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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Jul 08. 2020

출판사 등록했지만 상백수

미란다의 책 <Is It Just Me?>에 대한 한국어판 판권에 대한 공탁금을 입금하고 얼마 후 에이전시에서 출판사 소개서를 요청했다. 그러면 그렇지. 출간한 책이 하나도 없는 초짜 출판사에 뭘 믿고 선뜻 계약을 해 주겠어? 근데 돈 넣기 전에 물어볼 것이지, 이건 무슨 경우래. 출판사 소개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계약 불발되면 당신들 책임이니까 내 공탁금 돌려줘! 


혼자 불만을 터트렸지만 이름뿐인 1인 출판사가 뭐 어쩔 도리가 있으랴. 금세 태세를 전환해 뭐라고 써 보내야 책 계약을 흔쾌히 진행해 줄지 고민에 빠졌다. 이 책 하나 만들려고 등록한 출판사라고 사실대로 보낼 순 없으니 상상력을 동원해 큰 그림을 그려 보기로 했다.


여성들을 위한 에세이를 낼 계획이고 앞으로 미란다의 책과 결이 비슷한 책들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자. 그리고 왜 <미란다처럼>을 원하냐는 질문에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유롭고 유쾌한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대체 불가능한 책이라고 적고. 마케팅 계획에는 큰 출판사에서는 책을 많이 내서 집중하기 힘든데, 나에게는 이 책이 처음이자 (한동안) 유일한 책이기에 집중해서 책을 소개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적었다.


나홀로 써보았던 적나라한 번역 검토서와 원서 출판사에 보낸 출간 계획서


미란다 하트의 책은 영국에서 베스트셀러에 들기도 한 책이라 혹시나 이런 작은 출판사에는 맡길 수 없다고 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소개서를 보낸 후 약 한 달이 흘렀다. 아무래도 안 되려나 하고 생각할 즈음 에이전시에서 계약을 진행하자는 답변이 왔다. 미리 입금했던 공탁금을 제한 금액과 에이전시 수수료 33만원까지 입금하고 나니 두 달 후 두툼한 영문 계약서가 도착했다. 다행히 에이전시에서 중요한 사항을 한글로 요약해 보내 주어서 이 내용을 중점적으로 확인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외서 계약 과정은 대부분 기다림의 연속이다. 어떤 책은 계약 의사를 밝히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기도 하고 어떤 책은 계약하겠다고 답을 보내도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시간을 끌기도 한다. <Is It Just Me?>의 경우에는 판권을 문의하고 계약이 완벽하게 체결되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영국 출판사로 처음 메일 보낸 게 2013년 4월, 출판사를 등록한 게 6월, 계약 조건이 최종 승인된 것은 8월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계약서가 도착한 것은 11월이었다. 그동안 회사와 퇴사 일정을 조율하고 인수인계를 하며 인디자인 수업을 들으며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았다면 기다리는 하루, 하루가 불안했을 것 같다. 


에이전시로부터 도착한 작업용 원서. 하드커버와 소프트커버 모두 보내주었다.


계약이 완료되자 작업용 원서 3부가 택배로 도착했다. 드디어 번역을 시작할 순간이 왔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쳐서 엑셀에 번역 일정을 적어 넣었다. 하루에 이 정도 분량만 번역하면 3개월 후에는 번역 완료다!


물론, 당연히, 계획은 지켜지지 않았다. 외주 편집 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 번역 일정이 뒤로 밀리기 일쑤였고, 직장 생활을 하던 때와 달리 정해진 작업 시간이 없어서 일과 생활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한 시간을 하루같이 쓰기도 하고 하루를 한 시간같이 흘려 보내기도 했다.


가끔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질문을 받을 때가 있었다. “아, 지금 번역하는 중이에요.” 초반에는 상황을 모면하기에 이 대답이 썩 괜찮았는데, 3개월 후에도, 또다시 3개월 후에도 같은 대답을 해야 해서 민망한 나머지 사족이 주절주절 따라붙었다.


“아직 번역하는 중인데요. 이게 책이 꽤 두꺼워요. 300페이지 넘는 데다가 그림도 그려야 하고… 가끔씩 맡는 다른 출판사 편집 일도 있어서 좀 늦어지네요. 하하-” 


이 시기에 번역 판권을 계약하고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할 블로그를 만들었다. 국내에 미란다 하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관련 기사나 정보를 번역해 공유하고 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관심 있는 사람들과 나누고도 싶었다. 특히 내가 출판을 준비하면서 인터넷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에게도 내가 기록한 출판 정보가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정보를 나누는 정신은 내가 좋아하는 인터넷의 미덕 중 하나였다.


물론 이렇게 블로그에 정보를 정리하는 것이 책을 알리는 데도 도움이 되고, 어떤 기회를 잡을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자산이나 인맥이 풍족하지 않은 출판인인 나에게 블로그는 하지 않으면 무슨 배짱이야 싶은 필수적인 출판 도구이기도 했다.


실제로 블로그를 보고 미란다에 대해 알아보다가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독자도 있었고 출판 과정을 정리해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나에게 편집을 맡기고 싶다며 일을 의뢰한 사람도 있었다. 혼자 일을 하는 나에게 블로그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는 도구이자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최소한의 창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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