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졸업 25주년 동문 행사를 기록하다.
카톡
카톡
카톡이 울려서 핸드폰을 열어보니, 아니 세상에나, 20년도 넘게 잊고 있던 이름 석 자가 떴다.
“혹시 연세대학교 96학번 OO 전공한 OOO이 맞나요?”
그 이름 석 자의 주인인 내 친구는 내가 그가 찾고 있는 친구가 맞는지 조심스레 물어온다. 나는 꽤나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학교 다닐 때도 한 반에 같은 이름 가진 친구들도 있었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20년이 넘은 나의 카톡 프사는 그가 알고 있던 스무 살 언저리의 나와는 사뭇 다르리라.
조심스러운 그와는 달리 나는 세상에나 세상에… 너무 놀라고 반가웠다. 나는 단번에 우리 과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무척 똑똑했던 친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연락 이후에 나는 96학번 단톡방에 초대되어 잊고 살았던 많은 친구들과 오랜만에 온라인 재회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다시 재회하게 된 건 졸업 25주년 동문 행사 덕분이다. 학교는 졸업생을 수소문해서 1996년 신촌캠퍼스에서 같이 공부했던 이들을 찾아 나섰다. 그 과정에서 옛날 과대 역할을 하던 친구들이 각 과의 리더가 되어 친구들을 찾아내고 불러 모아 연결해 준 것이었다.
사실 내 연락처는 오래도록 바뀌지 않아서 작년 가을부터 메일함과 문자 수신함에 올봄에 있을 대학 동문회에 대한 안내가 정기적으로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약 친구들이 카톡으로 초대하고 톡방에서 워밍업처럼 인사도 나누고 옛날 기억도 소환하면서 마음의 빗장을 풀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동문 행사에 용기 있게 나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는 행사 날이 다가올수록 친구들을 직접 만날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5월 1일 노동절이라 쉬었다. 드디어 5월 10일 토요일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오랜만에 친구들 모임에 가자니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옷장을 열어 미리부터 무엇을 입고 갈까? 보는데 언제나 그렇듯 옷장은 옷으로 가득한데 왜 이리 입고 갈 옷이 없는지. 다시 닫고 새 옷이라도 하나 사야겠다 싶어 평소 잘 가지도 않던 근처 백화점에 갔다.
좋아하는 브랜드에 가서 너무 포멀 하지 않으면서도 마흔아홉의 나이와 동문회 행사에 걸맞고 가격도 적당한 옷을 열심히 찾았지만, 그런 내 마음에 쏙 드는 옷은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또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5월 10일 아침이 돌아왔다. 일찍 깨어 집안일을 하며 다시 패션쇼를 한다. 열세 살 딸아이 앞에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엄마, 너무 이상하니?”
“응. 엄마, 장례식 가는 것 같아.”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다른 재킷을 하나 걸쳐 입고 “엄마 어때?”
“엄마, 셔츠 색이랑 재킷 안 어울려.”
우리 딸, 냉정하네. 그래도 고맙다. “아무거나 입고 가, 너 뭐 그런 거 신경 쓰냐?” 하고 핀잔을 주는 남편보다는 백번 낫다.
다시 청바지에 하얀색 기본 티셔츠를 입고 검은색 재킷을 포멀 한 듯 안 포멀한 듯, 꾸안꾸 스타일로 마무리하고서야 딸아이의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사실 매일 회사 다닐 때 입는 그 옷 그대로지만.
헤어 드라이도 좀 신경 써서 하고, 평소보다 볼터치도 더 하고, 귀걸이도 빼먹지 않고, 혹시 필요할지 모를 명함도 챙겨서 그렇게 동문회 행사에 갔다.
동문회 행사는 제법 규모가 컸고, 단과대별 대표들이 작년 가을부터 준비해 온 행사는 짜임새 있게 잘 준비되어 있었다. 열세 살 딸아이를 데리고 가게 되었는데(가족 동반도 가능한 행사였다. 우리 과 친구들은 모두 혼자 왔지만), 비가 오는데 차를 몰고 가니 행사 시작 후 조금 늦게 대강당에 도착했다.
