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작
“엄마, 나 이번 장기자랑에서는 또 뭐 하지? 나는 진짜 왜 이런 걸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왜 매 학년, 매 학기마다 장기자랑을 해야 되는 거야? 장기가 없는 사람도 있잖아?”
은율이 답지 않게 끝도 없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옆에서 밥을 먹다가 오빠가 넌지시 물었다. “은율아, 내가 마술 하나 가르쳐 줄까?”
은율이가 솔깃해서 물었다. “마술? 어떤 마술?”
오빠는 정작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 너네 반에서 이거 하면 나름대로 반응 괜찮을 걸.”
은율이는 본론을 말하지 않는 오빠의 이야기를 못 기다리고 다그쳤다. “오빠, 아우 답답해! 그래서 무슨 마술이냐고? 내가 할 수 있는 거야?”
은율이는 매 학기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장기자랑 시간이 너무 싫었다. 선생님께서는 친구들의 다양한 재능을 서로 뽐내며 맘껏 격려하고, 보통의 수업과는 다른 특별한 시간을 마련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 앞에 서서 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이 은율이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은율이는 친구들이 많이 보여주는 재능, 그러니까 노래나 춤,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 연주, 태권도, 그림 같은 데에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늘 고작 5분이면 지나가는 그 장기자랑 시간을 곤혹스럽게 보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또 찾아온 것이다.
혹시 이번에는 오빠의 도움으로 장기자랑을 잘 넘길 수 있을까?
오빠가 밥을 다 먹었는지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최은율, 가서 페트병 하나, 빨대 두 개 가져와.”
은율이가 반신반의했지만 일단 오빠가 무엇을 하려는지 보기로 했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집에 페트병 있어?” “응, 분리수거함에 가 봐. 거기서 깨끗한 페트병 하나 가져와 봐. 빨대는 싱크대 개수대 아래 문을 열면 플라스틱 바구니에 있을 거야.”
엄마가 알려주는 대로 은율이가 깨끗한 페트병과 빨대를 얼른 찾아와 오빠 앞에 놓았다.
오빠는 빨대를 은율이 머리카락에 비볐다. 빨대를 머리에서 떼자 정전기로 머리카락이 따라 올라왔다. “너 머리카락 봐봐. 이게 정전기가 일어나는 거야. 이제 이 빨대를 페트병 뚜껑 위에 살며시 올릴 거야. 빨대가 떨어지지 않게 잘 두고, 이제 다른 빨대 하나를 페트병 위에 놓인 빨대 가까이 가져가서 원을 그리듯이 움직여봐.”
은율이가 오빠의 말대로 다른 빨대를 페트병 위의 빨대 근처에 가져가 원을 그리듯이 움직였다. “와… 대박. 대박.” 은율이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페트병 위의 빨대를 만지지도 않았는데 옆에 가까이 갖다 댄 은율이의 빨대를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빨대에 생긴 정전기가 반응했던 것이다. 마술이 아니라 과학이었다. 아주 간단한 과학 원리를 이용했을 뿐인데 마술처럼 보이기도 했다. 은호 오빠는 평소에 수학, 과학 관련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다양한 과학 관련 유튜브 영상도 많이 보고, 학교에서 과학 동아리 활동도 했었다.
“오빠가 쓸모 있을 때가 있네.” 보통의 남매처럼 은율이도 “고맙다”는 말을 직접 하지 않고 에둘러 오빠의 조언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표현했다.
“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또 물어봐라.” 하고는 오빠도 별 일 아니라는 듯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은율이는 매우 간단한 실험이지만 장기자랑 시간에 혹시 실수를 할까 봐 매일 연습을 하고 또 했다. 반복적인 연습 덕분에 4학년 장기자랑 시간을 잘 넘겼다. 더욱이 미리 상미에게 부탁했더니 상미가 자신의 머리카락에 빨대를 비빌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실험 중간에도 친구들의 박수를 유도하며 은율이를 적극 도와주었다.
은율이가 더 어릴 때는 앞에 나갔다가 준비한 것을 하지 못하고 그냥 서 있다가 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날은 집에 와서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엉엉 울었다. 또 어떤 때는 잘 그리지 못한 그림을 한 장 들고나가 자신 없는 작은 목소리로 간단히 설명하고 들어온 적도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에 나와 맘껏 장기를 뽐내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그런 날 밤이면 어김없이 이불속에서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며 속상한 마음에 또로록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어서 장기자랑 시간을 빨리 잊어버리기를 기도했었다.
