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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선 Jul 17. 2022

기차 타고 떠나는 레트로 여행 ‘서천 판교마을’

무장애여행

<기차 타고 떠나는 레트로 여행 ‘서천 판교마을’>  


서천 판교마을은 레트로 여행의 성지다. 시간이 멈춘 듯 작고 조용한 마을에 사람들은 드문드문 오가고 시대극 드라마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기차가 서는 판교역에서 ‘시간이 멈춘 마을’ 판교 스탬프 지도를 들고 마을을 천천히 돌아본다. 워낙에 작은 마을이다 보니 몇 발짝만 가면 스탬프 장소를 금세 찾을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다. 


판교역에서 500미터쯤 가면 오성초등학교를 지나 첫 번째 스탬프를 찍을 고석주 선생 기념 공원이 나온다. 고석주 선생은 호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군산 3·5만세운동의 주역이다. 옥고를 치른 뒤 판교마을에 정착해 농촌 계몽운동을 주도했다. 


고석주 기념관을 지나면 음식특화거리가 나온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시골마을의 몇몇 음식점과 상점들이 마주하고 있다. 마침 배가 고파 접근성 좋은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보니 40년 전통의 삼성식당이 보인다. 냉면전문점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여행자도 접근할 수 있는 착한 식당이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 접근성 좋은 식당이 있다니 기분이 좋아졌다. 메뉴는 냉면과 만두뿐,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시켰다. 그런데 냉면 양이 2인분은 족히 넘을 정도다. 게다가 맛까지 끝내준다. 가격도 착하다. 2인분 양에 7천 원이라니! 

배도 채웠으니 슬슬 레트로 여행을 시작해 볼까나. 식당 뒤 옛 판교역부터 둘러봤다. 옛 판교역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판교역은 일제강점기 때 식량 약탈과 징용, 징병, 위안부 수송을 위해 장항선을 개통하면서 운행됐다. 예부터 서산 팔읍의 한 곳이었던 서천의 역명이 판교역으로 된 것은 염판교리에서 열린 판교장 때문이다. 판교장은 보부상들이 진을 치고 물품을 거래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한때는 하루에 100두의 소가 거래되던 우시장으로도 이름 높았다. 해방 후에는 시골의 청년들이 꿈을 안고 도시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판교역은 1931년 11월에 보통 역으로 영업을 시작했지만 장항선 직선화 공사로 2008년 지금의 판교역으로 이전하고, 옛 판교역은 ‘판교특화음식촌’으로 사용하고 있다. 판교역은 옮겨졌지만 그 앞에 파란 슬레이트 지붕의 ‘판교역전슈퍼’는 그대로 있다. 한가로운 역전슈퍼는 나른한 오후 햇살에 졸고 있다. 역전슈퍼를 카메라에 담아 저장하고 다음 스탬프 장소로 발길을 옮겼다. 


문 열어놔도 가져갈 사람 없는 시골마을

옛 정미소인 오방앗간으로 가는 길목에 ‘서울시계점’이란 간판이 남아 있는 집을 만났다. 휴대전화가 보급되고 시계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도시에서는 만나기 어려워진 시계점을 복고풍 여행지 판교마을에서 만났다. 빠르게 진화하는 문명만큼이나 사람의 감성도 과거의 추억으로 회귀하는가 보다. 매일 시계태엽을 감아주어야 했던 ‘불알시계’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시계점과 마주 보고 있는 택배점도 오래되긴 마찬가지다. 문을 활짝 열어 놓은 택배점은 시골가게에서만 느껴지는 풍경이 머물러 있다. 문을 열어놔도 그 안에 물건을 가져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웃과 경계는 없는 곳이다. 경계가 없는 곳은 사람과의 경계도 느긋하게 아름답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친척보다 가까이에 사는 이웃사촌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농촌 문화, 이웃과 경계 없는 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서천 판교마을이다.  


