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남매집 막내며느리의 시선에서 바라봄
삐… 삐… 신호음이 울리고 이내 사장님이 전화를 받으신다.
“OO 마트입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전화드렸던 이층 할머니 며느리예요. 요 며칠 어머니랑 통화가 안 되어서요. 혹시 저희 어머니 마트 앞에 왔다 갔다 하시는지 오늘 보셨어요?”
내가 마트 사장님께 묻고 사장님이 다시 답하신다.
“ 아 네 안녕하세요. 할머니 오늘 왔다 갔다 하셨어요. 걱정 마세요. 저희가 할머니 안 보이면 동사무소에도 연락드려서 별일 없는지 할머니 상황 파악 해 달라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
우리 (시) 어머니는 올해로 아흔두 살이 되셨고 나는 그분의 8남매 자녀 중 막내아들인 8번(우리 남편)과 결혼한 막내며느리이다. 딸이 여섯에 7번, 8번이 아들인데 7번은 이민을 가셔서 사실상 한국에 거주하고 어머니의 말벗이 되는 유일한 며느리이다.
17년 전, 아니 19년 전 연애를 시작하고 2년간 교제하고 결혼을 하려고 할 때 위로 여섯 명의 시누이를 두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친정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다.
그때는 이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결혼을 해서 보니 실로 복잡한 가족 관계를 만나게 되었다.
첫째, 첫 번째 시누이는 나의 친정 엄마보다 나이가 많다.
둘째,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조카가 한 명 생겼고, 내 또래 조카들이 서 너명 생겼다. 즉 나는 결혼하자마다 외숙모가 되었다.
셋째,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조카들의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나는 친척 할머니가 되었다. (촌수를 모르겠다. 복잡하구먼…)
넷째, 우리 첫째는 태어나 돌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삼촌이 되었고, 둘째는 태어나자마자 고모가 되었다. (아이들은 이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딱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가끔 만나면 조카들과 또래 친구처럼 논다.)
결혼 후 얼마되지 않아 남편이 하나 부탁을 해 왔다.
“혹시 명절 때 우리 누나들에게 전화나 문자로 연락을 해 줄 수 있어? 나는 둘째 누나, 넷째 누나가 운동회도 오고 나를 잘 챙겨줘서 네가 이 누나들과 잘 지내면 좋겠어?”
그때는 친정 엄마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시누이들이 어려워서 ‘이게 무슨 소리여?’ 하고 화를 내고 싸웠다.
그러나 결혼 18년 차에 접어드는 나는 이제 2025년 신년을 맞이하여 자발적으로 시누이들께 전화를 드리고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남편에게 생색을 내며 “나 대단하다. 나 같은 아내가 어디 있냐?‘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 이런 일을 식은 죽 먹기다.
이런 관계 형성은 뜻밖에 작은 진심 어린 행동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우리 시어머니가 친정엄마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으시니까 그냥 처음부터 할머니 같았다. 그래서 아예 어려워도 않고 그저 나이가 많으신데 혼자 사시는 것이 안쓰러워서 퇴근할 때마다 전화를 드리고 그냥 아무 이야기나 나눴다. 그리고 점점 더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는데 너무 어릴 적에 남편 얼굴도 안 보고 시집오신 이야기, 딸 여섯을 낳고 남편에게 아들 낳아 줄 첩을 구하려고 했다가 점쟁이가 어머니 인생에 아들이 있다고 해서 첩 들이는 계획을 접었던 일, 뜻밖에 7번, 8번 아들을 낳으신 일, 그리고 쉰 살에 남편을 떠나보내신 일,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농부의 아내로 살다가 생업전선에 뛰어들으신 일, 아들 떼어 놓고 일하러 많이 다니느라 모질게 살았던 아픈 어미의 마음 등 수많은 인생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어떤 때는 많이 들어서 외울 지경이지만 그래도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니 들어드리고 다른 사람들 흉보면 같이 욕하면서 장단을 맞춰 드렸다. 일부러 한 것은 아니었지만 돌아보니 많이 들어드렸다.
처음에는 음식도 할 줄 몰라서 “저는 이제껏 공부만 해서 음식은 할 줄 몰라요.” 그랬고, 시간이 흐르면서 책 펴 놓고, 인터넷 보면서 천천히 하나씩 해 드리니까 이제는 다 맛있다고 하시고 아무거나 척척 잘한다고 칭찬해 주셨다.
물론 다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옛날 식으로 우리 아들을 채벌을 해서 키우라고 하셔서 그런 거 싫다고 대들고 싸우기도 하였고, 어머니는 화가 나서 가방 싸서 집으로 가신 적도 있었다. 또 시골에서 올라온 고구마를 썪여서 엄청 혼났는데, “제가 일하느라 바빠서 고구마 먹을 새가 없었다고. 제가 언제 고구마 달라고 했냐고” 대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지 여든 노인이, 이제는 아흔 노인이 혼자 계시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저 전화 자주 드리고 이야기 들어드린 것뿐인데 어머니가 동네방네 다니시면서, 친척들에게 전화하시면서, 딸들에게 이야기하시면서 “우리 며느리, 우리 막내며느리” 하시면서 칭찬을 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졸지에 효부가 되어 시골에서 시누이들이 보내주시는 영광 굴비도 먹고, 단감에 매실까지 맛있는 음식 선물 받고 더불어 고맙다는 칭찬도 받게 되었다.
그저 어머니를 내 시어머니라기 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성경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작은 소자..) 노인으로 대했을 뿐인데 말이다.
다시 앞의 마트(어머니댁 1층 가게) 사장님 이야기로 돌아가서…이 마트 사장님도 우리 어머니를 나만큼이나 잘 살펴주신다. 아니 더 잘 살펴주신다. 어머니가 귀가 어두우셔서 핸드폰을 못 받으시곤 해서 연락이 안 되면 마트 사장님께 연락해서 어머니 안부를 서로 직접 확인하기도 하고, 어머니가 마트에 말씀도 안 하시고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시면 어머니가 어떻게 되셨는가 하고 사장님께서 생존 확인차 전화를 하기도 하신다. 이런 따뜻한 이웃이 어디 또 있을까? 그런데 마트 사장님뿐만이 아니란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동네 가게 사장님들께서 유통기한이 임박한 빵도 주시고, 당일 팔지 못한 치킨이나 튀김도 주시고 여러 가지로 알뜰살뜰 챙겨주시고, 사회복지사 선생님도 정기적으로 돌아보신다고 한다. 고맙다는 인사를 시누이들로부터 내가 받기에는 나는 어쩐지 가까이 있지도 않고 말로만 효도를 하는 염치 불고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도 정작 감사 인사를 받으셔야 하는 사장님께 수화기 너머로 다시 한번 인사를 드린다. 사실 동네 사장님들께 더불어 감사를 드리고 싶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온 동네가 나서서 돌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고령화 사회가 된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도 온 동네가 함께 돌봐야 하고 실제 그런 이웃들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어머니를 돌보는 동네 분들처럼 나도 가까이 사시는 우리 동네 어른을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아직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회가 점점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계속 향상해가면서 우리 세금을 꼭 필요한 곳에 쓰고 있는 것도 관찰할 수도 있다.
사람 사는 것이 별 거 없다.
서로 측은한 마음,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하는 기본적인 것들이 지켜지는 그런 사회이면 괜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