대강당에는 단과대별자리가 지정되어 있었는데, 우리 단과대인 이과대학 자리는 이미 만석이라 공과대학 자리에 앉았다. 이번 행사는 71학번 선배님들의 졸업 50주년 재상봉도 겸한 행사였다. 그래서 내 옆에는 졸업 50주년을 맞으신 공과대 선배님 그룹이 앉아 계셨다. 머리가 하얗고 일흔이 넘으신, 영락없는 노인들이셨다. 동네에서 어쩌면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분들이지만, 이렇게 옆자리에 앉아 선배님들로 뵈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다른 대학교 66학번이었던 고인이 되신 아버지도 잠깐 생각났다.
행사를 진행하는 무대 위에는 꽤 유명한 인사들도 올라 있었다. 96학번에는 생활과학대학 출신 아나운서 강수정 님이 있어서 공식행사 사회를 보았고, 축하공연에는 공과대와 상경대 96학번 출신들인 스윗소로우가 무대에 올랐다.
그중에서도 단연 우리의 카메라 셔터를 연신 울리게 했던 분은 100세가 넘으신 김형석 교수님이었다. 졸업 50주년 선배님들의 은사로 행사에 참여하신 김 교수님은 직접 단에 서서,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한 모습으로 주옥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김 교수님의 말씀도 좋았지만, 내 마음을 울린 건 96학번의 은사로 오신 경영학과 김진우 교수님이셨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8~9년 전 디지털 제약 회사를 창업하여 교수와 기업가의 일을 병행하고 계시는데, 기업가의 삶은 매일 내일을 걱정하면서 사는 치열한 일상이라고. 그런데 매일 그런 고민을 하며 살 수 있어서 오히려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어 감사하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 마흔아홉의 96학번에게 이렇게 말하셨다.
“지금이 뭔가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입니다.”
1부 공식행사가 끝나고 2부 축하행사에, 우리의 응원가가 소환되었다. 우리는 연고전이라고 부르고, 고려대는 고연전이라고 부르는 그 대학별 대항전에서, 우리는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노래했었다. 마흔아홉이 된 우리의 몸이 그 응원가와 율동을 여전히 기억해 냈다. 당시 스무 살 언저리였던 응원단장과 팀은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 단에 올라 여전히 열정적으로 우리를 리드했고, 우리도 그 시절로 돌아가 어깨동무하고 파도타기를 하며 신나게 놀았다.
에어팟을 끼고 아이돌 노래를 듣고 있던 우리 딸은 엄마와 엄마 친구들의 거대한 응원과 축제에 압도당해 에어팟을 빼고 나와 어깨동무를 했다.
“나는 이 학교는 못 올 것 같아. 그렇지만 이거 은근히 빠져든다, 엄마.”
“아직 너의 미래를 예측하기엔 이르지. 그래도 네가 엄마의 후배가 되면 참 좋겠다.” 나는 그렇게 답했다.
모든 공식 행사가 끝나고 드디어 친구들과의 뒤풀이 모임에 합류했다. 딸아이가 신촌에 온 김에, 이 동네에만 있는 포토부스에서 아이돌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고 해서 그 일을 마치고 나니 조금 늦었다. 친구들은 작은 밥집 겸 술집에 모여 안주를 앞에 두고 이미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공식 행사 자리가 멀어 얼굴을 보지 못했던 친구들은 “너 그대로다”라고 서로에게 친절한 말을 했지만 머리 색도, 얼굴도, 체형도 가지각색이었다. 나도 그랬다. 나중에는 “네가 제일 많이 변했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어색함도 잠시, 자리에 앉아 옛날 추억을 소환하니 그 얼굴들에서 스무 살의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한 친구가 사회자를 자청해 일어났다.
“우리 오랜만이고, 여기 초등학생 손님(우리 딸)이 엄마와 함께 오셨으니 각자 자기 엄마 친구 소개나 하자.”
그렇게 시작된 자기소개는 어색한 웃음과 박수를 타고 훈훈하게 이어졌다.
사실 나는 자연과학부로 입학했다. 우리 단과대는 수학, 물리학, 화학, 생화학, 대기학, 지질학, 천문학, 생물학과 같은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곳이었다. 1학년 때는 이름 순서로 반을 나눠서 나는 마지막 반인 6반에 속했다. 그리고 2학년부터는 전공을 선택해 흩어져 공부하게 되었다.
내가 수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이런 순수 학문을 공부한 이과대 학생들이 나중에 어떤 진로를 선택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나는 성적에 맞춰 대학과 학과를 선택했다. 원래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의대를 가려면 부산에 있는 고신대를 갈 수 있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자 재수를 할까, 고신대를 갈까 망설이다가 결국 ‘다 그만두자’는 심정으로 대학 이름을 보고 그냥 진학을 결정했다.
