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은 세상을 향한 모험
“우리도 빨리 커서 투바투 콘서트 가 보면 얼마나 좋을까?”
그네를 타던 호은이가 말했다. 옆에 있는 은율이에게 묻는 것인지, 혼잣 말인지 알 수 없는 그 바람 속에는 우리는 갈 수가 없다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
은율이가 말했다. “왜 못가? 우리 이 정도면 많이 크지 않았냐? 호은아?” 은율이는 갈라면 갈 수 있지 않느냐는 희망을 놓지 않은 듯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생기를 찾은 호은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모으며 은율이를 바라보았다.
”그런가? 우리 콘서트 도전해 볼까? “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은율아, 너 통장 같은 거 있어? 세뱃돈 같은 거 모아 놓았어? 콘서트 티켓이 엄청 비싸던데. “
은율이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나는 엄마가 주니어 통장이랑 체크카드 만들어 줬어. 그래서 통장에 엄마가 매달 용돈 넣어 주지. 세뱃돈 같은 목돈은 엄마가 다른 통장에 관리한대. 내 이름으로. 나중에 커서 대학생 되면 쓰라고 줄 거래. “
”그럼 돈은 문제가 아니네. 나도 비싸긴 해도 티켓 살 수 있는 정도는 모아놓은 것이 있거든” 호은이가 수수께끼를 같은 대화를 이어가자 은율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최은율.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당연히 엄마들이지. 너네 엄마는 5학년 여자애 둘이 서울로 콘서트 간다고 하면 보내주겠냐? 우리 엄마는 정신 차리라고 할 것 같은데. 나는 버스도 혼자 타 본 적이 없어.”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생각에, 우리 엄마는 허락해 줄 것 같은데. 우리 엄마는 공연을 좋아해. 어릴 때부터 우리는 연극도 보고 어린이 뮤지컬도 보고 그랬어. 내 마음 알아줄 것 같은데. 얼마 전에는 할머니 바람 쐬어 준다고 충무로 거기 무슨 극장에도 갔었다. 엄마랑 할머니랑 연극 보는 동안 나는 그 극장 건물에 있는 만화카페에서 혼자 놀았어. “
호은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래? 그럼 우리 부모님 졸라볼까?”
순식간에 호은이와 은율이는 막연하게 상상만 하던 인생 첫 번째 아이돌 콘서트 관람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은율이가 그날 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내가 투바투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그럼 알지.”
“그럼 나 호은이랑 콘서트 가도 될까?”
역시나 예상대로 엄마는 뭐가 문제냐는 듯 쿨하게 반응했다. 핸드폰을 열면서 말했다.
”언제 어디서 하는데? 잠깐만… 핸드폰을 보면서… 체조 경기장에서 하네 “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여기는 너무 멀어서 너네 둘이는 못 가. 엄마가 데리고 가야겠네. 그런데 너 그거 알아? 이거 표를 못 구해서 못 갈 수도 있어.”
하긴 사촌 언니는 프로축구 조형식 선수의 열성 팬인데, 축구 경기를 할 때마다 온 가족 친척을 티겟 구매에 동참하게 했다. 지난가을에는 대구에서 있는 무슨 경기에 꼭 가야 한다면서 이모인 은율이 엄마에게도 티켓 오픈하는 시간에 같이 클릭을 해 달라고 했었다. 은율이 엄마도 하고, 언니도 하고, 은율이 이모 그러니까 언니 엄마도 하고. 아주 온 가족이 야단이 아니었다. 결국은 티켓 두 장을 획득하여 축구 경기에 갔었다. 그러니 축구랑 비교도 안 되게 더 인기가 높은 콘선트 티켓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엄마가 이렇게 선뜻 은율이 인생 첫 콘서트행을 지원해 주다니 은율이의 모험은 순조롭게 시작되는 듯했다.
