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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창한오후 Jun 28. 2018

물러설 곳 없는 삶에서

2002년 3월 말일.

예식장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구청 강당이 싸겠거니 피로연 예약금 십만 원을 걸었지만

그곳은 아무것도 준비가 없다는 걸 몰랐지.

누가 이벤트를 하라기에 알아봤더니 견적이 이백만 원.

결혼은 처음인 데다 가이드 해줄 이 없던 게 실수였다.

마침 아내 직장동료 정보로 어느 망했던 예식장.

재오픈으로 동내 소문이 절실했던 가격 포기로 정상적인(?) 결혼식이 가능했다.


이천만 원 전세.

그나마 천오백 근로자 지원 대출 끼고 얻은 신혼집은 명식형과 친구 J의 도움으로 문짝 페인트칠 이라도 하고 시작할 수 있었다.


난 서른, 아내는 스물여섯.

아무 기댈 수 없이 자력갱생해야 하는 성인은 맞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도 아니고 철도 없었지 싶지만...

나름 열심히 살고 있던 것은 분명해.


영세공장 직장, 내 월급 150.

신혼초 둘은 조금 더 적금 모았을 때 애를 낳기로 가족계획했다.

하나 그땐 이미 뱃속에 애가 있었어.

결혼한 지 한 달 만이라 전혀 몰랐던 것뿐이지.,


애를 지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뭐가 있어야 낳지.

지우진 못했는데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라 대책이 없던 거라 봐야겠지.

그때 생각은 첫째를 낳고서야 느낄 수 있었는..,

이렇게 소중한 내 새끼에 대한 미안함이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미칠 지경으로 큰 죄로 남게 된 거야..


그렇게 애를 낳고 보니 월 150으로는 살 수가 없더라고..


새로운 사업구상.

즉 전세금 이천을 빼서 오백짜리 월세로 옮기고 남은 금액으로 장사를 계획했다.

친한 친구랑 동업을...

다행히(?) 친구 부모님 동업 반대로 틀어졌는데..

난 이미 회사를 나온 백수고 그나마 받던 월 150이 없어진 마당이라 매월 카드값은 그만큼 쌓이게 되었어.

벼룩시장 광고에 나온 일자리가 별거 없다는 걸 알아.

그래도  난 어딘가 전화로 취업 문의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쌔콤과 비슷한 출동 경비 업체인데

점포나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아직  경비 시스템 없는 사업장에 영업을 하는 일이다.


출동 경비원과 똑같은 복장과 모자를 쓰고 다녔던 건 책임자가 보험맨 출신으로 의욕적으로 하길 원했던 것도 있지만 내 절박함이 쪽팔림을 무릅쓰게 한건 지도 몰라.

왜냐면 2~30명 영업사원 중 나만 모자까지 쓰고  다녔거든...


이 일은 월 10만 원 가입자를 계약하면 50만 원을 줬는데 그냥 주는 것은 아니었고,

매월 10만 원씩 삼 개월 지급했고 남은 20만 원은 더 긴 기간 분할 지급해 줬어.

꾸준히 가입자를 발굴하면 적지 않은 돈이 지급되는 구조였지만 구멍가게 하나 뚫는 것도 쉽지 않다 보니 수입이 좋지 않았더라고


난 큰 건을 물고 싶었어.

예를 들어 큰 공장은 cctv 설치까지 해서 매월 60~100만 원 했는데 거기에 다섯 배면 크다 커.

공장들 사무실에 잡상인 주제에 당당히 들어가 책임자를 만났다.

견적까지 받길 원하는 업체에 잘 짜인 금액으로 견적을 넣었지만 번번이 좌절만 당했었다.

난.  

인천 주물공단을 낡은 갤로퍼로 매일 샅샅이 누볕어.

같은 곳을 계속 다니면 친해지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런 흔한 어떤 날

밥이나 먹도 가라던 어느 공장 공장장.  


함께 식사 후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을 기댄 채 앉아 같이 담배 하나 물었는데

이 분과 뜻밖에 대화가 이어졌다.


"나이가 몇이오?"

"서른 하납니다."


"잘은 모르지만 참 열심히 사는 거 같소."

... ...

잔잔한 대화로 기억난다.

난 알 수 없는 마음이 일렁거려 속 마음을 열었던 거 같아.

독한 담배 두 모금 빨고.


"공장장님. 제가 열심히 산다고요?

아비가 정신을 놓으면 새끼는요.

아들을 낳으면 도둑놈이 되 

딸을 낳으면 창녀가 된다 봅니다.

열심히 살고 싶어서 사는 것만은 아닐지 모르겠어요.

물러날 곳이 없어요."


희끗 지나가는 자조성 말투로

"나보다 낫소."


물러설 곳이 없었던..  아니 없다고 생각했던 그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은 나이 더 먹은 것 빼고 좋아진 거겠지?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는 것은 녹녹지 않은 거 같아.  

왜냐면 한 번도 물러날 곳이 있다고 생각 든 적 없거든..


부모가 재산이 있던. 자수성가했던.

아니면 마누라 집안이 좋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물러날 곳을 아는 이가 없어 보인다.


오늘도 애새끼들 도둑놈 혹은 창녀를 만들 않기 위해 제 자리에서 똑바로 서려고 하는데.

역설적으로 내 가정이 나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은 것임을 안다.  


자존심.

내 청년 시절 이상은 고이 덮어두고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전쟁터를 항해

오늘도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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