5학년 장기자랑 시간은 달라졌다. 5학년 이은미 선생님께서는 장기자랑의 방법을 바꿔주셨다. “우리 반 친구들, 이번 달 25일에는 장기자랑 시간을 가질 거예요. 방법은 현장에서 직접 선보여도 되고, 영상으로 미리 찍어서 제출하고 같이 감상해도 됩니다. 영상으로 제출할 친구들은 최대 3분을 넘지 않도록 준비해 주세요. 늦어도 이틀 전에는 제출해야 합니다. 혹시 질문 있는 친구 있나요?”
아이들이 새로운 방법을 환영하는 듯 “우와~” 하고 환호하며 질문을 쏟아냈다. “선생님, 요리하는 거 찍어도 돼요?” “선생님, 수영하는 건요?” “선생님, 줄넘기는요?”
선생님은 뭐든지 가능하다고 하시며 다양한 선택지를 주셨다. 어쩐지 이번 장기자랑 시간은 늘 보던 것을 뛰어넘어 다채로운 친구들의 재능을 만날 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 은율이가 또 고민을 오빠에게 털어놓았다. “오빠, 나 이번에 또 장기자랑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영상을 낼 수 있대. 난 뭐 하면 좋을까?” 오빠가 무슨 그런 걸 고민하냐는 듯 대답했다. “그럼 너 할 거 많네. 머핀도 만들고 쿠키도 만들잖아. 그런 거 찍어.”
은율이는 엄마의 도움을 받아 종종 베이킹을 했다. 엄마가 버터와 계란을 섞는 믹서기를 쓰는 것만 도와주면 대부분의 과정은 은율이가 능숙하게 해냈다. “그럴까?” 은율이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끼어들었다. “은율아, 아빠 생각에는 무조건 스케이트보드 타는 영상을 제출하는 게 좋겠어. 이건 반전이거든. 네가 내성적이고 조용해서 아마 친구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영상을 보게 될 거야.”
엄마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네, 진짜네. 은율이 이참에 친구들에게 색다른 모습 보여주자.” “아… 그건 안 될 것 같아. 나 그건 못할 것 같아. 난 친구들에게 나를 자세히 보여주는 것 자체가 너무 부담스럽거든.”
은율이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아 내려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은율아, 생각해 봐. 당장 결정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시간이 아직 있으니까, 네가 결정만 하면 아빠가 스케이트보드 타러 갈 때 같이 가서 영상 찍고 편집도 해줄게.”
아빠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서 영업과 홍보 목적으로 영상을 자주 찍고 편집도 하곤 했다. 아빠의 영상은 전문가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볼 만했고, 나날이 실력이 늘고 있었다. 일단 온 가족이 은율이를 응원해 주니 희망이 보였다.
은율이는 며칠 실컷 고민한 끝에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나 결심했어. 영상 찍어줘. 친구들이랑 볼 때 엄청 부끄러울 것 같긴 하지만 한편으론 내 실력을 한번 보여주고 싶기도 해.” “아이고, 잘했다. 잘했네, 우리 딸. 친구들도 은율이의 반전 매력에 푹 빠질 거야.” 아빠가 은율이보다 더 기뻐했다.
그렇게 둘은 주말에 스케이트보드 파크에 가서 여러 가지 기술을 영상에 담았다. 아빠가 은율이의 스케이트보드 실력을 제대로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아서 은율이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은율아, 아빠가 너무 놀랐어. 우리 은율이가 이렇게 스케이트보드를 열심히 타고 있는지 몰랐네. 진작 와서 자주 영상으로 남겨줄걸. 미안해. 앞으로는 조금 더 자주 함께 해볼게.” “그래? 아빠가 그래 주면 좋지. 사실 엄마가 바빠서 내가 부탁을 못 해서 그렇지, 아빠가 시간 내주면 나는 스케이트보드 타러 더 자주 오고 싶거든.”
은율이는 어서 중학생이 되어 혼자 버스 타고 스케이트보드 타러 자유롭게 오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아빠가 은율이와 스케이트보드 파크에 와 줄 수 있다니 너무 기뻤다.