그런데 정작 집에 놀러 와 있던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핀잔을 줬다. “너는 딸내미한테 너무 관대한 거 아니니?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데 그냥 텔레비전으로 보고 유튜브로 보면 되지. 맨날 바쁘다면서 딸내미 공연 데려갈 시간이 어디가 있어? 너도 참 유난이고 네 딸도 참 유난이다.” 은율이는 평소에 할머니랑 잘 지내고 다정했는데 할머니의 말에 맘이 상했다. “할머니는 내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다더니 왜 내 마음도 몰라?” 할머니가 가신 후에 괜히 엄마에게 투정을 했다. “은율이 네가 문제가 아니라, 할머니는 엄마 힘들까 봐 그러시는 거야. 엄마도 할머니한테는 소중한 딸이거든. 엄마가 일하고 살림 살고 그러는 것이 안쓰러워 그러시는 거야. 그냥 은율이가 이해하고 넘어가자. 중요한 건 엄마가 너의 첫 번째 콘서트행을 어떻게든 도와주겠다는 거잖아.”
아직 티켓도 구하지 못한 은율이는 벌써부터 설레었다. 그러나 다음날 학교에서 호은이를 만나고는 그 설렘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호은이는 엄마가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단다. 호은이는 울고 불고 난리를 쳤는지 눈이 퉁퉁 부어 나타났다. “은율아. 우리 엄마는 허락 못한대. 중학생 되면 가래.” 은율이가 호은이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애원했다. ”호은아, 내가 너네 엄마한테 같이 가서 부탁해 볼까? 아니면 우리 엄마보고 너네 엄마한테 이야기해 달라고 할까? 이렇게 쉽게 포기할 거야? 그네 타면서 네가 가고 싶다고 해서 나도 결심한 건데. 이렇게 쉽게 포기하면 어떡해? “ 곧 눈물이 흐를 것 만 같았다. 하지만 호은이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은율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호은이가 없는데, 나 혼자 콘서트에 갈 수 있을까? “ ”나도 다음에 갈까? 더 크면 갈까? “ 고민하느라 생각의 실타래에 빠졌다. 숙제하다가도 그랬고 화장실에 앉아서도 그랬다. 아이스크림을 먹다가도 생각에 빠져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렸다. 은율이의 결심을 서게 한 것은 콘서트 후기 영상들이었다. 유튜브에서 콘서트 후기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은율이 또래의 친구들도 다녀와서 얼마나 좋았는지 이야기하는 영상을 보니 ”나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가야겠다. “ 하는 마음이 먹어지면서 용기가 샘솟았다. 콘서트에서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하는 춤, 응원법 그런 것들도 알게 되었고 영상을 따라 하며 열심히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미 마음은 콘서트장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티켓이 오픈하는 날이 되었다. 은율이도 엄마, 아빠, 외삼촌, 외숙모에게 부탁을 해서 같이 티켓구매를 클릭했는데 처음에는 대기자수가 5만 명이나 되어서 아무도 못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엄마가 2층 구석에 있는 자리를 하나 획득했다. 그림만 보고는 콘서트 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림으로는 아무튼 무대에서 먼 자리인 것은 분명했다. 아무렴 어때? 그래도 은율이는 꿈만 같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엄마는 평소에는 은율이를 쓸쓸하게 혼자 두는 시간이 많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은율이의 소원을 들어주며 그 모든 서운함과 아쉬움을 날려 주었다. 엄마는 은율이의 콘서트 관람 지원 사격을 위해 휴가를 내었다. 콘서트는 저녁 6시에 시작이었지만 은율이와 엄마는 느긋하게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점심부터 체조 경기장으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콘서트에 대해서 미리 유튜브 영상으로 예습을 한 바에 따르면 미리 가면 즐길 거리가 많다 했다.
처음 가보는 잠실 체조 경기장이었다. 차로 한 시간 이상을 달려 도착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콘서트에 온 건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이미 주차장에 차가 많아서 엄마가 주차장을 뺑글 뺑글 돌면서 주차할 곳을 찾았다. 평소에는 짜증 날 수 있는 상황인데 엄마가 하나도 급할 것이 없는 듯 창을 내려 살랑살랑 5월의 바람을 맞으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디에 차를 대야 잘한다는 칭찬을 받을까? “ 엄마가 혼잣말까지 하면서 주차공간을 찾았다. 이윽고 한 차가 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가서 차를 주차하면서 엄마가 또 말했다. “엄마가 오늘 운이 좋은데, 이 행운은 은율이에게 줄게” 말했다.
