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출판이라고> 출간 전 연재
프롤로그. 방구석에서 세상의 구석으로
<사하라 이야기>라는 책을 처음 발견한 날은 평소 잘 가지 않는 동네에 있는 한 병원에 병문안을 갔던 날이었다. 병문안을 마치고 잠시 건너편 모퉁이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벽을 장식한 선반 위의 책에 시선을 두었다.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익숙한 책들 사이에서 한 권의 책과 눈이 마주쳤다. 디자인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책등에 쓰인 제목에서 간결하면서도 강한 메시지가 느껴졌다. 책을 뒤집어 보았다.
“말괄량이 대만 처녀, 단순무식 스페인 총각과 사막에서 결혼하다.”
흥미로운 카피에 이끌려 책을 열어 보았다. 사막에 살고 싶었던 대만 여성 싼마오가 스페인인 남편과 함께 무작정 사하라에 신혼집을 차린,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꼭 사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나의 시선이 간략하게 쓰인 옮긴이 소개글에 다다랐다.
“아주 작은 출판사 막내집게에서 책을 만들고 있다.”
알고 보니 번역자가 직접 판권을 계약해 번역하고 출판한 책이었다. 당시 신입 편집자가 되어 출판의 초입에 서 있던 나에게는 책이 더 귀하게 다가왔다. 이 단단하게 여민 책을 만들기까지, 만든 이가 홀로 겪었을 시간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듯했다. 이 책을 발견한 순간 어쩌면 만들고 싶은 책을 직접 번역해 출판하는 길에 대한 씨앗이 내 안에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대형 출판 시스템에서 만들어지는 세련되고 멋진 책들이 많지만 가끔 틀이 잡히지 않는 틈새에서 터져 나오는 총천연색 책들이 나의 눈을 잡아끈다. 어릴 때부터 책 자체보다 책 세계가 더 좋았던 이유는 그 안에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책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스운 책도, 괴상한 책도, 이상한 책도 공존하며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마저도 좋다. 어릴 때부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이런 책도 존재하다니!’하고 놀라는 일이 취미였다. 하나의 완결을 맺으며 책으로까지 탄생한 누군가가 부린 고집의 결과물. 누군가의 고집으로 만들어진 책에는 그런 책에서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 나 역시 나만의 고집이 있다. 덕분에 나를 나답게 살게 해 주었고 나만의 이상한 책을 만드는 ‘마이웨이’ 길을 걷게 해 주었다. 어디선가 나와 같이 외롭게 자기만의 고집을 부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하나의 보조선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책의 1부와 2부는 출판사 ‘책덕’을 시작하게 된 순간부터 첫 책인 <미란다처럼>을 만들고 팔았던 과정을 담았다. 처음 출판을 해 보자고 결심한 후 인터넷과 책을 뒤지며 출판 과정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해외 원서의 판권을 계약하는 구체적인 과정이나 책을 딱 한 권 만들어 유통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을 위해, 그리고 나처럼 정보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블로그에 그때 그때 겪었던 출판 과정을 최대한 솔직하게 기록했다.
3부는 ‘내가 연결하는 책 세계’다. 출판사와 서점은 책을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같은 목적을 공유하지만 유통 구조의 복잡성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가 항상 편안하지만은 않다. 크기와 형태에 따라 각각이 맺는 관계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출판사 운영자로서 서점에 직접 다가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서로 연결되는 일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4부는 가장 최근에 쓴 글로, 처음 출판을 시작할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썼다. 시작할 때는 그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 보자는 목표 하나면 되었지만 6년이 흐른 뒤에는 그때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내 모습과 마주해야 했다.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경험하고 기록한 내용을 출판하는 것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살을 붙이고 다듬으면서 지금의 나에게 출판이라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하다 보니 점점 어깨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드러내는 편이 누군가에겐 성공담보다 더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원래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배우는 게 많은 법이니. 이왕이면 남의 실패에서 배우는 게 좋다.
누군가 ‘책덕’에서 만든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면 굉장히 망설이겠지만, 저자 중에 누구와 함께 일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예스 플리즈>를 쓴 에이미 폴러를 꼽겠다. 정적이고 냉소적인 나와는 반대로 에이미 폴러는 아주 밝고 긍정적이며 제대로 나대는 성격이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는 인간미 때문에 에이미의 따뜻함에 반했던 여러 사람들의 일화가 끊이지 않기도 한다. 책으로만 세상을 배워 왔던 나와는 달리 즉흥적인 행동으로 세상을 돌파해 온 에이미를 보면서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절대 모를 일도 있다는 것, 그리고 책의 세계에서 일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2000년 하버드대 졸업식에 초빙된 에이미 폴러는 졸업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능력으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몸소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도망이 특기요, 관계 자르기가 취미였던 나에게 출판이라는 일은 결국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회복하고 어른이 되는 일이었다. 방구석에서 뛰쳐나와 세상의 구석에서 살아남기.
여행을 다녀오면 멋진 풍경도 그립지만 그곳에서 마주쳤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더 오래 진하게 남는다. 출판의 여정을 되돌아보니 책이 아니라 그때마다 마주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묵묵히 곁을 지켜 준 사람, 대단하진 않지만 나름의 용기가 필요했던 나의 시도에 기꺼이 응원을 보내 준 사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사람,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이가 쓴 온라인상의 글에 따뜻한 댓글을 달아 준 사람. 덕분에 이 책도 쓸 수 있었다.
“모두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thelinebooks/221796144109
<목차>
프롤로그. 방구석에서 세상의 구석으로
1부 책 한 권 내고 망하기
1장 드라마 폐인, 미란다 덕후가 되다
2장 변두리 편집자의 실없는 상상
3장 어차피 안 팔리니까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자
4장 출판사 대표지만 상백수
5장 번역 프로젝트: 미란다에 빙의하라
6장 마음을 다해 대충 만든 책
7장 내가 정말 좋아하는 편집자의 일
8장 크라우드 펀딩, 예비 독자 만나기
9장 독립 일꾼에서 자유 일꾼으로
2부 내 방식대로 만들어 팔기
1장 책 한 권 만들어 파는 데 필요한 돈
2장 진짜 책이 만들어지는 것은 지금부터
3장 내가 만든 책들의 기숙사, 물류창고
4장 유통, 책은 어떻게 독자를 찾아갈까?
5장 갑갑해도 갑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6장 탱자탱자 출판인의 스마트한 하루
7장 책 못 파는 출판인의 생존 전략
8장 마을시장에서 책 팔기
9장 그러니까 중쇄를 찍자
3부 내가 연결하는 책 세계
1장 작은 책방과의 접속
2장 독자와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아서
3장 그것밖에 없는 책방이라서
4장 포항은 책방이다, 달팽이책방
5장 속초의 평범하고 특별한 서점, 동아서점
6장 이웃사촌이 된 책방, 번역가의 서재
7장 건강하게 책 만들고 팔기, 땡땡책협동조합
4부 지도는 없지만 발걸음을 옮기자
1장 다음 책은 언제 나와요?
2장 웃기는 여자들이 세상을 뒤집는다
3징 코믹 릴리프, 너드 걸을 위하여
에필로그. 이것도 출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