은율이는 여러 가지 기술 중에서 일단 푸시오프(push off)로 스케이트보드 파크를 가로질러 길게 빠른 속도로 달렸다. 푸시오프는 한쪽발을 스케이트보드 위에 올리고 다른 발로 지면을 밀어내면서 속도를 붙여 스케이트보드에 올라타는 동작이다. 달리다가 속도가 떨어지면 다시 한쪽 발을 내려 가속을 하기를 반복하면서 달려 쿼터램프(Quarter ramp)까지 높이 올라갔다가 킥턴(Kick Turn)을 하고 반대 방향으로 내려왔다. 킥턴은 보드 위를 눌러 앞을 들어 올리면서 방향을 바꾸는 회전 기술이다. 드롭인(Drop-in)보다도 기본적인 동작이지만 스케이트보드 위에 두 발을 올리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이후에는 미니램프(Mini ramp)에서 여러 가지 기술을 선보였고, 빠른 속도록 램프를 타고 올라갈 때는 에어(Air)도 선보였다. 에어는 말 그대로 보드와 함께 공중으로 뜨는 동작을 말하는데 은율이는 잘하고 엄마는 아직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동작이었다. 맘껏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아빠는 바쁘게 쫓아다니면서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아빠는 주말에 찍어온 영상을 몇 날 며칠 퇴근 후 저녁마다 정성껏 편집해 주었다. 중간중간 기술을 설명하는 자막을 넣을 때는 은율이의 도움을 받았다. 배경 음악도 은율이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완성된 영상을 선생님의 메일로 보냈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장기자랑 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장기자랑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각자 과자와 음료수도 가져오라고 하셔서 각자 책상 위에 취향껏 가져온 과자와 음료수를 늘어놓고 먹으면서 편안한 분위기 속에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다. 먼저 현장에서 직접 재능을 보여주는 친구들이 1부를 장식했다. 1부가 끝나고 화장실에 다녀온 후, 2부는 영상을 제출한 친구들의 시간이었다. 은율이는 자신의 영상이 언제 나올지 몰라 가슴을 졸이며 앉아 있느라 과자가 무슨 맛인지도 느끼지 못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은율이는 초코송이 과자를 가져왔는데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아직도 과자가 가득 남아 있었다.
아빠와 요리하는 친구 영상, 야외에서 2단 뛰기와 3단 뛰기 줄넘기를 하는 친구 영상, 수영장에서 평형을 하는 친구 영상이 지나갔다. 아직 은율이 영상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거의 마지막인가 보다 생각했다. 선생님은 매순서마다 근사한 멘트를 해 주셨는데 은율이의 영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친구들아, 이제 마지막 영상인데 선생님이 이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어. 평소 우리가 알던 은율이가 아니더구나. 우리 은율이의 반전 영상을 보자.”
은율이는 입고 있던 후드티의 모자를 올려 썼다.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부끄러워했다. 영상이 시작되자 친구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최은율, 대박!” “최은율, 너 스케이트보드를 탈 줄 알았어?” “반전이네!”
아낌없는 친구들의 칭찬과 반응에 은율이는 어쩔 줄 몰라했다. 3분이 30분처럼 길게 느껴졌지만 이윽고 영상이 끝났다. 수고한 모든 친구들이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며 한 학기를 마감하는 장기자랑 시간도 마무리되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친구들 몇 명이 와서 어디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지, 배운 지는 얼마나 됐는지 물어왔다. 은율이도 친구들의 관심이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머쓱해하며 질문마다 친절하게 대답을 했다. 질문을 한 친구 중에는 한 학기를 마쳐가는데 거의 처음 대화를 나눠 본 친구도 있었다.
그날 밤 은율이는 침대에 누워 자신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어쩐지 내일부터는 좀 더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 친구들에게 내 모습을 보여주길 잘했어. 이제부터는 나도 안 해본 일도 해볼까?.” 혼잣말을 했다.
엄마가 거실에서 물었다. “은율아, 뭐라고 했어? 엄마 잘 안 들려.” 은율이가 답했다. “아니야. 나 혼잣말. 그런 게 있어.”
은율이는 오늘도 한 뼘 자라고 있었다. 더딘 듯, 보이지 않는 듯해도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은율이는 자신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