콘서트가 있을 경기장 앞에는 거대한 배너가 걸려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배너에 은율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이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경기장 앞마당에는 여러 가지 부스가 있었다. 굿즈를 미리 둘러보고 살 수 있는 부스도 있었고, 홍보용 작은 음료나 부채를 나눠주는 부스도 있었다. 그만큼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정말 많고 다양했다. 엄마는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면서 은율이에게 말했다. “어머 어머, 은율아, 엄마도 이런 아이돌 콘서트가 처음이라 너무 신기하네. 어쩜 이렇게 사람이 많니? 외국인도 많고 엄마처럼 어른도 있네. 이거 완전 딴 세상이구나.” 엄마 말대로 큰 캐리어를 가지고 다니는 방금 외국에서 온 것 같은 사람들도 있었고, 콘서트를 위해서 짧은 드레스나 색상이 파격적인 특별한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저마다 경기장 앞마당을 활보하며 다른 이들의 시선을 한 껏 누리는 것처럼 보였다. 은율이도 처음 만난 세상의 놀라움과 가슴 뛰는 설렘에 말을 잃었고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엄마 나 아이돌 기념 티셔츠 사고 싶어.” 은율이가 말했다.
“그래 사러 가자. 우리 커플 티셔츠로 살까?” 엄마도 들뜬 학생처럼 은율이 친구처럼 장단을 잘도 맞춰 주었다.
은율이의 작은 체구에 꼭 맞는 티셔츠 사이즈는 없었다. M 사이즈 두 장을 사서 엄마랑 은율이랑 각각 갈아입고 둘이 손을 잡고 돌아다녔다. 부스 구경, 사람 구경하는 사이에 은율이는 콘서트를 즐길 마음의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
낮에 도착한 은율이가 엄마와 실컷 구경을 하다 보니 뱃속에서 “꼬르륵”하고 소리가 들렸다. 엄마도 배가 고프고 갈증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은율아. 너 뭐라도 먹고 들어가야지. “
”엄마, 나 밥은 못 먹겠어. 우리 면이나 빵을 먹자. “
“그래 좋아”
엄마와 은율이가 근처 식당을 돌아다니는데 식당마다 자리가 없어서 애를 먹었지만 어느 카페에 자리가 하나 생겨서 얼른 가방을 놓고 앉았다. 엄마가 은율이가 먹을만한 케이크와 엄마가 좋아하는 소금빵, 아이스 라테 한 잔, 아이스 초코 한 잔을 사 와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5월의 한 낮은 이미 여름으로 성큼 넘어가느라 몇 시간 걷고 돌아다닌 두 사람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있고 머리도 축축해 보였다. 엄마가 화장품을 꺼내 얼굴에 팩트를 톡톡 바르고 난 후, 은율이 땀도 닦아주고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꼴깍꼴깍” 빨대를 타고 입으로 들어온 아이스 초코를 먼저 목으로 넘기며 더위를 식혔다.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고 얼음도 입에 넣었다. 엄마도 아이스 라테를 마시면서 소금빵을 크게 떼어 입에 넣으며 우물우물 말했다. “은율아, 이것도 먹어 봐. 진짜 맛있네.” 나머지 반의 소금빵을 더 잘게 반으로 잘라 은율이 입에 넣어 주었다. 그렇게 오손도손 몇십 분의 식사를 마무리하고 엄마가 은율이를 콘서트 장 입구까지 배웅해 주었다. 엄마는 티켓을 사지 않았다. 비싸기도 하지만 아무리 클릭을 해도 두 장을 한 번에 손에 넣기는 쉽지가 않아서 과감하게 은율이 거 한 장에 집중했었다.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입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유리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순간이 되자, 큰 무리를 통제하며 질서를 이끄는 진행요원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서부터는 부모님 입장 안 됩니다.” 은율이 엄마 말고도 아이들을 들여보내는 어른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티켓에 적힌 층수와 좌석을 은율이에게 확인시켜 주고 은율이를 들여보냈다. 걱정이 되기는 엄마도 마찬가지였지만 ”은율아, 계속 통화하면서 들어가자. 모르는 것 있으면 저 옷을 입은 분들한테 물어보고. 알겠지? “ 진행요원들이 진행요원이라고 크게 쓰인 주황색을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계속 통화를 하면서 가다가 은율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이제 2층에 올라왔어. 여기서부터는 좌석 번호 보고 찾으면 될 것 같아. 전화 끊어도 괜찮아. 엄마는 카페 가서 커피 마시고 책 보고 있어. “ ”그래 우리 딸 파이팅. 오늘 맘껏 즐기고 와. 사랑해. “ 이렇게 통화를 마쳤다.