시계점과 택배점을 지나니 ‘오방앗간’이 반긴다. 스탬프 보관함이 없었더라면 하마터면 놓치고 갈 뻔했다. 오방앗간은 정미소로 활용되던 건물로 파란 양철지붕에 지붕 위쪽은 반 층 정도 더 올라가 있다. 벽은 얇은 나무를 세로로 덧대고 창살로 가려진 창문은 추억을 가둬 놨다. 방앗간 앞에는 ‘오혁철’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다. 인근에서는 가장 오래된 방앗간으로 명절엔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기도 했다고 한다. 


방앗간을 지나면 일본식 가옥인 장미사진관이다. 장미사진관은 2층 구조의 건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살던 집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곳 동면에는 남자 다섯 명, 여자 여섯 명의 일본인, 그러니까 열한 명의 일본인이 살았고, 이 열한 명이 동면 사람들 5,515명을 쥐락펴락 농토와 상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그들은 조선인에게 쌀을 빌려줄 때 반드시 ‘텐노하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라는 일본말을 시켰다고 한다. 나라 잃은 설움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다시 생각해 봐도 통곡할 일이다. 해방 이후 우시장과 세모시장이 열릴 때 상인들의 숙소로 사용하다가 한참 뒤 장미사진관으로 용도가 바뀌어 사용됐다. 지금은 건물만 그대로 남아 당시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다. 


장미사진관과 함께 있는 판교시장은 너무 작아서 시장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마침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 그래도 사람들이 많을 거라 기대했지만, 아침 장은 파해서 한산했고 옷가게와 난전 몇 개가 오일장이 섰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생선을 팔던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볼 뿐 물건을 팔 마음도 없는 것처럼 좌판에 누워 있는 생선만 넋 놓고 바라본다. 할머니 표정에서 도인의 무심함이 묻어난다. 시장 뒤쪽엔 아기고양이 두 마리가 장난을 치며 놀고 있다.


시장에서 몇 발짝만 옮기면 동일주조장이다. 동일주조장은 2000년도까지 술을 만들던 공장이다. 판교마을에 사람이 많았던 시절, 주막에 술을 공급하던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창문은 쇠창살로 막히고 유리창은 군데군데 깨져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쌀이 귀했던 시절, 세수(稅收) 확보 차원에서 가정에서 술을 담그면 밀주로 단속하면서 주조장을 통해 밀가루로 막걸리를 제조해 판매했다. 그 후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쌀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쌀막걸리가 보편화되었다. 박 씨네가 3대째 운영했던 동일주조장은 막걸리 재료인 쌀을 원활하게 수급하기 위해 쌀방앗간을 함께 하기도 했다. 동동주, 탁주, 농주, 왕대포는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곡주로 어려웠던 과거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애환과 삶을 담고 있는 술이다. 


마을 가운뎃길을 지나 판교극장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판교극장은 ‘공관’이라 불리며, 새마을운동 당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기치로 건립된 건물이다. 인근 미산, 옥산, 흥산, 문산, 비인, 서면 등 주변 지역 사람들이 영화를 보거나 유명 가수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또는 노래자랑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핫플레이스였다. 극장엔 영화 포스터가 그대로 붙여져 있고 당시의 요금표도 남아 있다. 매표소의 요금은 일반 500원, 청소년 200원이다. ‘맨발의 靑春’, ‘꼬마신랑’, ‘돌아오지 않는 海兵’, ‘별들의 故鄕’,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미워도 다시 한번’, ‘똘이장군’…, 이런 영화들을 당장이라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장애 여행정보]

⦁가는 길

용산역에서 서천역까지 하루 8회 무궁화호 열차가 운행한다.

-소요시간: 3시간

-좌석: 3호칸 전동휠체어 2좌석, 수동휠체어 3좌석

-요금: 6,900원(복지할인 50% 적용된 금액) 

-판교역은 리프트가 없다, 서천역에서 내려 택시를 이용해 이동한다.


-서천 장애인콜택시 즉시 콜택시 이용

(☎ 041-951-0774, 오전 9시~오후 6시까지만 운행)

-서천판교역 ☎ 041-951-7788, 충남 서천군 판교면 저산리 308-5 저산길 8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식당: 삼성식당(☎ 041-951-5578)

⦁장애인주차장: 판교역, 판교오일장 주차장

⦁접근 가능한 화장실: 판교역, 판교전통시장. 판교행정복지센터


http://www.imedialife.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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