재수할 용기가 왜 그때는 없었을까, 두고두고 후회되기도 했지만, 이제 와서는 그렇게 대범하지 못한 것도 나라는 사람이었다고 받아들인다. 지금은 전공 무관으로 입사해 20년 넘게 회사에 다니고 있다. 출근하기 싫은 날도 있고, 내일이 안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출근을 해낸 나의 성실함은 스스로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대학 시절 내내 고민했다. ‘나는 왜 이런 공부를 하고 있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지?’ 대학도, 전공도 차선이었고, 다른 전공은 다 하기 싫어서 수학을 택했다. 수학은 좋아했다. 미적분, 선형대수, 기하학, 위상수학 등 많은 과목을 공부했다. 특히 대학의 미적분은 고등학교와 접근 방식 자체가 달랐는데, 문제 풀이에 익숙했던 우리 반 친구들은 평균 30점을 맞았고, 1등은 70점을 맞았다. 나는 그 중간쯤 되는 점수로 반에서 2등을 했다.
4학년 때 들었던 위상수학 수업은 정말 재미있었고, A학점을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목들은 그냥 형식적으로 수업을 듣고, 적당한 학점을 받으며 ‘버텼다’. ‘즐겼다’기보다는 ‘견뎠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니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다시 뒤풀이 모임으로 돌아가서, 내 친구들은 멋진 어른이 되어 있었다. 공부를 계속 이어간 친구들은 수학과, 생물학과,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천문학을 공부해 이학박사가 된 다른 친구는 국립과학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두 명 있었다. 사실 고등학생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나는 대학교 교수님보다도 중고등학교 선생님을 더 존경한다.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을 성숙한 어른으로 인도하는 일이야말로 정말 큰일이기 때문이다.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도 있었고, 기숙학원에서 근무하는 친구도 있었다. 다시 약학을 공부하고 약국을 운영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처럼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IT, 보험, 통신업계 등 분야도 다양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중에는 인공위성 관련 스타트업의 CEO가 된 친구도 있었다. 나는 자동차 회사에서 주로 세일즈와 마케팅 분야에서 일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나는 차를 판다, 친구들아!”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CEO가 된 친구에게 “너는 나의 타깃 고객이다”라고 말해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저녁 모임을 마치고 뭔가 아쉬움이 남아 본교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캠퍼스를 다시 거닐며 딸아이와 학교의 상징인 독수리 상 앞에 가서 둘이 사진을 찍었다. 25년 전에 걸었던 길(백양로)을 딸아이와 걸으니 벅찬 마음이 올랐다.
그동안 정신없이 살면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대학 입시부터 시작해서 계획대로 된 적은 별로 없지만, 차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더라도 그저 묵묵히 살아내고 통과해 왔다. 또 다음 문이 열리고 새로운 인생의 과제가 주어지면 또 그 과제를 풀어내느라 애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가정도 생기고, 엄마도 되고, 생계를 위해서든 자아를 위해서든 일도 하며 매일을 살아내었다. 그리하여 굳이 내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면 ‘성실함의 발자취’라고나 할까 하고 애써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오늘 친구들을 만나고 보니, 친구들도 나만큼, 나보다 더 성실하게 저마다의 몫을 살며 썩 괜찮은 어른들이 되어 있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데, 나는 친구들이 잘 살고 있고 훌륭한 사람들이 되어 있어서 왜 이렇게 뿌듯한지 모르겠다. 방황했던 스무 살의 봄, 여름, 가을, 겨울들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 친구들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냈었고 또 여전히 같은 하늘 아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너, 꽤 괜찮은 어른이 되었구나”, 오늘의 내가 그 시절의 나에게 “너, 걱정과 염려가 많았구나” 이렇게 말을 걸어주는 듯하다.
한국 최초로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가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 들일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
이 축사를 받던 막 서울대를 졸업하는 학생은 아니지만 이 글을 접한 날부터 나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타인으로 친절하게 대하기를 작정하였다.
이제 단톡방을 통해 종종 연락을 하며 살겠지만, 건강히 각자의 몫을 또 살아내고 졸업 50주년에 재상봉을 하자고 약속을 했다. 그때 만날 타인으로서의 나에게 친절한 말을 건넨다. “나, 오늘을 잘 살아내 볼게. 그때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