이제 은율이가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갈 차례가 되었다. 엄마를 안심시켰지만 사실은 은율이보다 키도 크고 덩치고 큰 언니들 무리에 섞여 앞으로 전진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티켓의 알파벳과 좌석의 알파벳을 맞춰보는데 당황해서 그런지 H열이 잘 찾아지지가 않았다. 이쪽 갔다가 저쪽 갔다가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어떤 언니가 말을 걸었다. 중학생쯤 되어 보였다. ”꼬마야? 너 자리 찾는 것 좀 도와줄까? “ ”네? 네 “ 아주 작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티켓 보여줄래? 네가 내 앞에 계속 가는 것을 보니 나랑 좌석이 비슷해 보여. 나는 H9이거든. “ ”어, 제 거 H7이에요. “ 반가움에 은율이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그렇게 우연히 만나 중학생 언니를 따라가 좌석을 찾았다. ”고맙습니다. “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아직 콘서트가 시작되려면 좀 멀었다. 은율이는 두리번두리번 천장과 무대, 공연장을 계속 채워가는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면서 그제야 ‘내가 드디어 아이돌 콘서트에 왔다니’ 하고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조명이 완전히 소등되었다. 곧 공연이 시작하려나보다. 은율이 최애곡의 전주가 시작되고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면서 아이돌이 무대 바닥에서 솟아 올라왔다. 은율이는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의 함성에 같이 동참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여러 가지 음악으로 모든 공간을 채울 때 갑자기 놀라서 순간 겁이 났다. 이런 큰 군중 속에 혼자 서 있기는 세상에 나서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전화를 꺼내 엄마에게 카톡을 했다. “엄마, 나 조금 무서워. 눈물 나려고 해. 엄마 보고 싶어.” 엄마가 바로 메시지를 읽고 답을 했다. “뭐가 무서워. 괜찮아. 조금만 있어봐. 우리 뮤지컬도 가고 연극도 갔었잖아. 조금 더 큰 공연이라고 편히 생각해.”
