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북한포로를 보면서 내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by 화창한오후



최근 pd수첩에서 이 포로에 대해 우크라이나 현지 인터뷰 남겨서 유투브로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어린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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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다친 왼쪽, 10년차 말년 군인. (1999년생)

앞서 투입된 여러 부대도 드론 공격에 무방비 전멸했고 그 다음 투입된 부대원 입니다.

동료가 눈 앞에서 드론 폭탄에 죽는 걸 보았습니다.

그 또한 팔 관통한 총알이 턱까지 스쳤고, 피를 많이 흘리며 잠시 정신을 잃으며 잡혔습니다.

생포했던 우크라이나 군인 말에 의하면 그는 순순히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머리를 돌에 부딪치는 자살 시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pd수첩 기자가 포로에게 형제를 물으니 외동..


오른쪽, 더 앳된 병사(2005년생)

모두 죽고 혼자 다리를 부상 당했습니다. 수류탄 들고 자폭을 하려는 중

러시아 군으로 속인 우크라이나 측에 생포되었습니다.

자폭 실패,

"어느 누가 죽고 싶은 사람이 있겠나!"라고 말했지만

포로가 되면 북한 가족이 큰 피해를 입는다는... 어머니 걱정.... ..

"아들이 전쟁 나간 걸 모른답니다"



난 12살 되던 해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생각 났습니다.

이북 신의주 용암포 출신.

한국 전쟁때 18살로 인민군에 징발되어 따발총 메고 이남으로 내려왔습니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얼마 안돼 포로가 되었고 거제도에 수용되었습니다.

그에 선택은 반공포로였고 스스로 고향 가는 길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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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1956년 5월 31일. 한문- 부관임 전하림 제대 축 기념 ("임"은 재직을 의미)




우리 아버지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습니다, 그로인해 오십초반 이라는 길지 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짐작컨데 아버지는 화가 많았던 듯 합니다.

그걸 우리집안 형제는 골고루 나눠 받았던 거 같습니다.

늘 화부터 내는 큰 형,

권위가 엄청나서 더 힘이 강했던 둘째형도 감히 오르지 못했습니다.

세째형과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에 유일한 형제는 사촌누님(고모) 한 분이 서울에 계셨습니다.

큰 형 말로는 그 집은 교회 다녀서 잘 산거라 평가를 하기도 했습니다.

형제들이 모두 잘 된 편에 속하거든요.

그에 비해 우리집은 가난했고, 형제는 공부를 못했습니다.

머리는 나쁘지 않았으나 중고졸이 대부분..

그런데 정말 (아버지 사촌) 고모네는 하나님이 도와준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만 본질은 아닐겁니다.

신앙 덕으로 가족이 온화했던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한 집안이 잘되고 못됨에 큰 가름선 아닐까 합니다.


저도 어쩌면 화가 많았습니다.(그걸 아주 나중에 알았지만)

큰 아들, 초 5학년까지.. 혼내며 때렸던 시절..

물론 잘 되길 바라는 훈육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내려온 화를 전달 하던거죠.

어린 아들은 아빠 권위에 무릎 꿇었지만 분노에 찬 눈빛을 보였습니다.

자신에 3살 아래 남동생에게 화를 전달하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이는 다 저 때문입니다.

'아! 내가 술먹고 때리는 아빠가 되었구나 !!!'

당시 매를 부러뜨리고 다시는 들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말로 혼내는 것도 끊었습니다. 아이 상처가 더 자라지 않기만 바랬습니다.

그래도 불뚝 아이들에게 화낼 때도 있었는데요. 점차 성품을 더 바꾸었습니다.

그땐 물려받은 화가 있는줄 몰랐지만 잘 끊어 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직도 작은형은 자기 아들에게 화를 내고 사는 걸 봅니다.

열여덟 외동 아들, 사춘기와 겹쳐 사회적 큰 사고를 치고 구속이 되었습니다.

구속자 면회에서 말하길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려고 두번이나 올랐다고 했습니다.

제 아비와 관계가 점점 악화하던 중입니다.

다행히 이번 사건을 처리하면서 부자간에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차라기 큰 사고지만 기회가 된게 다행일 정도 입니다.

우리집 분위기는 폭행, 윽박지름이 자주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자랄때 특히 따듯한 격려와 칭찬이 중요한걸 알았습니다.


북한 포로 말하다 보니 결국 우리집 역사까지 이어졌습니다.

포로 청년 마음 속 상처가 살면서 부정적으로 작동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쩌면 1950년대 청년기 내 아버지 보는 것 같다는 동질감이 있었나 봅니다.

이 고향 끊긴 청년이 어떻게 살아갈지.. 남 얘기같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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