긍정과 부정은 결국 ‘부의 척도’를 가르는 명확한 자대가 된다.

시작점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멀리 가도 도달하지 못한다.

시작부터 굽은 화살로는 과녁을 맞힐 수 없다.

안되면 이유를 찾아 수정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요즘은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부터 한다.

그건 스스로 퇴보를 자초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성공한 자는 ‘사업가’라 불리고 실패한 자는 ‘사기꾼’이라 불린다.

성공과 실패를 오직 돈으로만 재는 건 매우 좁은 잣대다.



어릴 땐 부모가, 장년기엔 재물이, 늙어선 자식이 중요하다고 한다.

정말 돈이 많아 본 사람에게 물어보라.

진짜 행복이 돈에 있냐고.

그들도 처음엔 ‘돈’이라고 하였겠지만, 결국 ‘건강’을 말한다.




사주가 틀렸다 말하기 어렵고, 풍수가 맞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오직 ‘결과론’으로만 해석되기 때문이다.

성공한 이는 모든 선택이 옳았고, 실패한 이는 모든 판단이 어리석었다는 식으로.



하지만 내가 나를 속이지 않는다면, 그 어떤 길도 나에게 의미가 된다.

남의 복을 끌로 끌어낼 수 없듯, 타인의 기준으로 나를 재는 순간 내 삶은 이미 왜곡된다.

운명을 따르되 거기에 갇히지 않고, 이론을 빌리되 거기에 의존하지 않는 것.



그게 아마 진짜 삶을 살아내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살아갈 방법을, 비로소 찾아가기 시작한다.



사진: Unsplash의 Candice Pic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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