“알겠어. 엄마. 사랑해. “ 은율이는 온라인으로나마 엄마의 응원에 힘입고 엄마의 사랑에 힘입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찔끔 나온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적응을 하고 공연에 빠져 들었다. 은율이가 미리 연습한 응원연습이 아주 효과 만점이었다. 청중과 함께 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매 노래를 따라 부르고 환호하며 조화를 이루자 곧 공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밖에서 엄마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카페로 갔다. 아까 앉을자리 하나 없던 카페에는 사람들이 공연에 많이 들어갔는지 자리가 여기저기 비어 있었다. 이번에는 따뜻한 그린티라테를 하나 시켜 테이블에 놓고 랩탑컴퓨터를 켜고 회사 이메일을 열었다. 온종일 은율이와 노는 동안 회사 메일의 메일함은 여러 가지 내용의 요청사항과 회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씩 메일을 읽고 답을 하고 처리하는 사이 이미 공연이 시작한 지 1시간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노트북을 가방에 다시 넣고 책을 한 권 꺼냈다. 평소 책을 조금씩 짬을 내어 자주 읽는 엄마의 가방에는 언제나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며칠을 읽을 때도 있고 몇 달에 걸쳐 읽을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읽다가 접고 다른 책을 집어 들 때도 있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All the beauty in the world”>라는 붉은색 표지의 책을 펴니 어두컴컴해진 밤의 카페 안 조명 아래에 꽤나 잘 어우러졌다. 엄마가 붉은색 표지가 잘 나오도록 사진을 이렇게 저렇게 몇 장 찍어 SNS에 올리면서 짧은 메시지를 적었다. ”우리 딸 인생 첫 콘서트 지원 나온 엄마는 카페에서 독서 중 #투바투콘서트#독서“
엄마는 책장을 넘기면서 점차 활자 사이로 빠져 들어가고 다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이동해 있었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스페인의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시녀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정작 책에는 이 작품의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 그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엄마가 스무 살, 그러니까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갔던 스페인 여행에서 이 작품을 실제로 보고 엽서를 한 장 사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다시 핸드폰으로 찾아서 기억이 맞는지 확인했다. 엄마의 기억이 맞았다. 이미 거의 삼십 년 전의 경험이지만 엄마에게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 작품에 대한 기억이 또렷했다. 엄마는 경험이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은율이에게 더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 줄 거야. 은율이가 이렇게 조금씩 세상을 향해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어만 준다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페 종업원이 와서 ”고객님, 저희 이제 마칠 시간이에요. 정리 부탁드려요. “ 말해주었기 때문에 이미 시간이 10시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책을 덮어 가방을 싸서 등에 둘러매고 공연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10시가 조금 넘어가자 전화가 울리고 ”우리 딸“이 전화기 액정에 떴다. ”최은율, 어땠어? 좋았어? “ 엄마는 속사포처럼 은율이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너무너무너무 좋았어. 엄마 고마워, 엄마 나 아까 그 카페로 갈까?” “아니. 엄마도 그 카페 나와서 공연장 앞으로 가고 있으니까 걸어오다가 만나자.” 그러나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거슬러 반대방향에서 은율이를 만나러 가자니 만만치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보니 카페에서 공연장으로 가는 길목에 가로등마다 그 아래에 아이돌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그려진 배너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엄마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은율아, 안 되겠어. 우리 중간에 있는 ‘수빈이’ 배너 아래에서 만나자.” “오케이” 은율이가 답했다.
그렇게 둘은 전화를 끊고 곧 ‘수빈이’ 배너 아래에서 상봉을 했다. 은율이는 아직 공연의 감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엄마는 땀범벅이 된 은율이 이마를 쓸어주며 카페에서 주머니에 넣어온 티슈로 땀을 닦아주었다. 은율이의 즐거움을 조금 더 누리기 위해서 그곳에 머물면서 가로등마다 달린 배너들 - 각 멤버들마다 배너가 하나씩 -마다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은율이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배너마다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었지만 모두 질서 정연하게 자기 차례를 잘 지켰다. 사진을 찍고 모든 활동을 마치고 나니 이미 시계는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은율아, 이제 집에 가자. 아빠가 걱정하겠다.” 서둘러 둘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도 은율이에게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었다. 은율이가 오늘 가장 맘에 들었던 노래를 계속 들었다. 엄마는 밤길을 달렸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할 때쯤 되어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은율이 엄마, 둘 다 안전하게 잘 오고 있는 거지? 벌써 12시라 걱정되네.” “그럼 당연하지 우리 이제 10분이면 도착해. 우리 딸에게 소감이나 물어보셔.” 아빠가 말했다. ”은율이 좋았지? “ 그런데 아무런 답이 없다. 엄마가 옆을 보니 은율이는 이미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다. ”은율이 아빠, 은율이 잔다. 얼마나 고단 했겠어. 금방 갈게. 바이“
은율이가 추울까 봐 에어컨을 껐다. 엄마가 계속 앞으로 달리며 속삭였다. ”우리 딸 애썼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느라. 엄마는 우리 딸의 모든 순간, 모든 걸음을 응원하고 지지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